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제논에서 시작된 변증법은 위 그림의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의 철학 사상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변증법 시론(試論)

- 금안당



 LIST 



1.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가지면 세상이 달리 보일 수 있다.

 


변증법적 사고방식에 대한 글을 쓰기에는 아직 내가 준비가 덜 되었다. 이 주제를 염두에 두기 시작한 지는 대학 졸업 이후부터이니 30년 가까이 되었지만, 본격적인 연구를 하지는 않았으니 학문적이거나 충분히 논리적일 자신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일종의 시론(試論)이다. 그것도 시험적인 시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무모한 시도를 하는 것은 이 과제를 더 이상 미뤄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사실 나는 30여년 전에 철저한 변증론자가 되는 것을 내 일생의 과제로 삼기로 결심한 적이 있다. 이 결심이 이후 삶의 흐름 속에서 느슨해지고 흐릿해지긴 했지만, 이따금 돌이켜볼 때마다 그 결심은 여전히 타당하게 비쳤기에, 그후로는 마치 미뤄둔 숙제를 계속 지니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 갈수록 나이가 들어가니, 이 오래된 숙제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마치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금연' 결심을 알려서 쉽게 작심삼일로 만들지 않으려는 전술을 쓰듯, 나 또한 어차피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면 자신을 '강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렇게 시론의 시론이라도 시작하고 보는 게 우선일 것 같아, 그것도 공개적으로 시작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아 일단 던져놓고 본다. 어쩌면 나로서는 얼마 안가 후회할지도 모를 모험의 길에 들어선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 이게 변증법적 사고란 거구나'라고 처음으로 느낀 것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영어본을 읽을 때였다. 함께 책을 읽던 동료 한 명과 글의 해석을 놓고 대판 논쟁이 붙었다. 문제가 된 문장은 한 문단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둘 간의 주장의 차이는 어떻게 보면 미세했다. 그래서인지 세미나를 함께 하던 다른 동료들은 이 논쟁에 가담하지 않고 거의 구경꾼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뭐,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크게 대차 없지 않냐는 태도였다.

 

하지만 정작 논쟁의 당사자인 우리 두 사람은 이 미세한 차이가 정말 중요한 차이라는 인식을 했던 것 같다. 상대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고, 나 또한 어영부영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 다음 며칠 동안 그 문제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다. 문제가 된 그 문단 범위를 넘어서 글의 전체 문맥을 염두에 두면 내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건 이미 확인을 한 터였다. 하지만 그 '새로운'(?) 해석을 기존의 내 사고방식이 받아들이지 못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던 것이다.

 

그건 마치 내 머리가 A=B라고 이해를 했는데, A=-B이기도 하다(A는 B가 아니기도 하다)는 명제도 동시에 성립한다는 걸 이해해야 하는 상황과 흡사했다. 내 기존 사고틀은 당연히 이 상황을 모순으로 인식했는데, 문제는 자본론 그 페이지의 앞 문단에서는 A=B가 맞고 다른 문단에서는 A=-B라고 해석해야(당시 내 사고방식에서는) 뜻이 통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치 맹인이 갑자기 눈을 뜬 것처럼 선명하게 이 모순이 이해가 되었다. 두통도 없어졌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뭔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지식이 더 늘어나거나 새로운 지식을 얻은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얻은 새로운 '이해'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고 했을 때, 체계적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여전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새로이 얻은 것이 새로운 지식 같은 내용물이 아니라, 그 내용물을 담는 그릇 혹은 사고틀이란 걸 알았다. 두통은 예전의 사고틀이 깨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통증이었고, 머리가 갑자기 선명하고 맑아진 것은 이전 사고틀에서는 충돌하던 두 명제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사고틀, 소위 변증법적 사고구조가 새로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비록 새로운 사고틀이 내 머릿속에 들어서긴 했지만, 소장하고 있던 많은 기존 데이터들은 여전히 구 사고틀 속에서 위치하고 있었고, 내가 의식하지 않으면 나의 '지식'들은 그 틀 내에서 자가 발전하면서 나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쳤다. 반면에 의식을 하면 기존 데이터 중 일부는 새로운 사고틀로 옮겨가 그곳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혹은 구 사고틀 안에서는 위치를 잡기가 힘들어 어정쩡하게 놓여 있던 데이터들을 신 사고틀로 옮겨놓으니 근사하게 아귀가 맞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여하튼 내 경우에는 신 사고틀로 세상을 재해석하는 과정이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고, 언제 끝날 수 있을지, 과연 끝나기는 할지 기약이 없다.  

 

이 글을 읽는 다른 사람들은 잘 실감이 안나는 주제인, 내 개인 사고방식의 전환 과정에 대해 이렇게 구구절절이 이야기를 하는 건, 위에서 말했듯이 나 자신이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아직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변증법적 사고방식이란 게 어떤 건지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욕심이 앞서서이다. 내가 이런 욕심을 갖는 건 더 많은 사람들이 변증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수록, 인간 자신과 우리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게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세상을 구원할 논리는 흑백논리라는 2차원적 사고방식도 아니고, 형이상학이라는 3차원적 사고방식도 아닌, 변증법이라는 4차원적 사고방식이란 게 내 판단이다.

 

물론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 사상가들이 변증법에 대해서 논해왔다. 학문적으로 따지면, 철학이나 사상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나는 그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변증법은 공부나 연구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게 내 생각이다. 오히려 변증법은 지식이나 컨텐츠로 설명하면 사람들이 오해하기 쉽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내용물이 아니라 내용물을 담는 구조 혹은 그릇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 인간이 사는 3차원 세상에 4차원 존재가 나타나더라도 그 4차원 존재를 3차원인 인간의 말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변증법적 사고방식 또한 3차원 존재가 사용하는 언어수단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점에서 학자와 나, 어느 쪽도 기득권을 갖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3차원 존재인 인간이 4차원에 대해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므로(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4차원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살짝 보여주긴 하지만, 3차원 세계에서 아인슈타인이 말한 휘어진 시공간을 '형상화하기는 불가능하듯이) 차라리 2차원 세계를 예로 들어보자.

 

선이 모여 이루어진 2차원 평면의 세계 중 일부에 갑자기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인 부분이 생겼다고 해보자. 우연히 이 꼬인 부분을 한 바퀴 돌게 된 2차원 존재(납작한 개미 정도로 상상하면 좋을 듯)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즉 평면의 '앞'과 '뒤'라는 일종의 '입체'를 평면적으로 경험한다. 게다가 분명히 계속 앞으로 나갔는데 제자리에 다시 돌아오는 신비한 경험도 평면적으로 하게 된다. 3차원 세계에서는 이 상황이 전혀 미스터리가 아니지만 2차원 존재에게는 미스터리한 경험이 된다.

 

3차원 세계에 4차원 세계가 침범할 때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 3차원 세계에서는 일직선으로 존재하는 시간만이 인정된다. 하지만 3차원 세계에서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4차원 세계에서는 시간도 '동시'에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4차원에서는 시간만이 아니라 3차원식 공간 배열도 허물어질 것이다.) 비유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머릿속이다. 우리 머릿속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 마음이 스스로 한계짓는 것을 빼면 공간적 한계도 없다.  이보다 더 강렬한 4차원적 '느낌'은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경험이나 잠깐 사이였던 것 같은데 실제로는 훨씬 더 긴 시간이 지나는 경험 등을 할 때 느끼곤 한다. 혹은 '웜홀'이라는 용어(이게 천체물리학 용어인지 알 수 없지만)가 표현하고 싶어하는 형상도 3차원 세계에 밀고 들어온 4차원 세계일 것이다.


4차원 도형


사실 인간의 머리는 4차원적으로 세상을 인식할 수도 있지만, 2차원, 3차원적으로도 인식할 수 있다. 대표적인 2차원적 인식이 흑백논리이다. 3차원 세계인데 어떻게 2차원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3차원 세계를 표면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2차원적 인식방법이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은 사람은 손의 감촉으로 인식한 세상(말하자면 표면으로만 인식한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데, 과학자들이 확인한 바로는 이런 사람들은 공간적으로가 아니라 평면적으로만, 다시 말해 2차원적으로 사물을 파악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들이 파악하는 사물은 가로 세로 높이(즉 부피)가 있는 공간적 존재가 아니라 거리와 방향만 있는 평면적 존재들의 합이다.

 

이렇게 해도 사물의 형태를 파악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예를 들어 이들도 나무 의자의 바닥면을 사람의 엉덩이 모양에 맞추어 제작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이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사물의 내용물이다. 겉표면 안의 내용물, 혹은 형태를 채우고 있는 내용물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떤 사물의 겉표면은 왜 울퉁불퉁하고, 어떤 사물은 매끈한지, 어떤 사물은 보슬보슬한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물의 본질 혹은 내용물을 잘 아는 사람 입장에서는 겉표면이 각각 다른 건 내용물의 차이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더불어 그 사물의 본질을 모르면 그 사물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갈지도 예측할 수 없다.

 

여담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시력이 없었던 사람이 수술로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과정이 담긴 다큐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몇 개월 후 의사에게 부탁하여 다시 시력을 없애는 수술을 했고, 그후로는 장님으로서 남은 생을 사는 쪽을 택했다. 그 사람이 20년 넘게 장님으로 살아오면서 형성된 사고틀로는 3차원의 세상을 도저히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반면에 3차원 세계에 사는 사람들 상당수는 공간적으로, 3차원적으로 세상을 본다. 이 경우 사물을 표면만이 아니라 내용물이 담긴 공간체로서 인식한다. 3차원 사고방식의 대표적인 예가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인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논리적으로' 올바른 결론이 도출되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삼단논법(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진시황은 사람이다'-'고로 진시황도 언젠가 죽는다')이 당연히 옳다고 여기지만, 현실에의 적용은 결코 쉽지 않다. 우선 진시황도 자신이 사람이지만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비논리적인 가정을 했다.

 

게다가 현실은 복잡해서 수십 수백개의 원인-결과 고리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수 있다. 이 원인-결과 고리들을 엉뚱하게 연결시켜 삼단논법이라는 형식 틀로 포장하는 것이 궤변이다. 그러니 3차원 현실을 형이상학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 정도 되어야 3차원 사고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외 많은 사람들은 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거나 자칫 이차원적 흑백논리라는 함정에 자주 빠지고 만다.

 

서양 논리학의 창시자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의 발달을 포함하여 근현대 합리주의의 보편화는 이런 3차원적 사고가 발달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흑백논리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종교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암흑기의 중세 문화에서 이성을 중시하는 근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 문화로 옮겨가는 데 있어, 금기시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3차원 세상에서 2차원적 사고는 야만의 무기이고, 3차원적 사고는 이성의 무기이다.

 

그런데 '이성'이라고 표현되는 3차원적 합리적 사고는 그 성숙 과정에서 두 가지 측면에서 한계가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나는 사물 간의 질적 차이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태적 상태에서 사물의 변화를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둘 다 3차원 논리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산소 원자와 질소 원자의 차이를 원자량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고, 가속도 등까지 고려하여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원소들이 모여 왜 어떤 경우에는 무생물을 만들고 왜 어떤 경우에는 생물체가 만들어지는지는 설명할 수 없고, 움직이는 물체에서 '비약'이 일어날 경우는 아무리 가속도까지 고려해도 이 물체의 다음 번 위치 예측은 불가능하다. 보다시피 3차원 현실인데도 3차원 논리만으로는 그 현실을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아니, 단순히 설명을 충분히 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정작 중요한 핵심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해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4차원적 관점이라면 3차원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실에 대해 본질적 설명이 가능하다. 이는 3차원 관점으로 보면 2차원 현실이 100% 확실하게 이해가 되는 것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 2차원 세계의 일부 평면이 굴곡져 있다고 해보자. 2차원 존재는 설사 그가 인지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이 현상을 굴곡진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평면의 굴곡은 3차원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2차원 존재가 예민하다면 그 골곡진 부분에서 그는 보통의 평평한 부분에서 느끼던 것과는 뭔가 다른 느낌을 느낄 것이고, 3차원 존재인 인간이 4차원 현상을 흘낏 경험했을 때 그렇듯이, 그 또한 안개처럼 몽롱한 느낌과 다음 차원으로 들어가는 황금 열쇠를 열 키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계속해서 2차원적으로 사고하는 한, 그는 2차원 세상에 대해서도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3차원적으로만 사고하는 한, 우리는 3차원 세상에 대해서 필요한 모든 답을 얻을 수 없다. 합리적 이성적 사고에 근거하여 우리 세상을 이해하고 개조하려던 근대 과학(소위 기계적 물리학)도 3차원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한계에 부딪혀 새로운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초끈 이론, 차원 이론, 빅뱅 이론 등 현대과학에 새로운 시야를 제공한 놀라운 이론들이 모두 그러한데, 문제는 우리의 3차원 현실에서는 이런 이론들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이론들은 실제로는 '가설'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과학계에서는 4차원 이상의 관점으로 보아야만 3차원 세계가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는 전제가 아인슈타인 이후로 거의 정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면에 인간 사회를 다루는 인문과학 영역에서는 이 점이 확실하지가 않다.  게다가 각 세력의 입장이라는 주관적 요소가 또 하나의 변수가 되는 사회과학 영역에서는 궤변이나 흑백논리 같은 요소들의 침투로 2차원적 논리나 사고로 퇴행할 위험성에도 항상 노출되어 있다.(테러리즘만이 아니라 극좌, 극우 독재정권의 지배논리들이 모두 그러하다.) 

 

게다가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4차원적 가설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줄 '증거'를 눈에 보이는 물리현상 중에서 찾을 수 있지만,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아무리 옳은 더 차원 높은 이론이라 해도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기는 만만치 않다. 때로는 '역사'가 그 타당성을 입증해주기도 하지만, 역사 또한 인간의 해석이라는 올가미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것이 현실인지라, 만인이 인정하는 '기준자'가 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 주장은 과학 기술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인문 사회 영역에서도 4차원적 사고방식과 세계관이 성장하고 확대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개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손쉽게 해결되고,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불필요한 소모전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타고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면서 더 멋진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건 많은 사람들이 꿈꾸지만 그럼에도 현재로서는 실현되기에 요원한 꿈이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전(前) 자본주의 사회들과 달리 생산력이 엄청나게 높아진 탓에, 이 높아진 생산력을 잘못 사용하면 전세계적으로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자칫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반체제주의자라고 해도 이런 결과를 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지금 당장 어느 쪽이 승리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인류적인 차원에서 유익한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이는 인류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 변증법은 중요한 논리적 자산 혹은 무기가 될 수 있다. 자, 어쨌든 변증법에 관한 첫번째 이야기는 여기까지! (다음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변증법이란 게 뭔지를 다룰 예정임)



2015. 2. 16. 



날짜

2015. 2. 16. 17:24

최근 게시글

최근 댓글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