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최후>



변증법 시론(試論)

- 금안당



 LIST 


 


2.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나오는 변증법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변증법 : 


(1) [철학] 사물이 운동하는 과정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으로 인해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다시 이 모순을 지양함으로써 다음 단계로 발전해 가는 논리적 사고법(思考法).

(2) 문답(問答)을 통해 진리에 이르는 방법.

(3) 마르크스주의에서, 자연과 사회, 사유의 일반적인 운동 법칙과 발전 법칙에 관한 과학.

 

쉽게 설명하면, (1)의 정의는 헤겔의 변증법을 설명한 것이고, (2)의 정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식을 말하는 것이며, (3)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 중 변증법에 대한 설명이다. 철학적으로 변증법이라고 하면 학자들과 일반인들은 주로 (1)과 (3), 개중에서도 특히 (3)을 많이 떠올린다.

 

마르크스 자신은 자신의 변증법이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론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그가 헤겔의 정신의 변증법을 부정하고, 하부토대의 변증법적 발전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이야기하는 순간부터, 그리고 레닌이 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고방식에 근거하여 소비에트 혁명을 성공시킨 그 후로 세상 사람들은 변증법을 사회주의자를 포함한 좌익들의 정치이념적 사고방식의 하나로 여기게 되었다. 반면에 어찌 보면 변증법을 현대철학사상의 하나로 부활시킨 헤겔은 묻혀졌다. 어쨌든  헤겔의 '정신'이든 마르크스의 '물질'이든 모든 변화와 운동은 정-반-합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변증법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변증법은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헤겔과 마르크스는 정-반-합의 끊임없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헤겔도 마르크스도 변증법적 과정의 소멸을 그 결론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헤겔은 절대정신이 구현된 입헌군주제 국가를, 그리고 마르크스는 모든 생산수단이 공유되는 공산주의 사회를 변증법적 과정의 종착역으로 보았고, 그것도 도달 못할 아득히 먼 미래의 이상향이 아니라, 당대의 모순이 해결되면 곧 바로 실현될 수 있는 눈앞의 미래로 설정했다. 말하자면 변증법론자이면서 실제로는 변증법의 죽음을 선고한 것이다.

 

반면에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안다'에서 출발한다. 그가 이후에 어떤 사실을 알아도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일종의 '무한'이므로, 어떤 유(한)도 무한을 유한으로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던 것은 '무한'이라는 그릇(틀)이고, 소크라테스가 알았던 단 한 가지는 자신이 이 무한의 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냥 모름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지 않고 이 '아무것도 모름'이 '앎'과 진실을 발견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변증법적으로 진행된 그의 대화법, 소크라테스 스스로 '산파술'이라 불렀던 대화법을 통해서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거리에서 민중이 주체가 된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한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다.

 

“민중이란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이란 어떤 이들이지?”
“항상 돈에 쪼들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자들도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그렇다면 부자도 가난한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민중이 주체가 된다는 민주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의 정치체제인가, 부자들의 정치체제인가?”
“.........”

 

이 청년이 말문이 막히면서 스스로 어떤 결론을 가져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묻기만 했지, 자신의 어떤 판단도 청년에게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니 청년이 이 대화를 통해 민중이란 용어의 개념을 좀더 정확하게 설정해야겠구나, 라고 생각했을지, 아니면 '민중이 주체가 된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모순이란 걸 깨달았을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뭔가를 깨달았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청년은 소크라테스와 대화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자기 논리의 모순을 깨달았을 거란 점이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본디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에서 출발했고, 끝까지 이 태도를 놓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는 청년이 진실에 한걸음 다가서게 만들고 있다. 다만 그는 답은 제시하지 않는 대신 질문을 했다. 일반적인 다른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질문을.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와 청년의 공통점은 둘 다 답을 모른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한 사람은 질문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기정사실화한 반면,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하는 대신 답은 자신도 모른다고 유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는 다른 보통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상식적 개념(민중, 가난한 사람 등)에 대해 물었던 것일까? 그 이유의 하나는 그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그의 사고틀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이 하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청년의 대답으로 질문을 이어가지만, 그럼에도 그의 질문은 문제의 본질을 향해간다.

 

여기에 일핏 보면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이 발생한다. 어떻게 보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의 주장은 거짓말 같고, 일련의 질문은 대단히 의도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의도적이 아닌 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닌 다음에야 청년이 어떤 대답을 할지 미리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연인데도, 문제의 본질이라는, 소크라테스가 의도했던 정확히 그 지점을 향해 대화가 진행된다.   

 

이것이 변증법의 강점이다. 소크라테스의 인식에서는 청년의 사고가 어디에서 막혀 있는지 보인다. 그는 어느 부분을 터주어야 청년의 사고의 물길이 막히지 않고 흐를지 안다. 물길을 터주는 것 외에 물길을 돌리거나 끌어올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물이란 건 본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어서, 막히는 데 없이 터 있기만 하면 청년의 사고 흐름은 언젠가 바다(진리)를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디가 막혀 있는지 보이고, 결국에 모든 사람은 진리와 만나기 마련이라는 법칙이 보이는 것, 이것이 변증법적 인식이다. 그러니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질문에 대해 청년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알고', 어떤 결론이 나올지 '안다'는 점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니다. 어찌 보면 그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든 것을 아는 미스테리하고 모순된 사람이다.

 

또 소크라테스의 사고에서 시간은 순서대로 펼쳐져 있기도 하고 동시에 있기도 하다. 청년의 사고가 어떤 부분에서 막혀 있는지를 인식할 때 소크라테스의 시간은 펼쳐져 있다. 말하자면 특정 순간에 특정 공간만이 대응한다. 하지만 청년이 결국에는 진리와 만나리라는 것을 인식할 때, 시간은 증발한다. 사실 청년이 오늘 진리와 만나든, 일년 후에 만나든, 다음 생에서 만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만난다는 사실뿐이다. 이 극한에서 3차원의 현실에서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창조론과 진화론이 마침내 하나가 된다. 그러니 변증법적 인식은 차원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인식이다.

 

나아가 변증법은 부분을 통합하는 인식이다. 변증법은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라고 보고, 부분 속에 전체가 들어 있다고 보는 인식이다. 형이상론은 코끼리의 다리와 몸통과 머리와 코가 합쳐져서 비로소 코끼리가 된다고 보지만, 변증법은 코끼리의 뒷다리도, 코끼리의 코도 코끼리라고 본다. 혹은 코끼리의 뒷다리도 코도 코끼리가 아니라고 본다. 예를 들어 내가 손만 움직여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면, 형이상학적 논리에서는 내가 아니라 내 손이 그리 했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내 손이 저지른 짓의 책임을 내가 가져갈 수도 있다. 변증법적 논리에서는 그 행위는 내가 한 것이기도 하고, 내가 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작용한 것이 법칙이고, 내 육신은 그 법칙이 구현되는 매개물에 불과했다면.)

 

보다시피 형이상학은 분리하고 나누고 세분화하는 쪽으로. 말하자면 분석하는 쪽으로 작용한다. 반면에 변증법은 종합하고 합치고 파고드는 쪽으로, 말하자면 통합하는 쪽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형이상학은 현상의 합집합을 보지만, 변증법은 본질의 교집합을 본다. 형이상학은 현상에 가려 본질을 보지 못할 위험이 있지만, 변증법에서는 본질이 현상보다 우선적이다. 그럼에도 변증법에서 본질과 현상은 유기적이어서, 본질이 현상을 지배할 뿐 아니라, '양질전환의 법칙'이나 '임계량의 법칙'처럼 현상이 본질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한다.  

 

그러니 변증법은 일종의 물길, 혹은 사고틀이다. 그 물길 혹은 사고틀에는 무엇이든 담길 수 있을 뿐 아니라, 담기는 내용물에 따라 그 물길과 사고틀 자체가 변하기도 한다. 그 물길에 담기는 내용물이 법적 문제일 때, 그 물길은 딱딱하고 선명하고 각이 진다. 하지만 그 물길에 담기는 내용물이 아이에 대한 부모의 사랑일 때 그 물길은 한없이 깊어지고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진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사형선고를 받아들였다. 사형을 선고한 사람들조차 그 본심에서는 이 선고를 실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끌어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소크라테스의 변명』), 원하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던 그 재판의 판결을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하게 적용코자 했다. 그러니까 스스로 무죄라고 주장한 사람이 자신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내려진 선고를 순순히 수용했을 뿐 아니라, 한 발 더 나가 스스로 가장 엄격하게 적용하는 건 어찌 보면 모순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에서는 이건 모순이 아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것이 모순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단서가 그가 사형 선고를 받아들이면서 한 말, '악법도 법'이라는 전제이다. 아마 요즘 세상의 사상범과 정치범, 이런저런 소신범들이 이 전제를 들었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기겁을 하고 펄쩍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에 아테네인들이 알렉산더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사형시키려 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에 죄를 짓는' 아테네인들의 판결에 불복하여, 달아났다가 얼마 안가 망명길에서 죽고 만 경우를 떠올리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어리석고 모순된 선택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

 

게다가 아테네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편에 서서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까지 된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살아 생전에 조국 아테네를 위하여 여러 번 자발적으로 병사로 전쟁에 참여한다. 그러니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의 판결을 순순히 받아들인 건 한편에서는 그의 조국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이런 선택을 한 건 그의 조국애 못지 않는 그의 철학애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철학을 만개시켰다.(비록 자신의 수제자인 플라톤을 깊은 슬픔과 좌절에 빠지게 하긴 했지만.)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죽음을 회피함으로써 자신의 철학도 오랜 세월 매장시켰다.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받아들인 소크라테스의 사고방식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처럼 버림으로써 얻고, 포기함으로써 이루고, 가장 낮아짐으로써 가장 높아지는 역설을 이해한다. 그는 삶이 새옹지마의 역동적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해했다. 이 또한 변증법적 사고의 핵심 중 하나이다. 즉 현상적으로 대립적으로 보이는 두 요소(예를 들면 낮과 밤처럼)가 실은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고, 동전의 앞면이 없으면 동전의 뒷면도 있을 수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변증법은 부분에 국한하지 않고 전체를 본다. 들어간 곳이 있으면 튀어나온 곳이 있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 비록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잃는 것과 얻는 것이 '동시에' 구현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변증법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은 모든 변화의 진짜 원인은 '밖'이 아닌 '안'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요인보다는 내적 요인을 훨씬 중요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도 7.0 정도까지의 지진에 견딜 수 있게 지어진 건물이 있을 때, 진도 8.0의 지진으로 이 건물이 무너진다면, 이 건물이 무너진 원인은 예상치 못했던 강진이 아니라, 건물 자체의 낮은 내진도에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낮은 내진도와 높은 강진 둘 다가 원인인듯이 생각한다. 건물의 내진도가 낮다 하더라도 강진이 닥치지만 않았다면 요행히 재난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결과에 대한 원인을 외부적이고 현상적인 데서 구하는 건 자칫 남 탓, 환경 탓을 하면서 한순간 억울하고 화난 감정을 푸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실제로는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제의 핵심 원인은 항상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같이 찬공기를 쐬어도 건강한 사람은 쉽게 감기에 걸리지 않지만, 몸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은 감기에 걸릴 뿐 아니라, 잘못하면 폐렴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는 개인만이 아니라 한 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강한 적이 쳐들어와도, 내정이 튼튼한 나라는 결국에는 적을 물리칠 수 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냈듯이. 하지만 연개소문의 사후 그 자식들간에 분쟁이 일어나자, 강력하던 고구려도 당과 신라의 협공에 무너지고 말았다. 물론 그렇다고 외적 요인이 전혀 변수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내실이 있다면, 외적 요인으로 인한 타격은 임진왜란의 경우처럼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고, 결국에는 회복될 수 있다.

 

내적 요인을 우선시하는 건 문제의 본질을 본다는 뜻이다. 누군가가 내게 욕을 하면 나는 화를 낸다. 하지만 변증법은 욕을 하는 상대방이 아니라 화를 내는 자신을 본다. 나는 왜 화를 내지? 상대방이 욕해서? 만약 내 화가 상대방의 욕에 대한 자동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면, 나는 상대방과 똑같은 수준이다.(하지만 상대방이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는 화라면 이 경우는 다르다.) 반면에 상대방이 욕을 하든 말든 나의 평온이 깨어지지 않는다면, 나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

 

진짜 해결법은 상대방이 욕하는 내용에 따라 나를 바꾸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욕에 반응하는 나 자신의 상태에 따라 나를 바꾸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상대방의 욕에 반응하지 않으면 상대방도 더 이상 나를 자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효 대사는 인도에 유학을 가고 안 가고가 아니라, 해골바가지의 물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마음이 문제의 핵심임을 깨닫고 난 후, 자신이 저지르는 어떤 파계행위에도 자신의 마음이 평온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모든 문제의 주요 원인을 내적인 것에서 구할 때의 장점은 다른 사람이나 외부와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고, 문제 해결을 근본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이 나에게 쉽게 해를 입힐 때, 남 탓을 하는 데 시간을 소비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쉽게 범접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내공(?)을 강화시킨다면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고, 자신에게 도리어 해가 될 정도로 남에 대해 원망하는 감정도 강하게 일으킬 필요가 없다.

 

사실 남 탓을 하거나 외적 환경 탓을 하는 건, 거꾸로 보면 상대방과 환경을 통해서 내가 이득을 취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이다.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건, 내 배우자만은 순결하여 내게 순정을 다해주길 바라는 욕심이 있어서이다. 또 집안의 가난을 원망하는 건 자신의 집안이 부유하여 노력없이 많은 것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이다. 하지만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자신만이 세상의 호조건을 다 가질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그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원인의 적어도 반은 내 욕심에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다. 또 부유해지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 목표라면, 현 사회구조상 가난한 집 자식이 갑부가 되기는 거의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상대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게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신체장애인 사람이 장애 상태인 자신의 몸을 원망하면서 자신의 몸이 비장애인들처럼 '정상'이 되어야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일리 있는 생각이긴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떻게 해도 해결책이 없는 생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그 장애인 스스로 생각을 바꾸는 것밖에 없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고, 그렇게 잘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른 장애인들에게도 힘을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보다시피 변증법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그것의 리얼리즘적(사실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변증법은 사실에 충실하다. 변증법은 욕심으로 존재하는 현실(배우자의 불륜, 집안의 가난, 장애 상태)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에서 출발한다. 변증법은 현실을  본질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출발점이자, 본질이 발현된 결과물로 본다. 이렇게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로서 받아들이려면, 현실에 대한 선입견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이 때 현실은 그냥 삶의 조건일 뿐이고, 조건은 불리하거나 유리하지도 않고, 좋거나 나쁘지도 않으며, 옳거나 그르지도 않는 '중립적'인 것이란 전제를 되새기는 게 도움이 된다.

 

현실은 '중립적'이라고 여겨야 그나마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로서 인정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 자신이 싫어하는 현실을 계속 부정하면, 그는 문제의 원인과 본질을 파악할 수도,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또 모순이 증폭되어 어느 날엔가 파국적인 결과를 맞게 되는 걸 피할 수 없다.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인정하는 건 문제 해결의 반 이상을 해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건 심리상담의가 환자의 이야기를 그냥 들어주기만 해도 치료의 반 이상이 이루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변증법에서는 모든 것이 변한다고 본다. 변하지 않고 가만히 정태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 이는 "만물은 유전한다"고 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과 같다. 따라서 변증법에서는 사물의 '(현재)상태'보다는 '흐름'과 '변화'를 더 중요시한다. 반면에 형이상학적 사고틀에서는 운동하는 사물조차도 각 시점시점에서 정지상태로 파악한다.

 

주식투자는 미래가치를 예측하는 게 중요하다. 주가 지수를 그래프로 그리면 주가의 변동 상황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나 현재 상황일 뿐이다. 또 주가 지수나 경제 관련 지수가 바닥을 치면 다시 상승하리란 건 알지만, 지금이 바닥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변화와 흐름에 주목하는 변증법적 사고를 하다 보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높아진다. 조건이 동일한 상황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변수가 생긴다 해도. 왜냐하면 변증법적 시각으로 보면 어떤 새로운 조짐이 미래에 중요 변수가 될 것인지 아닌지 파악하는 능력도 커지기 때문이다.

 

만물이 끊임없이 움직인다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면에서 마르크스와 헤겔은 생산력이나 국가의 발전으로 이 변화가 '발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와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고대 철학자들은 반드시 그렇다고 보지는 않았다. 이들은 변화가 역사의 발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보았다. 사실 이들은 시간이 갈수록 인간이 발전하고, 따라서 역사가 발전한다는 견해는 추호도 갖지 않았다.

 

그보다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 서 있든, 인간이 추구해야 할 바는 역사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우주질서의 원리인 로고스를 아는 것이고, 소크라테스에게는 아테네 시민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소크라테스는 아테네 폴리스에서 자신의 역할을 조는 말을 깨우는 등에로 표현했다.) 이것은 마치 석가모니 부처가 사람들에게 다르마(법)를 깨닫게 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았던 것과 유사하다. 어쨌든 로고스이든 진리이든 다르마이든 역사의 발전에 상관없이 항상 존재한다. 인간들이 자신을 알아주길 기다리면서...

 

그러니 사람들에게는 역사 발전의 정도와 상관 없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진리를 깨달을 기회가 항상 존재한다. 반면에 자연과 인간 사회의 변화는 그 자체가 발전이나 성장이 아니라, 인간이 진리를 깨달을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변화하는 방식이 진리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종적인 진리는 그 모든 변화와 다양성은 허상(망상)에 지나지 않고,  "만물은 하나이다"(헤라클레이토스)라는 진리이다.

 

이 점에서 변증법은 불교나 도교, 기독교(인간은 결국 아버지 하나님에게 돌아간다) 같은 종교 사상과 닮아 있다. 사실을 중시하고 현실 세계에서 출발하는 변증법이 현세를 초월하고 내세를 중시하는 종교사상과 닮아지는 이유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변증법이 4차원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신은 3차원 세계의 물질법칙에 갇혀 있지만,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은 3차원 세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3차원 세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4차원적 인식으로 3차원 세계를 조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이상에서 변증법의 특징에 대해 열거해보았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읽는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될지 자신이 없다. 아마도 나 자신이 변증법에 대해 충분히 정리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내가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변증법은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사상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헤겔과 마르크스의 사상은 변증법을 일부 훼손시킨 측면이 있고, 변증법적 철학은 고대 그리스의 일부 철학자들과 동양 철학 및 종교 철학들에서 더 완벽하게 구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나의 미진한 설명으로 아직도 변증법에 대해 감이 잘 안 잡힐 독자들을 위해 헤라클레이토스의 표현 몇 가지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은 같은 것이다”

“삶과 죽음, 깨어남과 잠듬, 젊음과 늙음은…… 같은 것이다”

“건강을 달콤하게 만들고 좋게 만드는 것은 병이며, 배부름을 달콤하고 좋게 만드는 것은 배고픔이고, 휴식을 달콤하고 좋게 만드는 것은 피곤함이다”

 

보다시피 변증법은 한 마디로 모순의 통일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철학의 창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런 변증법적 사고방식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런 주장들에 대해 '말이 앞 뒤가 안 맞는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익숙한 사고방식은 어느 쪽인가? 나아가 당신이 익히고 싶은 사고방식은 어느 쪽인가?


2015. 2. 23. 

 



날짜

2015. 2. 2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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