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철학 못지 않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펼쳤던 제자백가. 그들의 시대를 그린 영화의 한 장면.
변증법 시론(試論)
- 금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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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형이상학적 논리의 모순과 한계
손빈은 춘추전국시대의 사람으로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의 손자이자, 나중에 손자병법의 공동저자가 되는 뛰어난 전술가이다. 손빈은 친구 방연의 시기 질투심 때문에 오나라 왕에게 양 다리의 무릎 아래가 잘리는 극형을 당했지만, 미치광이 흉내를 내어 오나라 왕과 방연의 경계심을 흐트러뜨린 후, 다행히 제나라 장수 전기에게 구조되었다.
전기는 왕족들과 경마 내기하기를 즐겼는데, 번번히 내기에서 지곤 했다. 서로 말 3마리씩을 내어 상대방 말과 달리기 시합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아무래도 신하인 전기의 말들이 왕족들의 말보다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보고 있던 손빈은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전기에게 권했고, 결과적으로 전기는 내기에서 매번 왕족들을 이길 수 있었다.
"장군의 가장 못한 말을 상대의 가장 실력 좋은 말과 경주시키십시오. 그리고 장군의 가장 좋은 말은 상대의 중간 말과 달리게 하고, 장군의 중간 말은 상대의 가장 못한 말과 달리게 하십시오."
듣고 보니 어떻게 해서 전기가 시합할 때마다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항상 2:1의 스코어로 이길 수 있다.)
또 처음에는 속기 쉽지만 두 번째는 절대 속지 않을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도 있다.
"교통사고가 나서 승용차에 타고 있던 중년 남자 한 명과 청년 한 명이 사망했다. 현장 조사에 나선 경찰은 신원조회를 통해 두 사람이 부자지간임을 확인했고, 시신을 병원으로 옮겼다. 잠시 후 담당 의사가 시신을 확인했다. 그런데 죽은 청년의 얼굴을 확인한 의사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이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닌가!!"
경찰은 분명히 함께 사망한 중년 남자가 청년의 아버지인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 의사는 과연 누구일까? 답은, '의사는 청년의 어머니였다'이다.
약간 복잡한 퀴즈 하나 더.
"세 남자가 여행을 가서 여관을 잡았는데, 주인아줌마가 3만원이라 하여 한 사람당 1만원씩 걷어서 3만원을 지불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아줌마가 젊은총각들이라 싹싹하기도 하고 이뻐서 5천원을 깎아주기로 맘을 먹고, 자신의 아들을 시켜 5천원을 주며 세 남자에게 다시 가져다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2천원을 자신이 챙기고 3천원만 갖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들은 받은 3천원을 다시 한 사람당 1천원씩 나누어가졌습니다. 결론적으로 한 사람당 1만원씩 내고 1천원씩 돌려받았으니 한 사람당 9천원씩 낸 것이지요.
자, 여기서 오류가 발생합니다. 한 사람당 9천원씩 냈으니, 9,000×3=27,000원, 아들이 챙긴 돈이 2천원, 합하면 29,000원입니다. 천원은 어디로 갔을까요?"
아마도 세가지 퀴즈 모두 답을 알고 보면 당연한데, 그 답을 듣는 순간, 자신의 논리의 허가 찔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 독자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퀴즈들이 전제하는 사고방식이 3차원적인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이다. 허가 찔린 우리의 기성관념은 2차원적인 사고방식에 오염되어 있는 부분이고...
예를 들어 첫번째 경우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뛰어난 상대의 말을 이기려면 내 말도 뛰어난 말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두번째 경우, 우리는 의사, 그것도 시신을 다루는 부검의라면 당연히 남자의사일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세 번째 퀴즈는 일종의 궤변이다. 천원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아들이 챙긴 돈 2천원은 손님들이 낸 금액에 다시 보태져야 하는 돈이 아니라, 27,000원 중에 들어 있는 돈이다. 그러니까 주인이 받은 여관비 25,000+ 아들이 챙긴 2,000=27,000원이다.
보다시피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인간의 선입견에 흔들리지 않는 논리성과 합리성, 보편성을 갖는다는 강점이 있을 뿐 아니라, 창의성도 뛰어나다. 사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전술들이나 손자병법의 36가지 계책들은 모두 무슨 신기하고 놀라운 초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성과 비합리성이라는 허를 찌르는(따라서 창의적인)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전술들이었을 뿐이다.
이 점에서 보면, 우리 인간은 아직 형이상학적 논리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지금도 과학자들이나 기술자들이 획기적인 발견이나 발명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으면, 그 기발함에 놀라워하면서도, '아- 그래, 왜 여태 그런 생각을 못했지?'라는 생각이 든다. 직각삼각형의 변의 길이 공식인 피타고라스 정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적 논리는 지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이 지극히 타당한 논리가 인간의 사고와 인간의 세상을 아직 다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 여담이지만 3차원적인 형이상학적 논리가 인간의 주요 사고방식이 되면, 아마도 미드 <스타트렉>에 나오는 스팍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스팍의 논리는 항상 타당하고 옳았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제갈공명은 상대방 장수의 심리적 성향은 물론이고 날씨까지 포함하여 현실의 중요 변수들을 주도면밀하게 파악한 다음, 가장 성공가능성이 높은 전술을 세운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고 나면, 자신이 사용한 전술을 다른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설명해준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 다른 장수와 책사들은 한편에서는 '승상(제갈)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냈는지' 감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위의 퀴즈들의 답을 들었을 때처럼 '과연 그렇구나'라고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제갈량이 이렇게 친절하게 자신의 전술을 사람들에게 설명한 이유는 자신을 이을 후계자를 기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제갈량은 이 과업을 결국 이루지 못했다. 그의 후임자는 아무리 제갈량에게 배웠어도 제갈량만큼의 기량에 도달하지 못했다. 왜 그럴까?
게다가 형이상학적 논리의 이런 잠재력과 완벽성과 달리 현실의 형이상론자들은 오히려 거꾸로 논리의 모순에 스스로 갇히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런 형이상적 논리의 모순이 소위 '궤변'인데, 무수히 많은 종류의 궤변이 있지만, 여기서는 저 유명한 제논의 역설을 예로 들어보자. 다음은 제논의 역설 중 하나.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하는데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보다 10배가 빠르다.(아킬레우스는 1초에 10m를 간다고 하자.) 하지만 거북이가 좀이라도 앞서서 출발했다면 아킬레우스는 절대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거북이가 아킬레우스보다 10m 앞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아킬레우스가 거북이가 있던 자리에 도달하면 그 사이 거북이는 1m 더 앞에 가 있게 된다. 아킬레우스가 다시 1m를 나가면 그 사이 거북이는 0.1m를, 다시 아킬레우스가 0.1m를 가면 또 다시 거북이는 0.01m를 더 나가 있게 된다. 이 과정은 무한 반복되고, 거북이는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아킬레우스보다는 앞서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 우리는 현실에서 이런 추론이 궤변이란 걸 안다. 현실에서 아킬레우스는 몇 초안에 거북이를 따라잡고, 거북이보다 앞서 달리게 된다. 제논도 이 추론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논이 이 역설을 제시한 건 이 역설이 타당해서가 아니라 이 역설은 타당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이 추론이 분명 잘못된 것임에도 형이상학적 논리만으로는 이를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더하기를 무한 번 하면 그 수는 무한대만큼 커진다는 '선입견'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아도, 이 역설은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위 경우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는 데 걸리는 시간은 1+1/10+1/100+1/1000+…‥(초) 이므로, 아무리 길어봤자 2초가 걸리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가 선입견에 사로잡히지만 않으면, 우리는 현실이라는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형이상학적 논거를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쉽게 이 궤변을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건 그냥 1초 후에 둘이 도달한 지점, 2초 후에 둘이 도달한 지점, 3초 후에 둘이 도달한 지점을 비교하면 된다. 2초면 이미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앞서 있게 된다. 이런 식의 반박이 갖는 장점은 상대가 부분을 확대 과장하여(0.1m와 0.01m, 0.01m와 0.001m ....) 이 미세한 부분에서 진행되는 과정이 마치 전체 과정을 좌우하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움직이지 않는 돌덩어리를 구성하는 분자와 원자와 전자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쉬지 않고 회전하고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덩이가 쉬지 않고 움직인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위 경우에도 굳이 무한등비수열의 합의 범위를 운운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전체와 부분, 혹은 서로 다른 차원을 혼동하지만 않으면 된다.
또 다른 유명한 역설인 거짓말쟁이의 역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기원전 6세기 경 크레타 사람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러자 후대의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에피메니데스도 크레타 사람이니, 그도 스스로의 단언에 의해서 거짓말쟁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에피메니데스가 거짓말쟁이가 되면, 그가 한 "크레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말도 거짓말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쟁이가 아니게 되어 에피메니데스도 거짓말쟁이가 아니게 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 역설의 해결법 또한 마찬가지다. 에피메니데스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크레타 사람이라는 대상(객체)과 다른 위치, 즉 관찰자 혹은 주체의 위치에 자신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역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에피메니데스도 크레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대상물의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니까 애초의 분석틀이 붕괴되고 새로운 분석틀이 들어선 셈인데, 사람들은 이 둘을 동일시했다. 모순은 이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혼동만 없다면 모순은 발생하지 않는다. 위 말의 의미를 더 정확히 해석하면 '에피메니데스가 보기에 크레타 사람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을 잘 한다'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에서 에피메니데스처럼 개떡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말을 오해하지 않고 찰떡같이 알아듣기 마련이다.
하지만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형이상론자들은 고민한다. 자신들의 3차원적 논리로는 모순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해결을 전혀 못하는 건 아니다. '무한등비수열의 합의 공식'이나 '대상언어와 메타언어의 구별' 같은 논거를 결국에는 찾아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답을 찾아내기까지 이들은 현실에서 분리된 관념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혹은 무리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던 피타고라스 학파처럼 살인자가 되거나.) 3차원적인 형이상학의 한계이자 단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제갈공명이 그랬던 것처럼 형이상학적 논리를 '적용'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누구도 천재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다.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이 유효하냐 아니냐는 그것이 폭넓게 믿어지느냐 아니면 매도당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논리의 법칙을 지키느냐의 여부로 결정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노예주인 메논이 지켜보는 상태에서 공부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노예소년더러 정사각형의 넓이가 2배로 되었을 때의 변의 길이를 찾아내도록 만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인간의 사고력은 타고난 신분과 관계가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대 그리스 사회의 신분제를 부정했다.)
그렇다면 똑같이 합리적인 형이상학 논리를 현실에 적용하여 문제 해결을 추구한 손빈이나 제갈공명,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은 같은 형이상학적 논리를 사용하면서도 별로 능수능란하지는 못했던 다른 전형적인 형이상론자들과 어떤 점에서 달랐을까? 이 점에서 나는 그들이 서 있는 '입지'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고 본다.
후자의 사람들은 3차원의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갇혀 있다. 이들은 3차원 세상이 움직이는 규칙을 일부 발견하긴 했지만, 3차원 세상을 총괄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하기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규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힘들어했다. 반면에 전자의 사람들은 3차원 세상 속에 있기도 하지만 3차원 세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입지에 설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3차원 세상을 움직이는 규칙이 무엇인지도 알았지만, 어떤 규칙들이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하는지도 알았다. 이는 3차원 세상을 총괄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전자의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것은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고 이 둘은 모순이 아니다. 하지만 후자의 사람들에게는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고, 이 둘을 같은 것이라 여기는 것은 모순이다. 전자의 사람들에게 자연 생태계의 상생과 적자생존은 모순이 아니지만, 후자의 사람들은 이 둘 중 하나만이 자연계의 규칙일 수 있다고 여긴다. 전자의 사람들에게 인간은 피조물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신의 자식일 수 있지만, 후자의 사람들에게 예수는 사람이거나 신의 자식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전자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박애적인 사람이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지만, 후자의 사람들에게는 이 둘이 선과 악의 전형이다.
따라서 후자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모순에 고뇌하는 사람이라면, 전자의 사람들은 이 모순들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모순이 이 세상을 세상답게 만들고, 생명을 생명답게 만들어준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이 염려하는 건 이 모순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는 세상사람들이다.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산파술'이라 부른 변증론적 대화방식으로 아테네 시민들을 깨우치려 한 것도, 부처가 생노병사의 4고(苦)를 겪는 중생을 자비지심으로 대한 것도,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진리를 드러낸 것도 모두 인간에 대한 이런 깊은 애정이 있어서였다.
반면에 3차원 현실에 갇혀 있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은 3차원 현실을 열심히 연구하긴 했지만, 3차원 현실을 꿰뚫는 원리를 발견하거나 3차원 현실을 총제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3차원 현실의 원리들을 밝힘으로써 사람들이 제대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 그의 행복론이나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그의 주장은 원리라기보다는 현상에 대한 설명인 측면이 강하다. 그것도 그의 주관적 판단이 들어간 설명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감정적 만족에서 얻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잘못된 것이고, 비사교적인 성향의 사람도 잘못된 것이 된다. 이런 주관적 기준 앞에서 세상은 총체적으로 이해되기보다 세분화되고 서열화되며 평가된다. 그러다보면 한 부분에서는 적용되는 이론이 다른 부분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3차원 세계에 갇힌 사람은 자신들의 기준이 상대적이긴 하지만 '더 옳다'고 여긴다.(반면에 극단적인 2차원적 인식에서는 자신들의 기준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긴다.) 그러니 상대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경직된 상대성이다. 반면에 4차원적인 변증법적 인식을 하는 사람은 현실에서 더 옳은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마다 '더 유익한' 기준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살인'은 대다수 사회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나쁜 짓으로, 중대한 범죄행위로 간주되어왔지만, 지배자의 살인 행위에 대해서는 다른 기준을 들이대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어떤 명분으로 이뤄진 '살인'인가에 따라 그 범죄성 여부나 범죄 정도도 문화마다 다르다. 하지만 살인=중범죄라는 도식을 경직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런 모순된 현실을 용납하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나 문화와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반면에 3차원 현실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이 상대적임을 정말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대립보다는 이해와 협력의 여지를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현상적이고 형식적이고 도식적인 기준을 쉽게 우월한 기준으로 삼는 탓에 3차원 논리에 갇힌 사람들은 속기 쉽다. 위에서 말한 궤변도 그중 하나이지만, 다음과 같은 익살스런 경우도 있다.
예수회 수도사 한 명과 프란체스코 수도원 수도사 한 명이 기차의 같은 칸 같은 방에 타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일과에 따라 기도서를 읽었다. 그때 예수회 수도사가 담배 한 갑을 꺼냈다.
프란체스코 수도사 : 이런 세상에! 성서를 읽을 때 담배 피는 건 금지되어 있는 것 몰라?
예수회 수도사 : 아, 난 특별 허가를 받았거든.
그러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상대방은 잔뜩 호기심이 동했다.
프란체스코 수도사 : 혹시 나도 그런 특별허가를 받을 수 있을까?
예수회 수도사 : 당연하지. 수도원장을 찾아가 말해보시게나.
얼마 뒤에 두 사람이 다시 만났다.
프란체스코 수도사 : 그랬다가 호되게 질책만 받았다네.
예수회 수도사 : 어쩌다가! 자세히 얘기해보게.
프란체스코 수도사 : 자네가 알려준 그대로 했지. 수도원장을 찾아가 기도하면서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고 물었어. 수도원장이 노발대발하더군!
예수회 수도사 : 에이, 다른 식으로 물었어야지. 난 원장에게 가서 담배 필 때 기도해도 되느냐고 물었다네. 그러자 그는 나를 축복하고 감탄하며, "되고 말고!"라고 했어.
- 옌스 죈트겐 저, 『생각발전소』30~31쪽 -
언뜻 보기에 예수회 수도사의 이야기는 궤변 같아 보이지만 궤변도 아니고, 거짓말이나 사기도 아니다.(아니, 일종의 속임수일 수는 있겠다.) 다만 그는 원장이 담배 필 때 기도하는 것과 기도하면서 담배 피는 것을 구별할 능력이 없으면서 원장 자신은 잘 구별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이용했을 뿐이다. 수도원장님의 3차원 사고가 갖는 약점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3차원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의 약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한 경우지만, 현실에서는 경직된 이 논리 때문에 비극적인 결말이 벌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극단적이지만 살인과 관계된 경우만 해도 안락사와 가정폭력 희생자의 가해자에 대한 공격행위 등의 예가 있다. 또 얼마 전 있었던, 십여년 동안 치매를 앓아온 할머니를 돌보던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던 사건, 하지만 죽지 못했던 할아버지가 7년형을 선고받은 사건도 이런 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지능적인 범죄자들은 오히려 3차원 형식 논리인 법률의 이런 허점을 이용하는 법을 잘 알고 있어서, 범죄행위를 저지르고도 교묘히 법망을 피해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 모두는 법률적 정의의 한계를 알고 있다. 법률의 지배는 전근대사회의 전제군주들이 인간사회를 지배하던 주관성과 독단성의 위험에서 벗어나 보편성과 합리성이라는 원칙을 적용한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발전적 의미를 갖지만, 구체적 현실의 맥락에 관계없이 그 형식적 보편성을 기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자주 모순을 불러온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법 조문이라는 형식이 기본적으로는 현실(내용)에서 추출되었음에도 그 형식이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순간부터 거꾸로 현실을 재단하고 모양 짓는 전지전능한 도구로 사용되는 데서 오는 모순이다.
이는 법률의 단서 조항으로도 충분히 보완되지 않는다. 그래서 폭력적인 성향의 사람이 순간 '욱'하는 감정에서 아무 죄없는 제 3자를 죽였을 경우의 형량보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가해자를 '계획적으로' 살인한 경우의 형량이 더 높게 나오는 모순이 벌어진다. 보수주의자들 중 일부는 이런 상황까지도 '사법정의'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 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이 '정의'여서가 아니라 '필요악'이어서, 다시 말해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런 불합리한 판결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 to be continued -
2015.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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