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원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마음'


변증법 시론(試論)

- 금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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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형이상학적 논리의 모순과 한계 




4-3. 형이상학적 논리의 모순과 한계



요컨대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사회에는 자연계와 같은 형이상학적 인과(원인과 결과)의 법칙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혹은 우리의 현실은 형이상학적 인과관계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원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의 마음은 성장, 발달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건 인간이라는 영적 존재의 정수(精髓)여서, 처음부터 완전체로 존재한다. 그러니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진리를 알기 위해서 뭔가를 배울 필요가 없다. 그냥 가진 것을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 이 때문에 역사상 대부분의 성자와 현자들은 사람들에게 그냥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기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여기에 환경적 시간적 제약 조건은 없다. 다시 말해 고대 사회의 원시 부족민이라고 해서 그 영적 수준이 물질 문명이 발달한 현대의 도시인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자각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인과론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 행동들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는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더러 공부를 시켰기 때문에 아이의 성적이 좋아졌다는 식이다. 그리고 아이의 성적이 좋아졌기 때문에 좋은 대학에 들어갔고, 좋은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좋은 직장에 들어갔고, 다시 좋은 직장에 들어갔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중년 중에 이 인과관계의 고리에 부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보기에는 아마 1%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정도 비중이면 인과성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마지막 결과인 행복한 감정은 직장이나 대학이나 성적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상관이 있는 건 마음이다. 행복한 삶이란 살면서 마음이 행복하고 만족스런 감정을 자주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원인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이다. 그런데 마음이란 건 눈에 보이지도 않고, 같은 요소를 입력해도 사람마다 시기마다 상황마다 출력의 결과물은 달리 나오는, 요상하기 그지없는 장치다. 게다가 내 마음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데, 남의 마음이라면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마음이 모든 것의 원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사람들은 다른 데서 원인을 찾기로 했다. 눈에 보이고, 누구나 알기 쉽고, 권력욕이나 소유욕, 명예욕 같은 인간의 욕심도 합리화시켜줄 명분으로 삼을 수 있는 원인을. 그런데 그럴 듯하고 합리적인 원인, 누구나 납득할 만한 원인을 찾으려니 간단한 물리법칙 같은 인과관계(살인의 의도를 가지면 살인을 하고, 시험 전날 시험에 대비하면 성적이 좋아지고 같은)를 제외하고는 찾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과관계 없이는 자기 행동이나 생각의 명분이 서지 않을 거라고, 남들의 이해와 공감을 구하기 어려울 거라고 여겼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내게 "왜 그렇게 했어?" 라고 물으면, "그냥"이나 "몰라"나 "이유는 없어" 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이러저러해서... 어쩌구저쩌구"하면서 좀더 그럴 듯한 이유를 대는 게 낫다고 무의식 중에 전제한다. 이렇게 해야 자신이 합리적인 인간으로 보이기도 하고, 동조자도 만들 수 있다고 여긴다. 또 어떤 불가피한 원인에 의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식으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느 쪽일까? 진실은 '원인은 없다'이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 내가 기분나쁜 일을 겪었다고 해서 내가 기계도 아닌데 그 이후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쉽게 화를 내고 내가 화를 낸 원인이 '아침의 사건'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나는 핑계를 대는 것에 불과하다. 외부의 자극에 휘둘리는 불안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 말이다.

 

바꿔야 할 것은 불안정한 자신의 심리 상태(마음)이지, 아침의 사건과 유사한 일이 일어나는 걸 막는 게 아니다. 하지만 마음의 문제라면 외면하기로 작정한 우리는 그외에 할 수 있는 다른 일, 즉 아침의 사건과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만드는 데 신경을 쓰기로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침의 사건을 안 좋은 결과(내가 화를 내게 된 것)의 원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그런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허구의 인과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신까지도 세뇌시킨다. 처음에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변명으로 그 이유(원인)를 내세웠다. 그러자 상대방이 어느 정도 나를 '이해'해주고 잘못된 나의 행동에 대해서도 용서 받는 효과를 거두었다. 나의 이유가 다른 사람에게도 '통했다'. 말하자면 그는 내가 내세운 원인을 합리적인 원인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이제 나는 내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그럴 듯한 원인을 제시하는 게 잘못에 대한 나의 책임을 감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짓말을 자꾸 하다 보면 자기 자신도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여기게 되듯이, 이 경우도 처음에는 변명거리로 내세운 이유가 나 자신에게도 진짜 원인인 듯이 여겨진다. 일종의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듯이, 어떤 행위의 원인, 어떤 판단의 근거, 어떤 감정의 이유는 외부가 아닌 자기 안에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3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대부분 자기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고른다. 그런데 왜 그것을 골랐냐고 물으면, 어른이 기대하는 식대로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자기 마음이 끌리는 것을 골랐으니,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이와 달리 어른이 되면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그럴 듯한 이유(근거)를 갖다 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른도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어떤 결정이나 선택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근거의 타당성이 아니다. 자기 마음이 끌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선택하고 나중에 그 선택에 대한 그럴 듯한 이유나 근거를 갖다 붙이는 것이다.

 

이념의 선택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보수든 진보든 자신이 택한 입장이 더 타당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선택(끌림)이 먼저 있고, 그런 다음 양쪽의 논리를 비교하면서 자신이 이미 내린 선택의 그럴 듯한 논거를 쌓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토론을 하고 논쟁을 하고 설득을 해도 한 번 정해진 입장이면 잘 바뀌지를 않는 것이다. 겉으로 내세우는 근거와 다른 이유에서 그 선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사고에서는 원인 없이 어떤 결과가 나왔다는 발상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2차원적인 극단주의를 막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 마음이 끌려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하면, 저열한 심성을 가진 사람의 선택이든 고귀한 심성을 가진 사람의 선택이든 똑같이 대우받는 것이 되므로, 선과 악의 구별, 진실과 거짓의 구별,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 등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미덕의 가치가 일거에 무너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얼핏 보기에는 자명한 진리처럼 보이는 3단 논법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교하게 다듬은 이유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소피스트의 궤변 같은 엉터리 형이상학 논리가 근절되지 않으면 자칫 비이성적이고 야만적인 세상이 펼쳐질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3단논법을 제대로 적용하는 것, 다시 말해 논리적 완벽성이 어떤 것인지를 친절하다고 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형이상학적 논리를 제대로 적용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물론 앞에서 말한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진시황은 사람이다'-'고로 진시황도 언젠가 죽는다' 같은 삼단논법이라면, 이런 자명한 사실을 굳이 이론이라고 내세우는 게 오히려 우스워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는 이렇게 심플하게만 작동하지 않는다. 외견상으로는 복잡하지만 그 본질에서는 지극히 단순한 현실을 복잡한 현상에 속기 쉬운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교묘하게 비틀고 왜곡시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왜곡을 간파할 수 있는 무기로 제시한 것이 삼단논법이다. 그리고 이 무기는 궤변이나 흑백논리를 깨는 데 나름의 효과가 있다. 이 점에서 형이상론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만일 위의 내 이야기가 잘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든 예문은 아니지만, 다음 문제들을 한 번 풀어보기 바란다. 그렇게 해보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인 우리가 2500여년 전 사람이 제시한 기본적인 사고 규칙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살고 있음을 실감할 것이다.


 

삼단논법 도전 문제 :


다음 추론에서 대전제와 소전제가 모두 참이라고 가정할 때, 각각의 진술은 참인가, 거짓인가?

 

1. 만약 인간이 원인이 된 지구온난화 현상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다면, 북극 빙산의 꼭대기는 녹아내릴 것이다.

북극 빙산의 꼭대기는 녹아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원인이 된 지구온난화는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참 / 거짓 

 

2. 만약 침술이 사람들을 병나게 하는 경향이 있다면, 침을 맞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침은 사람들을 병나게 하는 경향이 없다.

그러므로 침을 맞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다.


참 / 거짓 

 

3. 만약 6시까지 집에 도착하지 않으면, 뉴스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6시까지 집에 도착하면, 뉴스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참 / 거짓 

 

4. 만약 열심히 공부하면 나는 시험을 통과할 것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나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참 / 거짓

 

5. 모든 인간은 나쁜 놈들이다.

어떤 나쁜 놈들은 매력적이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은 매력적이다.


참 / 거짓

 

6. 모든 정치가는 거짓말쟁이다.

품위를 갖춘 인간 중에 정치가는 없다.

그러므로 품위를 갖춘 인간 중에 거짓말쟁이는 없다.


참 / 거짓

 

7. 모든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신의 모든 창조물은 신성하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생명은 신의 창조물이다.


참 / 거짓

 

8. 모든 사람은 우주의 자식이다.

모든 사람은 빛과 희망의 존재다.

그러므로 빛과 희망의 모든 존재는 우주의 자식이다.


참 / 거짓

 

9. 완벽채식주의자는 계란을 먹지 않는다.

계란을 먹는 사람 가운데 일부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일부 채식주의자는 완벽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참 / 거짓

 

10. 오늘은 화창하지도 춥지도 않다.

오늘은 화창하지 않다.

그러므로 오늘은 춥다.


참 / 거짓

 

- 줄리언 바지니, 제러미 스탠그룸 저, 『호모 사피엔스, 퀴즈를 풀다』에서


 

문제를 풀면서 헷갈리지 않았는가? 만약 헷갈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변증론자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철저한 형이상론자이거나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빠질 위험성이 농후한 불철저한 형이상론자이다.(답은 다음번 글에서)

 

이처럼 현실에서 분리된 수학 시험문제처럼 고려해야 할 조건과 전제가 명확하게 주어져 있는 경우에도, 우리는 이 변수들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조립해야 할지 허둥댄다. 우리의 사고방식에서는 추론 과정 자체의 논리성이 확실하게 담보되지 않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추론 방식에 숙달되지 않은 것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을 방해하는 것은 우리의 '선입견'이다.

 

예를 들어 1번 문제의 경우, 헷갈리는 이유는 인간이 원인인 지구온난화가 전개되고 있다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이다. 이런 선입견이 있는 사람은 앞의 두 전제에 비추어 진술이 타당한지를 판단하기보다, 전제에 관계없이 이 진술은 '참'이라는 선입견이 앞선다. 그래서 추론의 논리성으로 따지면 이 진술은 거짓인데, 진술 자체가 '참'이라는 선입견을 배제할 수가 없어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입장이 다른 두 사람 혹은 두 집단이 똑같은 전제를 놓고 서로 다른 결론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일은 현실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 억지와 고집만 부리지 않으면, 대화와 추론과정에 대한 세심한 검토를 통해 합의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이 추론 과정에서의 오류이다. 마치 수학 문제를 해결하듯이 말이다. 수학 문제에서 두 사람의 답이 다르다면, 한 사람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거나 둘 다 틀렸거나일 것이다. 하지만 수학 문제라면 마침내 정답이 밝혀질 것이고, 애초에 틀렸던 사람도 자기 추론 과정의 오류가 밝혀지면, 억지와 고집을 버리고 승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수학문제가 아니더라도 추론 과정에서의 오류라면 결국 이런 식으로 합의에 이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은  추론 과정에서의 오류를 밝혀주는 강력한 무기여서, 적어도 의견의 차이가 추론 방식의 차이에서만 기인하는 경우는 통합과 합의를 촉진시켜주는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방식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게다가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느니, 차라리 궤변론자가 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추론 과정상의 오류가 드러날 것 같아지면, 애초의 전제가 잘못 되었다는 쪽으로 쟁점을 바꾼다.(처음에는 양쪽 다 전제들이 참이라는 데 동의했다는 걸 상기할 것.) 

 

전제의 참과 거짓은 연역법인 삼단논법과 달리 귀납법으로, 다시 말해 현상에 대한 관찰로 확정되기 때문에 반대되는 현상적 증거가 하나라도 있으면, 참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나마 자연현상의 경우에는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에 참과 거짓이 상대적으로 쉽게 구별이 되지만, 사회현상의 경우에는 그 판단에 각자의 관점과 가치관이라는 주관성이 개입하기 때문에 전제 자체에 동의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어 정부와 여당, 야당은 우리 경제가 문제 상황에 처했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 한다. 하지만 어떤 측면을 문제 상황으로 볼 것인지, 또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어떤 경제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견해를 달리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한국경제'라는 같은 현실을 놓고 판단하는 것이니 적어도 현실 판단만은 같아야 한다. 하지만 같은 통계를 보고서도 입장이 다르면 다른 해석이 나온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형이상학적 논리의 또 다른 부분인 귀납법에 대해서조차 충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귀납법이란 각각의 특수한 경험적 사실에서부터 공통된 일반성을 찾아내어 보편적 일반적 원리에 도달하는 추론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귀납법은 누구나 참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모든 관련 요소를 다 확인할 수는 없다는 단점이 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제시한 경제 현상들이 경제 상황의 일부 측면인지, 아니면 전체적 경제상황으로 볼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통계학이 발달하면서 귀납법의 이런 단점이 어느 정도 보완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귀납법만으로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론 부분이라고 해도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을 밝혀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어쩌면 각 세력이 주목하는 각각의 부분 현실들을 합하면 전체 현실이 드러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귀납법에 따르면 이렇게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특히 사회 현상을 놓고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예를 들어 보수는 자본의 투자여건에만 주목하고, 진보세력은 노동의 소비여건에만 주목한다. 이 둘을 합치면 내수시장이 침체되어 있으니, 자본은 여력이 있어도 투자를 하지 않고, 자본이 투자를 하지 않아 고용이 늘지 않으니 내수시장은 더 침체되는 전체적인 현실(일종의 악순환)이 나오지만, 이렇게 전체적이고 객관적인 상황 평가가 되면, 자칫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지 못할 위험이 있다고 염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논리에 불철저하면 존재하는 현실조차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일까지 벌어진다.(대개는 이렇게 극단적이기보다는 마지못해 인정하는 식이 되지만...) 

 

이런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경우들보다는 형이상학적 논리가 더 객관적이고, 더 체계적이고, 더 순수한 건 분명하다. 따라서 사람들이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하고,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에 숙달되는 건 나쁘지 않다. 사실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인류가 야만적인 흑백논리에 빠질 위험에서 어느 정도 구해주었을 뿐 아니라, 인류에게 과학기술 문명을 가져다주었고, 민주주의의 토대인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이라는 형식적 평등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의 한계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선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으로는 '창조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이 이해하는 인간은 입력(원인)에 따라 출력(결과)이 결정되는 기계적 인간이다. 예를 들어 형이상학적 사고에서는 죄를 지었을 때 벌을 주면 범죄행위가 줄어들 것이라고, 엄하게 처벌할수록 그 효과가 더 클 것이라고 추론한다. 하지만 이는 증명되지 않았고, 실제로는 오히려 역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으로는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형이상학적 논리가 적용되는 사회일수록 인간의 소외가 일어나는 것이다.

 

또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으로는 정작 중요한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아니, 중요한 문제들만이 아니라 인간과 관계되는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인간 자체가 모순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도 해결할 수 없고, 과학기술과 윤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전쟁과 평화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으며, 창과 방패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이 전체적으로 파악된다고 해도,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끊을 것인가 하는 해결책은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에서는 쉽게 나오지 않는다. 또 다른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베이징에서 펄럭인 나비의 날개짓을 포함하여 모든 요소를 다 분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선에서 결정이 필요하다. 그러니 이 때 내리는 결정은 형이상학적 분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직관'과 '의지'라는, 다른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오히려 형이상학적 논리는 이 결정을 합리화시켜주는 도구로 이용될 뿐이다. 

 

이처럼 형이상학적 논리는 겉보기에는 대단히 완벽하고 체계적이고 전체적인 것 같지만, 그 유용성은 대단히 부분적이다. 그런데도 현대문명에서는 이 형이상학을 유일하게 신뢰할 만하고 합리적인 세계관인 듯이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을 유일하게 합리적인 세계관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에 지배당하는 동안, 우리는 정작 알고 깨우쳐야 할 다른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주체로서 '인간', 그리고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사고방식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음 글들에서는 어떻게 해야 변증법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지, 삶을 살아가는 데 어떤 유용성이 알아보기로 하자.

 

2015. 3. 23. 



날짜

2015. 3. 2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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