멀고느린구름 |




드라마 '학교 2017'의 한 장면




뭔가 이상하게 욕하는 아이들


욕은 10대의 언어다. 새로운 언어들처럼 새로운 욕들도 10대 청소년들에 의해서 탄생한다. 기성 세대에게 대항할 실질적 힘도 권력도 가지지 못한 아이들이 말이라도 날카롭게 벼르고자 하는 것이 아마도 그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10대가 지나고 기성 사회에 진입하게 되면, 몹시 친밀한 관계(그 또한 상호 욕설이 합의된 관계) 외에는 욕설의 사용이 현격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함부로 욕을 했다가는 사회적 지위가 크게 흔들려버리고, 일을 그르치게 되거나, 적어도 됨됨이가 부족한 사람으로 단번에 낙인 찍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에 '욕하는 아이, 어쩌면 좋아(욕 좀 제대로 하고 삽시다)'라는 글을 통해 아이들의 욕설은 하나의 통과의례이며, 잠시의 문화이기에 지나치게 통제하거나 혀를 끌끌 찰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편 바 있다. 이 생각에는 아직 큰 변화가 없다. 나는 여전히 10대가 그들만의 욕을 통해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이, 조선 시대의 10대에도 있어 왔던 일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욕설을 사용하는 일 그 자체가 아니라, 최근 십여 년 사이에 변화해온 '욕설 용어'의 특성은 좀 주의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남자 아이들은 왜 "-년"이라고 욕할까?


"야이 씨발년아- 니기미 빨통이나 빨아라."


한 남자 아이가 교실에서 다른 남자 아이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요즘 교육 현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일상의 소리다. 예시로 든 대사는 실제로 내가 최근 공교육의 현장에서 접한 대사다. 대부분의 어른은 저렇게 심한 욕을 하다니! 하며 우선 욕 그 자체에 주목하느라, 그 안에 담겨 있는 묘한 이질성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10대 욕설 찬성론자(?)이기에 욕설 그 자체에는 거부반응이 없어서 보다 손쉽게 그 내용성에 주목할 수 있었다. 


어째서... 남자 아이가 남자 아이를 향해 '-년'이라고 욕을 할까?


10대들 사이에서 욕설은 꼭 이런 대치 상황에서만 쓰여지는 것이 아니다. 아주 일상적으로, 심지어 아침 인사로도 '씨발년'이 사용된다



나의 의문은 그것이었다. 개인의 언어 특성이라고 여기기에 나는 너무나 숱하게 동일한 상황을 교사로서 목격하며 살아 왔다. 심지어 10년 전에도, 그리고 내 학창시절에도 희미하게 겪었던 일이다. 한번 주목하게 되니 곧 거리에서 들리는 남성 청소년들의 욕설도 모두 씨발'놈'이 아닌 씨발'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기현상을 '욕설의 여성화'라고 일단 부르고자 한다. 과거의 대표적인 욕설은 분명 '개새끼'였다. 이 욕이 가리키는 공격의 대상은 알다시피 '아버지'다. 아버지를 욕보임으로써 그 자식을 욕보이고자 하는 '전통적(?)인' 욕설이다. 하지만 어느 세대인가부터 '개새끼'는 욕설로서 인기를 상실한다. 


이후에 등장한 욕설은 '씨발년', '개년', '씹창년', '좇같은년', '니기미(니 엄마랑 섹스할)', '엄창(엄마창녀)', '개걸레(문란한 여성)', '빨통(여성의 가슴)' 등등 사실 새로 만들어지는 욕설은 거의 대다수가 '어머니'와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남자 아이들은 이 여성 대상의 욕설을 동성간에, 즉 남성들끼리 주고 받는다. 남성인 상대를 비난할 때도 상대를 여성화시켜 비난할 경우 효과가 더욱 극대화된다고 여기고 있다. 즉, 여성으로서 비하하는 것이 더욱 심한 멸시라는 것을 잠재의식화하는 것이다.


10대 남성은 남성을 비하할 때도 여성비하적 욕설을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여성을 또래 집단 속에서 보다 더 낮은 차원으로 떨어뜨린다. 이러한 현상은 10대 내의 '학력 경쟁'에서 사실상 여성이 우위를 점하게 된 10여 년전부터 차츰차츰 진행되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10대 여자 아이들도 다양한 성차별을 겪고 있지만, 10대 남자 아이들은 여성이 우위에 있다고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욕설이 기성세대를 향한 상대적 약자의 외침이라고 앞서 정의한 바 있다. 그 의미맥락에 따르면 10대 남성은 자신들을 10대 여성에 비해 상대적 약자라고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판단은 협소한 또래 집단 내에서는 일견 타당한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선을 지닌 10대 남성들은 곧 여성이 상대적 약자인 기성 세대 속으로 진출하게 된다. 심각한 문제가 거기서 싹튼다. 운동장이 달라졌는데, 예전처럼 공을 차게 되는 것이다. 갓 20대가 된 남성들은 기성 사회 속에서는 여성이 학교에서처럼 우위에 있지 않은 데도 우위에 있다고 여전히 믿으며, 욕설은 버렸지만, 그 욕설에 담긴 여성멸시의 의식은 버리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수년 전에 내가 6학년 담임을 맡고 있을 때, 남자 아이들끼리 서로 "씨발년"이라고 욕하는 걸 듣고, "욕은 할 수 있는데 왜 남자를 '년'이라고 욕해? '놈'이라고 욕해야지?" 라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원래 욕을 자주 쓰지는 않는 아이들이기도 했지만 다행히 나의 지적 이후에 "-년"을 쓰는 욕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욕설을 아주 못쓰게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 안에 담긴 어긋난 성의식의 방향성은 교사나 부모로서 점검해줄 필요가 있다.


* 과거에는 아이들에게 욕설에 담긴 의미를 알려주면 아이들이 쓰지 않을 거라고 낭만적으로 여겼지만... 사실, 요즘 시대에는 그 의미를 알려주면 오히려 더 유용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실효성 없는 고전적 방법보다는 논리적 모순을 스스로 생각해보게 하는 쪽이 차라리 더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 10대 여성이 겪고 있는 다양한 성차별을 소개한 기사 

"우리는 매일 사건을 겪고 있다."



미투 운동과 성의식 교육


미투 운동은 단순히 개인이 피해 사례를 고발하고, 나쁜 놈들을 걸러내는 차원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만연한  성폭력 악습을 근절하기 위한 고발적 변혁 운동이다. 


혹자는 미투 운동을 협소한 진영 정치의 유불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하지만, 미투 운동은 보다 큰 억압적 세계관과의 거대한 투쟁이다



어떤 남성들은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98% 내외의 성폭력은 '남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성폭력은 주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권력 위계 차이에서 발생하고, 남성 우위의 문화(이른바 가부장문화)는 필연적으로 여성에 대한 멸시의 시선, 즉 미소지니(misogyny / 주로, '여성혐오'로 번역)를 부른다. 


남성을 우위에 두는 문화는 남성에게 문명인에 걸맞는 성욕 조절을 요구하기 보다는, 권력을 지닌 남성의 성욕을 자극하지 않도록 여성에게 주의를 요구한다. 야한 옷을 입지 말라거나, 밤 늦게 다니지 말라거나, 말을 주의 하라거나, 나쁜 남자를 잘 감별해내라는 식이다. 이러한 요구는 모두 '미소지니(여성멸시)'에 바탕을 둔다. 즉, 남성이 기본이고, 여성은 그보다 열등하니 여성이 남성에게 맞추는 것이 알맞다는 것이다. 성문제에 한정된 것 같은 이 권력 구도(주의 시키는 자와 주의하는 자)는 사실 현생 인류의 세계관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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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미투 운동을 협소한 진영 정치의 유불리에 따라 해석하려고 하지만, 

미투 운동은 보다 큰 억압적 세계관과의 거대한 투쟁이다



근본적으로 인류의 세계관에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이 '미소지니'의 시선을 성찰하지 않는 한 남성 인류는 앞으로도 꾸준히 98%의 성폭력 주범이 되고 말 것이다. '욕설의 여성화'는 10대 남자 아이들(그리고 상당한 수의 여자 아이들도) 내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는 교묘한 미소지니다. 어떤 조치가 이 현상을 막을 수 있을지는 나로서도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선 우리 어른들이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미래는 결국, 우리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좀 더 고민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떠올린 의문을 아이들에게 가볍게 던져주는 것만으로도 미래는 전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8. 2. 25.



날짜

2018. 2. 2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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