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두려움을 극복해가는 왕녀의 이야기로 큰 인기를 끌었던 <겨울왕국>
변증법 시론(試論)
- 금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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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신이 가진 두려움을 자각하라
변증법적 인식을 갖는 데 가장 큰 방해물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그 사람의 에너지를 불필요한 곳에 낭비시키고, 마음을 위축시켜 삶의 흐름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게 한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유일한 목적인 '삶의 체험'에서 멀어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살아 있지만, 사는 게 아니게 된다. 닐 도널드 월쉬가 일종의 채널링을 통해 쓴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에서는 두려움과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너희(인간)가 지금까지 내린 이 모든 자유로운 선택 중에서 존재할 수 있는 단 두 가지 생각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즉 사랑이라는 생각이나 두려움이라는 생각에서.
두려움은 움츠러들고 닫아걸고 조이고 달아나고 숨고 독점하고 해치는 에너지다.
사랑은 펼치고 활짝 열고 풀어주고 머무르고 드러내고 나누고 치유하는 에너지다.
두려움은 우리 몸을 옷으로 감싸나, 사랑은 우리가 발가벗고 살 수 있게 해준다. 두려움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틀어쥐고 집착하게 하나, 사랑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게 한다. 두려움은 갑갑함을 지니나, 사랑은 정을 지닌다. 두려움은 움켜잡지만, 사랑은 보내준다. 두려움은 사무치게 하지만, 사랑은 달래준다. 두려움은 공격하지만, 사랑은 치유한다."
보다시피 두려움은 삶의 흐름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감정이다. 그래서 두려움은 우리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두려움은 지금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에서나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생긴다. 두려움이 큰 사람은 과거의 기억 중 두려웠던 순간만을 확대 과장하고, 이것이 미래에 다시 재연될 수 있다는 불안에 떤다.
실연의 상처를 겪은 사람은 실연의 아픔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예 새로운 연인을 만나지 않으려 한다. 등산을 하다가 실족을 하거나 수영을 하다가 익사할 위험에 처했던 사람은 이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아예 등산도 수영도 하지 않으려 한다. 관계에서 배신의 아픔을 겪은 사람은 자신이 잘 아는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족쇄에 묶어놓는 꼴이다. 이런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현재(삶)를 제대로 살 수가 없다. 이 점에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
게댜가 겉보기에 두려움은 대단히 수동적이고 소심한 행동을 야기할 것 같지만, 기실 이 동전의 반면은 대단히 공격적이고 무자비하다. 다른 사람들과 자연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악착같이 자신의 소유를 챙기려는 사람의 심리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다. 사실 남의 생명을 빼앗아서라도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사람의 심리를 두려움이 아니고서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 공격성이 두려움에 떠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눈치를 채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우울증에 걸린 부모가 자신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까지 데리고 동반자살을 하는, 그리 드물지 않은 사건들에서 우리는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힘'이 있을 때 얼마나 공격적일 수 있는지 그 실례를 여실히 본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떤 두려움들을 가지고 있을까? 우선 가장 큰 두려움은 신체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사실 우리 온 몸의 세포는 기력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해 죽음에 저항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신체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과장되고 부풀려진 면이 분명히 있다. 왜냐하면 죽는 당사자는 죽기 직전의 순간에는 생리적인 죽음의 공포로 엄청나게 두려울 수 있지만, 죽음이 바로 눈 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죽음의 공포를 느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평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면, 이는 실재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가상의 두려움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처음부터 갖지 않았던 사람은 상실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익숙한 것이 없어질까 봐 두렵다. 여기에서 집착이 발생한다. 5억 넘는 재산이 남아 있음에도 일가족 동반 자살을 꾀했던 사람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설 정도로(정작 가족들만 죽이고 본인은 죽지 못한 걸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인이 된 자식을 놓아주지 못하는 부모도 이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겪고 있다. 배우자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도 쉽게 갈라서지 못하는 것, 학대받는 사람이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에게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지만, 이렇게까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경우는 그렇게 일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경우들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정도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걸음을 주춤거리게 하고, 우리를 현재에 살 수 없게 만들기는 매일반이다.
또 자아가 손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자화상'이 있다. 이 자화상은 어린 시절에는 부모 등 다른 사람의 생각에서 영향을 받아 무의식 중에 형성되었고, 사춘기 이후에는 미숙한 지성이 이 복잡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름으로 만들어진 방어기제로서 형성되었다. 이처럼 '자화상'은 절대 자기 자신도 아니고 자신의 작품도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자아, 혹은 자화상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다. 이것이 자존심이다.
그리고 이 자아가 손상되면, 자기 존재가 부정당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아를 지키는 데 필사적이다. 심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야말로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걸 용납할 수 없다. 예를 들어 A씨는 자신이 어떤 일에서 대단히 유능하다고 생각하는데, B씨가 그렇지 않다고 A씨를 평가절하하거나 그 업무와 관련된 A씨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면, 자존감이 낮은 상당수의 A씨들은 B씨에게 분노한다. 하지만 A씨 스스로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B씨가 A씨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 일에서 A씨의 능력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B씨에게 화를 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A씨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는 길은 애초의 자기 주장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B씨 의견의 타당성을 충분히 검토 반영하여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자존심이 손상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타인에 대한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도 나타나고, 종교적으로는 교리에 대한 맹신으로도 나타나며, 이념적으로는 '~주의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시키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혹은 사회 문화적 입장의 하나에 자신을 너무 강하게 고정시킨 나머지, 스스로 자신을 족쇄 지우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누구보다 앞장서서 독신주의의 정당성을 설파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마도 그 혹은 그녀는 데이트를 할 기회가 와도 이를 거부하거나, 다른 사람들 눈에 안 띄게 데이트를 하면서 자기 분열적인 상황에 처할 것이다.
하지만 길어봤자 30대 초반까지 형성된 자화상이 곧 '자신'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까지는 설사 이 자화상이 내 삶에 도움을 주었다 해도, 앞으로도 반드시 그러하리란 보장은 또 어디에 있는가? 오히려 새로운 것들을 놓치지 않고 받아들여 내 기존 가치관의 타당성도 끊임없이 재점검하고 재조정하는 게 나 자신을 위해 유익하지 않을까? 그러니 자아의 손상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자신이 끊임없이 변해가는(더 좋게 표현하면 성장해가는) 존재라는 자화상을 가지면, 기존의 자신과 달라지길 요구하는 외부 자극에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고,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또 하나, 사람들이 흔히 갖기 쉬운 두려움은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다. 앞의 자존심의 손상에 대한 두려움이 좀더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갖기 쉬운 두려움이라면, 이 책임에 대한 두려움은 좀더 젊은 사람들이 흔히 갖는 두려움이다.
일반학교를 다니다 대안학교에 오는 아이들 대부분이 '책임'을 진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른다. 일반학교를 다닐 동안에는 부모나 교사나 동기들이 대신 선택을 해준 덕분에 책임도 자신이 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가 아이들은 대안학교에서 말하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는 말이 한편에서는 자유의 허용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부담스런 책임임을 깨닫는다.
물론 그럼에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 걸 더 좋아한다. 자신의 의견이 존중받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아직 미성년인 이 연령대의 아이들이 져야 할 책임이란 게 그리 크지도 부담스럽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 시행착오가 충분히 배려되는 훈련의 과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도 상급학교로의 진학 여부나 전공 선택의 문제에 부딪힐 나이가 되면 고민이 깊어지고 때로는 장고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부모가 아이의 선택을 기다려주고 존중해준다면, 아이는 앞으로의 삶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날 소중한 경험(선택과 책임)을 자신의 배움으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런 배움 없이 성년의 나이가 된 젊은이들 상당수는 선택에 따른 책임의 부담을 지는 데 익숙치 않다. 이 때문에 이들은 가능한 최소한의 책임만을 질 수 있는 선택을 하거나 자기보다 더 힘 있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삶의 선택권까지 줘버린다. 일종의 자유의 포기다. 이들은 당장에는 본인이 안전하고 실리적인 길을 선택했다고 안심할지 모르지만, 좀더 거시적으로 보면, 이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위축된다. 기본적으로 두려움에서 나온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꾸려가는 삶은 허무할 수 있다.
이외에도 우리가 삶을 살면서 끌고 다니는 두려움은 많다. 자신의 위선과 거짓말이 폭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이 드러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착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가면이 벗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어느날 갑자기 이유 없이 불운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갑자기 택시기사가 강도로 돌변할 수도 있고, 친절한 이웃이 내 아이의 유괴범이 될 수도 있고, 상대방의 100% 잘못으로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유기농 식품이 아닌 식품은 내 몸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등등...
보다시피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삶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두려움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고, 항상 갑옷으로 무장하고서야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하며, 그 무장한 갑옷 때문에 관계의 친밀함과 진정성은 결코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세상 또한 탈출구가 없다. 게다가 전사회적으로 두려움의 기운이 생명과 사랑의 기운인 활기보다 강해지면, 두려움이 만들어낸 세상은 악순환에 빠진다.
두려움이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서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건 두려움에서 의심이나 분노, 질투, 미움, 불안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라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공격적이다. 두려움의 자식들인 부정적인 감정들도 공격적이다. 공격은 공격을 불러오고, 이는 다시 공격을 불러온다. 상대의 부정적 감정에서 나오는 공격성을 누그러뜨리고 소멸시킬 유일한 에너지는 용서나 이해 같은 사랑의 기운뿐인데, 두려움에 지배당하는 사람이 더 많을 때는 이런 완화 및 중화 작용이 사회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갈수록 부정적인 기운이 강해진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의 부정적 에너지는 이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고 있다. 온갖 강력범죄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건 단순히 경제상황이 나빠서가 아니다. 1997년 말 IMF가 닥쳤을 때, 국민소득도 지금보다 낮았고, 경제전망도 지금보다 훨씬 어두웠지만, 우리 국민들 대다수는 이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는 데 마음을 합쳤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호소에 부응하여 개인이 소장한 금붙이들까지 아낌없이 내놓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다른 선진국들의 시각에서는 신기하게 보일 만큼. 덕분에 우리나라는 자칫 경제적 정체나 후퇴를 불러올 수 있었던 IMF 사태를 몇 년 안 가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수의 국민들이 나라 경제보다는 각자 제 살 길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갈수록 두려움만 더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앞으로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 데다가 그동안의 경험에서 보아 이웃과 공동체 전체를 배려해봤자 자신만 손해를 볼 뿐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경제를 살리고 사회와 국가를 활기 있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정책이나 제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제는 심리다'는 말이 있듯이 경제에도 구성원들의 심리와 태도가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두려움으로 인한 부정적 기운이 사회 전체적으로 강해지면, 경제활성화는커녕 사태가 갈수록 악화될 것이다.
아마 이 글의 여기까지 읽고서도 변증법을 이야기하는데 왜 뜬금없이 두려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제대로 잘 설명했다고 자신할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 경험상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두려움에 지배당한 사람과는 변증법을 논할 수 없고, 자신이 두려움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과 더불어 변증법을 논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려움은 '두려움을 갖지 말자'고 결심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하루 동안 원숭이를 생각하지 않으면 제자로 받아주겠다"는 현자의 말을 들은 사람이 도리어 그때부터 머릿속에 온통 원숭이 생각만 가득해지듯이, 부정하고 막으면 거부당한 기운은 더 강해지기 마련이다. 방법은 자신의 두려움을 자각하고 객관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두려움과 자신이 일체화된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두려움 사이에 거리 두기를 할 수 있게 되면, 자신의 두려움이 많이 과장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그 틈 사이로 새로운 현실과 새로운 생각이 흘러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작은 자각하는 것이다. 자각하지 못하면 시작도 할 수 없다. 다음과 같은 두 경우에서 보듯이.
(자신이 두려움에 지배당한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
"당신은 두려움이 많군요. 먼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십시오."
"무슨 소리예요? 나는 내 자유의지로 내 삶을 선택하고 있다구요!"
혹은,
"무슨 소리예요? 내가 두려움이 많은 게 아니라, 현실이 그런 거잖아요. 항상 조심하고 긴장하면서 살아야 한다구요."
(자신이 두려움에 지배당한다는 걸 자각하는 사람)
"당신은 두려움이 많군요. 먼저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십시오."
"맞아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모르겠어요."
분명한 건 용기 있는 자만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2015.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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