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 시론(試論)

- 금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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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변증법적 문제해결력을 키워라(완)




6. 변증법적 문제해결력을 키워라(완)



변증법적 논리 혹은 사고방식이 자신의 진가를 최고조로 발휘하는 측면은 그 현실적 '문제해결력'이다. 변증법이 다른 논리나 사고방식에 비해 뛰어난 점은 변증론은 현실을 자신의 논리틀에 끼워맞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굳이 자신의 논리틀에 억지로 현실을 끼워맞출 필요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다 포용할 수 있을 만큼 크고 넉넉하고 세련되면서 섬세한 논리틀이기 때문이다. 

 

2차원적인 흑백논리이든 3차원적 형식논리이든 이들 논리틀은 3차원 세상과 부합되지 않는다. 이런 논리들은 부합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꿰어맞추려 하다 보니, 자기 멋대로 현실을 재단한다. 2차원 논리에서 현실은 대립하는 두 개의 범주로만 구분된다. 중간은 없거나 과도기로만 인정된다. 이에 반해 X, Y, Z 의 세 축을 기준으로 하는 3차원 논리에서는 3차원의 입체적 구성으로서의 현실은 어떻게든 반영할 수 있지만, 시간과 운동과 변화라는 네 번째 축이 고려되어야 하는 순간, 혼란 상태에 빠지고 만다.

 

반면에 기본적으로 4차원적 관점에서 3차원 현실을 조망하는 변증법은 3차원 현실을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아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넉넉하고 유연하며 뛰어나다. 따라서 변증법적 사고방식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현실을 보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전개될 수 있을지 그 방안을 찾아낼 수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할 바를 다하고 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사람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명백한 한계도 있다는 걸 전제로 한 표현이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동양사상의 지혜이지만, 요새 의미로 하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운명론간의 균형을 절묘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할 바, 혹은 할 수 있는 바를 다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예를 들어 적어도 100세까지 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소위 말하는 장수의 비결에 해당하는 이런저런 정보들을 수집하여 술, 담배 등 일반적으로 몸에 나쁘다고 인식되는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고, 몸에 좋다는 온갖 음식과 보약을 먹고, 몸을 젊은 상태로 유지시키주는 온갖 운동을 다했다. 그런데도 거의 돌연사라 할 수 있는 심장마비가 와서 그만 80대에 죽고 말았다. 그럼 이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진인사대천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이 분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이 분의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진인사대천명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게 맞는 것일까?

 

사실 고인을 보내고 아직 이 세상에 남은 사람들이 고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는 보통 두 가지 중 하나이다. 하나는 역시 운명의 힘이 더 세다고 보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고인의 진인사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진인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보는 태도이다. 예를 들어 아들은 돌아가신 아버님이 너무 장수하고픈 욕심에 집착하셔서 오히려 스트레스 상황에 빠졌고, 이런 스트레스가 예상보다 빠른 고인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운명론에 쉽게 빠지는 첫 번째 태도보다는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문제가 재발되지 않게 하려는 두 번째 태도가 그나마 더 건설적인 태도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첫 번째 태도도 두 번째 태도도 변증법적 사고방식으로 이 문제를 보는 태도는 아니다. 이 문제를 변증법적 시각으로 보는 건, 진인사에 부족함이 있는 것 자체가 운명이었다고 보거나, 일찍 죽게 된 운명 자체가 운명이 아니라 고인의 자유의지라고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변증법적 관점에서는 진인사와 대천명, 자유의지와 운명이 동전의 양면으로 통합된다. 혹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모여 운명을 만들고, 운명이 다시 인간의 자유의지의 토대가 된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적 사고방식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운명론에 반대되는 사고방식이다. 운명론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을 주어지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사고방식이다. 운명론자는 상황에 반응할 뿐 대응하지 않는다. 반면에 변증론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자유의지로 고를 수 있는 몇 가지 선택지들이 있다는 걸 안다. 이 때 그가 의식하면서 최상의 선택지를 고르는 것은 반응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에 대응하는(선택하는) 행동이다. 진인사에서 사람이 행할 바를 행하는 것 또한 반응이 아닌 대응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상황에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진인사를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위의 돌아가신 노인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1에서 100까지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진인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평면적이고 병렬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는 데 신경을 쓰다 보면 물질 존재인 인간이 일정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오히려 장수에 핵심 변수가 되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거나 경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진인사를 하더라도 효과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미국 균형잡기의 달인 빌 댄이 오로지 균형만을 이용해 쌓아올린 불규칙한 돌들

그러려면 문제 해결의 핵심고리를 파악해야 한다. 핵심고리를 찾는 것은 에너지와 노력은 최소한으로 쓰면서 그 효과는 최대한을 거둘 방안을 찾는 것이다. 따라서 상황의 핵심고리를 파악하는 것은 불규칙한 모양의 입체 덩어리의 균형점을 찾는 것과 유사하다. 핵심고리는 유기적인 상황 혹은 유기체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적인 지점이고, 균형점은 입체 덩어리가 흔들리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한 점이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은 문제해결의 핵심고리를 파악하는 것과 문제상황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상황의 본질은 꽤 장기간 동안 바뀌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산업자본주의가 정착된 이후로 우리나라 경제의 기본 모순이자 본질은 자본-노동의 대립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문제 해결의 핵심고리가 되었던 경우는 산업화의 초기, 자영 농공인이었던 봉건사회의 토대 계층이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 계층인 노동자로 전환되는 것에 저항하여 기계파괴운동 등이 일어나던 시기,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아직 지배적인 사회 구조로 자리잡기 전의 상황에서다.

 

이 시기에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사회 변혁을 불러올 수 있는 '약한 고리'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자영 농공인의 계급 전환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자본주의적인 기계제 대량생산에 대한 거부감이 비단 신생 노동계급만으로 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광산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룬 에밀졸라의 소설 '제르미날'이나 '찰리 채플린 주연의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잘 드러난다. 자리잡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기계제 대량생산의 자본주의적 노동방식은 그 당시 사람들 누가 보기에도 끔찍한 괴물이었다. 실제로도 이 시기는 1848년 혁명 등 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의 저항이 폭발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반자본주의적 사상들(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등)이 태동하고 확산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선진국에서 자본주의가 해당 사회의 지배적인 구조로 자리잡고 나면 사회의 기본 모순이나 문제의 본질은 오히려 더 분명해지지만, 문제 해결의 핵심고리, 혹은 약한 고리는 바뀐다. 자본주의가 워낙 지배적인 힘을 발휘하다 보니, 반(反) 자본주의적 모든 시도가 실제로는 체제 내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노동운동도 더 이상 체제 변혁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고, 그야말로 노동조건의 개선이라는 권익운동의 하나가 되고 마는 것이다. 역으로 후발 자본주의 혹은 아직 자본주의가 자리잡지 못한 후진국들에서의 반체제 혁명이 선진국들에서보다 더 성공적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러시아 혁명 당시의 러시아를 비롯하여 이들 나라에서는 아직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체제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반체제적이고 반자본주의적 운동이 문제 해결의 핵심고리, 혹은 약한 고리가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어떤 상황의 핵심 고리를 파악하는 능력은 이념과는 상관이 없다. 이념이나 입장, 선입견은 오히려 이 능력을 방해한다. 이념이란 색안경 때문에 문제 상황이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반면에 거리두기를 하여 전체를 조망하고, 현실을 위선이나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또한 그 현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변증법적 사고방식은 다른 어떤 사고방식이나 논리보다 문제 해결의 핵심고리, 즉 가장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고리이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고리(즉 약한 고리)를 더 잘 찾아낼 수 있다. 어떻게? 변증법적 사고방식의 직관력으로.  

 

직관은 말이나 수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석으로 돌담을 쌓는 사람이 이번 자리에 놓기에 적당한 돌덩이가 수십 수백개의 돌 중에서 어느 돌인지 한 번에 알아보는 능력과 같은 것이고, 석공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아버지가 돌덩이를 보고 그 돌덩이가 어떤 조각상을 잉태하고 있는지를 한 눈에 파악하는 능력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소위 정치 9단이라고 일컫어지는 정치가들이 '신의 한 수'(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해체', 김대중 대통령의 '디제이피연합'과 '벤처기업 육성' 등)를 놓을 때 발휘하는 능력과 비슷한 것이고, 꿈의 계시를 통해 멘델레프가 '원소주기율표'를 완성하고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의 발견할 때 느꼈던 확신과 유사한 것이다. 

 

사실 직관에 따른 선택은 언제나 '완벽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직관에 따른 선택은 모든 이견을 압도한다. 다른 의견이나 입장들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완벽하기 때문이다. 물론 직관에 따른 견해 혹은 선택이라고 해서 부차적이거나 사소한 오류나 미비점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부차적인 미비점이 아니다. 중요한 건 직관에 따른 선택이 다른 것들에 비해 질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변증법적 사고방식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직관에 따른 선택들이 실제로 시행되고 수용될수록 세상은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고 성장할 것이다. 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우리 인간의 지성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변증법적 사고방식인 노장사상에서는 이런 직관에 따른 행위를 술(術, 테크닉)과 구분하여 도(道)라고 명명했다. 아마 장자에서 나온 다음의 인용문을 읽으면, 내가 말하는 '변증법적 직관'이 어떤 것인지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인용문은 신영복 선생님의 『나의 고전문학 독법, 강의』'장자'편(323~324쪽)에 있는 선생님의 번역과 해설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 - - 안의 글은 나의 보완설명

 


포정[백정을 말함]이 칼을 놓고 후일 양나라 혜왕이 된 문해군에게 - 대답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天理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넣고 빈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포정이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훌륭한 포정은 1년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베기 때문이며, 보통의 포정은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에 칼이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19년 동안이나 사용하였고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릅니다만 칼날이 날카롭기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저 뼈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데다 넗으니 넓고 넓어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19년이나 사용했지만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뼈와 심줄이 엉긴 곳에 이르러서는 저도 조심하여 눈길을 멈추고 천천히 움직이며 칼 놀리는 것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러다가 쩍 갈라지면서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듯 고기가 와르르 헤집니다."

 

문해군은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의 도를 터득했구나" 하고 감탄합니다.




보다시피 포정의 정육 기술은 단순히 뛰어난 기술이라 표현하는 것으로는 모자라는, 그야말로 완벽의 경지이다. 소의 살을 바른다는, 전문적이면서 협소한 한 분야의 행위로 국한되지만 원리는 똑같다. 소의 일반적인 부위들에서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건 순리에 따라 저절로 움직이도록 놔둔다는 뜻, 즉 일종의 무위이다. 뼈에는 틈이 있고 칼에는 두께가 없으니, 그 틈이 넓고 넓어 별달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칼 잡은 손이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되는 것이다. 반면에 뼈와 심줄이 엉긴 곳에서는 고도로 집중하여 가장 섬세한 칼 놀림을 해야 한다. 그러면 고기 전체가 뼈에서 분해되어 와르르 쏟아진다. 비유하면 뼈와 심줄이 엉긴 곳이 문제 해결의 핵심 고리인 것이다. 포정의 실력이 십분 발휘되어야 하는 지점이 이 부위이다.



반면에 우리는 흔히 거꾸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대천명에 대한 이견은 놔두고 진인사만 보면,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일종의 술術을 발휘하는 것이 진인사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포정의 예에서 보듯이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크게 애쓰지 않더라도 그냥 되기로 되어 있는 부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짜로 신경 쓰고 진인사해야 할 부분은 뼈와 심줄이 엉긴 곳을 찾아내고 이 부위를 최대한 집중해서 완벽하게 분리해내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적인 문제 상황에서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대천명을 위한 진인사가 아니다. 진짜 진인사는 문제 상황을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해줄 핵심 고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대천명을 할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술에만 국한되는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으로는 문제 상황의 본질은 볼 수 있지만,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게 해줄 핵심고리는 파악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으로는 상황이라는 살아 있는 유기체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부분의 개선이 다른 부분에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예상하지 못한다. 또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기본적으로 동태적이 아닌 정태적으로만 상황을 파악하기 때문에 유기체의 끊임없는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다. 따라서 어제까지만 해도 부수적인 현상이라 하여 무시했던 것이 오늘 지배적인 현상으로 바뀌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다. 나아가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현상을 항상 어떤 형식 틀의 요소로 파악하기 때문에 자신이 상정한 형식틀에 부합하지 않는 상황의 경우,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도덕론자가 욕하는 아이를 보면 그 도덕론자는 그 아이를 그 자리에서 '나쁜 아이'라는 형식 틀에 부합되는 아이로 분류하고 만다. 설사 그 아이가 다른 때는 별로 욕을 하지 않는 아이라 하더라도 그 도덕론자가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가능성은 이미 줄어들었다. 

 

이에 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3차원의 유기체적 존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적합한 분석도구인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가지면 문제 해결의 핵심 고리를 파악하는 능력도 커진다. 여기서 유기체적 존재란 어떤 개별 문제상황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 나아가 국가나 사회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으며, 혹은 생명체나 생물종, 자연이나 지구일 수도 있다. 사실 개인이나 집단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자연 등 세상의 모든 존재의 존재양태는 유기체적(생물적)이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가 형식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유기체적으로(혹은 변증법적으로나 4차원적으로) 존재한다. 형식논리적 존재 양태는 우리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어떤 양의 칼로리를 가진 식품을 우리가 섭취한다고 해보자. 우리의 관념은 이 칼로리를 우리가 운동 등을 통해 소모시키지 않으면 남은 열량은 모두 지방 등으로 우리 몸에 비축된다고 여긴다. 단순한 더하기 빼기 계산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열량의 식품을 섭취하고서도 살이 찌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으며, 심지어 같은 사람이 먹어도 남은 열량이 살로 가는 날이 있고, 아닌 날이 있다. 또 우리의 관념은 필요 영양소는 반드시 섭취해야 영양 실조에 걸리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균형 잡힌 영양소 섭취를 하지 않아도 왠만해서는 영양 실조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인간의 몸이다. 보다시피 우리 인간의 현실은 기계처럼 형식논리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형식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유기체적으로 진행된다. 

 

반대로 문제상황을 유기체적으로 인식하면 다음과 같은 식의 문제해결법이 떠오른다.


옛날에 깊고 깊은 산골에 사는 한 촌부가 송아지를 잃어버렸다. 송아지라서 밖에 풀어놓았는데, 그만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촌부는 송아지를 찾아 산골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산골 어떤 외딴 집에서 송아지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집의 주인은 그 송아지가 자신의 소가 낳은 새끼라고 우겼다. 게다가 그 며칠 사이에 자기 집 소라는 표식까지 해놓았다. 워낙 깊은 산골이다보니 증인이 되어줄 이웃도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송아지를 끌고 지역 사또에게 가서 올바른 판결을 내려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사또는 송아지의 주인에게 어미소를 데려오게 하고, 외딴 집 주인에게도 그 집의 어미소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러고는 어미소 두 마리를 세워놓고 송아지더러 자기 어미를 찾아가게 했다. 당연히 송아지는 진짜 자기 어미소를 찾아갔고, 이렇게 해서 송아지의 진짜 주인이 송아지를 되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사또의 문제해결법이 왜 상황에 대한 유기체적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는지는 이해가 갈 것이다. 송아지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우리의 시선은 주로 송아지와 자신이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두 사람에게만 맞춰진다. 하지만 사또는 송아지를 둘러싼 더 넓은 환경으로 시선을 넓혀 문제를 해결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이야기는 정비석이 지은 '김삿갓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현실이 개개 상황으로 분리된 것이 아닌, 유기체적으로 상호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했기에 나올 수 있었던 해결책이라 할 것이다.

 

저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과 유사한 이런 문제상황만이 아니라 인간이 처해 있는 다른 모든 현실 또한 마찬가지다. 사실 이 우주라는 환경 전체가 유기체적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유기체적이라면, 우리는 형식논리를 가지고서는 우리 자신도, 우리를 둘러싼 환경도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어떤 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것이 타당한지도 알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지만, 이왕 유기체적이라는 생물학적 용어가 나왔으니, 여전히 난해한 철학 용어인 변증법은 잠시 놔두고, 감각적이고 현실적이어서 좀더 실감나는 유기체적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좀더 추론을 이어가보자.)

 

만일 인간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의 현실 전체가 유기체적이라면,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도출된다. 그건 전체의 일부인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하나'라는 진리이다. 유기체에서 팔과 다리는 각각 다른 형상을 하고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 몸이듯이 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라면, 또 내가 팔의 주인이기도 하고 다리의 주인이기도 하면, 나는 내 팔과 내 다리가 협력해서 함께 잘 살기를 원하지, 내 팔과 내 다리가 서로 싸워 상대를 훼손시키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유기체적임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인식은 저절로 따라나오게 된다.

 

따라서 유기체적 인식, 혹은 변증법적 인식에서는 평화와 상생과 합일이 갈등과 분열과 지배보다 더 우선적인 가치를 갖는다. 말하자면 사랑이 미움보다 우선이고 인식의 기준점이다.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개별 유기체에게 사랑은 생명(력)을 가져다주지만, 미움은 생명의 쇠락을 가져다주듯이, 사회나 국가 같은 유기체도 평화와 상생과 합일의 정신, 즉 사랑은 그 유기체를 성장시키고 번성시키지만, 갈등과 분열과 지배의 정신, 즉 미움은 그 유기체를 쇠락시키고 파멸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 순간에는 개별 개인이나 개별 집단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다른 개인이나 다른 집단에게는 해를 끼치는 해결책, 그리하여 유기체 전체에는 해가 되는 방식의 문제 해결은 변증법적 인식에서 나온 문제 해결법과는 다른 것이다. 오히려 변증법적 인식에서 나오는 문제 해결법에는 자기 이익이 아니라 자기 희생(?)이 내포되어 있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미국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그리고 냉전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책, 개별성을 존중하는 유럽연합(EU)의 결성 같은 사건들이 인류사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이런 사건들이 갈등과 전쟁으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에서 전혀 다른 비전을 제시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링컨이나 고르바초프나 EU 결성 주도자들의 이해관계가 주요하게 작용해서 이런 역사적 결단들이 이루어졌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사건들에서 인간이 당장의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인류 전체를 위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본다. 그리고 감탄하고 감동한다.

 

변증법적 사고방식, 유기체적 인식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변증법적으로 사고할수록, 그리고 변증법적인 문제 해결 방식으로 인간 사회를 운용할수록, 인간 사회는 더 평화롭고 더 행복해지고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한 마디로 인류는 마침내 구원받고 질적으로 한 단계 비약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과 감정들을 내려놓고, 환경과 사회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고, 자기 자신의 탐진치를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좀더 솔직해지고, 타인에 대해 좀더 너그러워지고, 생명과 삶과 세상을 좀더 즐길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항상 파멸적인 선택과 발전적인 선택의 기로에 서 왔다. 어쩌면 파멸적인 선택들이 인류의 자멸을 불러오지 않은 건 다만 그 에너지가 인류 전체를 멸종시킬 만큼 강하지 않아서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간의 파멸적인 선택들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의 여러 문명들을 파괴해온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현대의 인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아갈 수도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한반도에만 해도 남북한 전체를 폐허로 만들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기와 전쟁무기들이 있다. 이제 문제는 누가 무력의 우위를 점하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북한 어느 쪽도 함부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대립과 갈등의 기운이 화해와 협력의 기운으로 바뀌지 않는 한 파멸의 위험성은 상존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때일수록 평화와 상생과 협력의 기운이 중요하다. 물론 힘과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이런 기운으로 나라와 민족 전체를 이끌어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면, 먼저 자각하는 '일반인'들이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파괴적인 선택이 아닌 건설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좋다. 이 때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가지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2015. 5. 5.  

 


결(結) | 이로써 변증법 시론 시리즈를 마친다. 아직 철저한 변증론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쓴 글인지라 그야말로 시론의 시론에 불과한 이 시리즈를, 그야말로 어설프게 시작해서 어설프게 끝내는 이 시리즈를 끝까지 다 읽어준 독자가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어설픈 글을 시작하고 풀어가는 과정이 글쓴이인 내가 생각을 정리하는 데 그래도 나름 도움이 되었듯이, 독자분들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좀이라도 긍정적인 자극이 되었기를 바라는 어줍잖은 기대도 품어본다.

 

Have a nice day!!!



날짜

2015. 5. 5.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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