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 시론(試論)
- 금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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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형이상학적 논리의 모순과 한계 |
4-2. 형이상학적 논리의 모순과 한계
이처럼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비합리적인 법적 판결이 내려지는 이유 중 하나는 형이상학적인 논리로는 '인과관계'를 증명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분명한 인과관계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행위 주체의 '의도성'이다. 즉 살인의 '의도'라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살인이라는 결과가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외의 다른 변수들이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는 판단하기 힘들다.
물론 우발적인 폭력행위라도 다른 사람의 죽음과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인정되면, 계획적 살인보다는 형량이 낮지만 과실치사 등으로 처벌받는다. 하지만 그 원인이 정말로 우발적인 것인지, 우연성을 가장한 고의적인 것인지의 판단은 쉽지 않고, 심판자들의 주관성이 개입할 여지는 여전히 충분히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지병을 가진 사람이 갑자기 심장이 멈춰서 사망하면, 그 사람의 사인은 지병이 아니라 심장마비로 기록된다. 직접적인 현상적 원인인 심장마비 외의 나머지 요인들은 그 사람의 죽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논리에서 인과관계를 판단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는 카오스 이론의 기초가 된 '나비효과' 이론에서 알 수 있다. 카오스 이론 자체는 무질서해보이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현상 뒤에 모종의 질서와 규칙이 존재한다는, 따라서 우리가 이 모종의 질서와 규칙을 모두 알아내면 이 세상의 작동원리를 알아낼 수 있다는 이론이지만, 정작 문제는 우리가 무슨 수로 세상의 이 복잡한 변수들을 다 고려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게다가 나비효과에서 이야기하다시피 베이징에서 펄럭인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으로도 뉴욕에 폭풍우를 몰고 올 수 있다고 하면, 아마도 어떤 사건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골머리를 싸매는 것보다는 그냥 불가지론이나 '신의 은총'에 기대어 무지하게 사는 편이 더 나을 것이란 '무식한'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3차원 세상을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카오스 이론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원인을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여긴다. 학생의 시험 성적이 나쁘면, 그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고 판단하고, 어떤 사람이 폐암에 걸리면 담배가 원인이라고 판단하고(비흡연 폐암환자는 '간접흡연'이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해당 사회에 흉악범죄가 늘어나면 학교가 제대로 된 인성교육을 하지 않아서라고 판단하고, 이상기후가 자주 발생하면 인간이 원인이 된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그리고 어떤 사건의 원인을 자신과 다르게 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 다툰다. 원인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혹은 문제를 발생시키는 원인 자체를 제거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인을 서로 다르게 판단하면 문제 해결법도 다를 수밖에 없고, 어떤 방법을 채택할 것인지를 놓고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일 인과관계가 주관적 해석에 근거한 작의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혹은 어떤 현상(예를 들어 흉악범죄의 증가)의 근본 원인(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달에 기인한 가족의 해체)이 밝혀졌다 해도 그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라면? 또 카오스 이론이 주장하듯이, 어떤 인과를 특정하기에는 아직 밝혀내야 할 법칙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 이런 경우들 모두 인과관계를 찾는 그 모든 노력이나, 해석 차이에서 파생하는 그 모든 분란,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 모든 시도가 모두 헛되거나 무의미해진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나 분란, 시도 등은 인간 활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의미 없는 헛된 활동을 하면서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을 낭비하고 있단 말인가? 안타깝지만 상당 정도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형이상학적 인과관계 추론에 갇혀 있다면 말이다. 형이상학적 추론으로 어떤 현상(사건)의 진짜 원인을 밝히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그 현상에 전체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단편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술, 담배까지 하는 남편의 건강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을 본 아내는 술, 담배가 건강 악화의 원인이라고 여긴다. 반면에 남편은 그나마 술, 담배가 있어 자신의 업무 스트레스가 완화되고 있으며, 건강 악화의 진짜 원인은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에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남편의 상사가 보기에는 부하직원의 건강 악화의 원인은 모든 업무를 과도하게 완벽하게 해내려는 그 직원의 강박증적인 심리 탓일 수 있다. 또 심리상담사나 정신과의사는 남편의 강박증적인 태도가 어릴 때 겪은 불안정한 환경이나 부모의 높은 기대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반면에 그의 부모는 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런 강박증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다른 자식들과 비교해보면 큰아들의 그런 심리는 타고난 성격 탓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최면술사가 나타나 그의 그런 강박증적인 태도는 전생의 어느 시점에서 겪은 충격적인 사건 때문이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이처럼 원인분석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원인 분석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어쩌면 이 모두가 원인일 수도 있고, 이 중 어떤 것도 건강 악화의 진짜 원인은 아닐 수 있다. 이 모두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마어마한 돈과 시간을 들여 온갖 치료법을 다 동원해볼 것이고, 이 중 어떤 것도 진짜 원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 원인을 찾기 위해 분석에 더욱 매진할 것이다. 혹은 직장을 때려치고 시골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식으로 모든 조건을 완전히 제로 베이스로 되돌려 보는 방식을 취해볼 수도 있다.(하지만 그 새로운 환경에서는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위에서 예로 든 원인 분석들에서 보면 제시하는 각각의 원인이 단편적이란 점 외에 특징적인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건 원인과 결과의 연결이 대단히 산술적이고 기계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내의 분석에서 술과 담배는 무조건 마이너스(―)의 값을 갖는다. 남편에게는 업무 스트레스가, 상사에게는 강박증이, 정신과 의사에게는 어릴 때의 환경이, 부모에게는 타고난 천성이, 최면술사에게는 전생의 사건이 모두 마이너스의 입력 값으로 여겨지고, 이 마이너스의 값을 입력하면, 당연히 마이너스의 결과가 나온다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그렇게 산술적, 기계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똑같이 술, 담배를 해도 어떤 사람은 신체건강도 정신건강도 나빠지는 출력값을 내놓지만, 어떤 사람은 신체건강도 정신건강도 좋아지는 출력값을 내놓을 수 있다. 또 업무 스트레스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생명력을 고갈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생명력을 더 강인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강박증 또한 그 사람의 면역력을 약화시키는 출력값을 내놓기도 하지만,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이 하는 일을 더 완벽하고 정확하게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자신감을 북돋우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처럼 입력 요소가 같아도 주체의 상태에 따라 다른 출력값이 나올 수 있다.
물론 형이상학적 논리라고 해서 이 정도로 단순한 기계적, 산술적 추론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형이상학적 논리는 그것이 유일한 합리적 추론인 듯이 보이기 위해서 훨씬 더 복잡하고 '전문적인' 증명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술, 담배가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마이너스 값으로, 긍정적인 영향은 플러스 값으로 입력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업무 스트레스와 강박증, 어릴 때 환경, 타고난 천성 등도 그 내용을 세분화해서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구분하여 입력한다고 해보자. 그 다음에 해야 할 것은 삶 전체에서 술, 담배와 업무 스트레스, 강박증, 환경, 천성 등등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의 각각의 비중일 것이다. 이런 비중을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가능하다고 치고, 술, 담배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10% 정도라고 하자. 여기에다 술, 담배가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인 마이너스 값을 곱하면, 술, 담배가 건강 악화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가 객관적으로 표시된다. 그런데 같은 식으로 계산해서 이보다 더 큰 수치가 나오는 항목(예를 들어 업무 스트레스)이 있으면, 이 항목이 가장 큰 원인이 되고, 남편과 아내는 더 이상 건강 악화의 원인을 놓고 다툴 필요가 없어진다.
이렇게 전문화된 형이상학적 논리를 사용하면 수식이 좀더 복잡해지고 따라서 결론이 좀더 그럴 듯해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문제는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수치가 과연 '개별적 존재'인 그 사람의 건강 증진에 도움을 줄 것인가,이다. 의사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환자인 당사자는 의사의 결론을 반도 안 믿을 공산이 크다. 형식적 법 조문의 적용을 받는 대부분의 피의자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듯이 말이다. 왜냐하면 이 분석에서는 '주체'라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히 반박할 근거를 대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대다수의 환자와 피의자들은 '그런 일반적 형식 논리는 내게 적용되지 않아'라고 반발할 것이다.
* 그런데 전문가의 영역인 의학영역에서도 이런 형이상학적 추론 결과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실험으로 점검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이 있다. 플라시보 효과는 건강 상태가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약용 성분이 전혀 없는 약(?)을 먹고서나 수술을 받지 않고서도 증상이 호전되는 효과를 말하는데, 이는 결국 '주체'의 심리적 정신적 상태가 신체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플라시보 효과는 어쩌다 나타나는 우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대단히 일반적인 현상이어서, 의약계에서는 신약의 효과를 검증할 때 플라시보 검사도 반드시 병행하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플라시보 효과처럼 주체의 주도성을 일깨워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돈벌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연구가 거의 장려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 파생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당사자들이 마음으로야 이렇게 반발하겠지만, 이 사회에 살면서 이런 형식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여지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피의자들이 아무리 억울해도 판사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을 방도가 없듯이 말이다. 또 기성복을 사 입는 일반 소비자들이 자신의 신체 특징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기성복의 치수에 자기 몸을 맞출 수밖에 없듯이... 결국 본말의 전도, 혹은 주체의 소외 현상이 일어나고, 판결에 억울해했던 피고가 진짜 개전의 정을 가질 리 없으니, 재범의 가능성만 더 커지게 되듯이 문제 해결은커녕 사태는 더 악화된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 분석에 들였던 그 모든 노고와 그 분석된 원인에 따라 이루어진 문제해결을 위한 그 모든 시도의 부질 없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어쨌든 위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그 단편적이고 현상적이고 형식적인 추론 방식 때문에 사회현상의 원인을 규명할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능력이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인과관계로 사람들을 오도(誤導)하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오도는 인간의 '소외'를 낳는다. 형이상학적 형식 논리에서는 의지를 가진 창조 주체로서 인간이 설 자리가 없다. 대신 제대로 입력하면 원하는 결과값이 나오는 기계로서의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창작 활동을 주로 하는 진짜 예술가들은 형이상학적 논리를 싫어한다. 자신들의 창작품이 그런 논리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앞서 이야기한 노예소년더러 넓이가 두 배인 정사각형의 변의 길이를 구하게 할 때, 노예주인인 메논에게 "나는 이 아이를 통해서 학습이" (지식의 입력이 아니라) "회상(기억해내기)이라는 내 말을 증명해보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우선 노예소년이 갖고 있던 선입견, 즉 넓이가 두 배가 되면 변의 길이도 두 배가 되리란 선입견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답이 답이 아님을 알게 되자, 노예소년은 진짜 답을 알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이런 열망이 있는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시 노예소년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졌고, 노예소년은 그 질문들에 대한 답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마침내 애초의 질문에 대한 진짜 답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 노예소년은 자신의 힘으로 답을 찾아낸 것이기에 그야말로 앎의 주체가 되었다.
이처럼 어떤 논리, 어떤 사고방식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인간의 소외를 불러오는 앎의 과정이 될 수도 있고, 인간이 삶의 주체가 되도록 만드는 앎의 과정이 될 수도 있다.
- to be continued -
2015.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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