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둘 때, 오히려 모든 것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변증법 시론(試論)
- 금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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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가지려면 - 거리 두기를 하고, 모순을 이해하라 |
5-1.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가지려면
- 거리 두기를 하고, 모순을 이해하라
'모순'이란 고사성어의 유래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의 전국시대에 초나라 상인이 창과 방패를 팔았는데, 그는 창을 팔 때는 "이 창으로 못 뚫는 방패가 없다"고 했고, 방패를 팔 때는 "이 방패로 못 막는 창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구경하던 사람이 "그럼 그 창과 그 방패가 부딪히면 어느 쪽이 이기는 거요?"라고 묻자, 상인은 대답을 못했다는 일화이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모순이란 말을 "어떤 사실의 앞뒤, 또는 두 사실이 이치상 어긋나서 서로 맞지 않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해왔다.
그런데 이 모순이란 말은 3차원적 사고방식인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위의 창과 방패가 부딪히면 '실제로는' 양쪽 다 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쪽도 이기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이기고 진다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위의 창과 방패보다 더 단단한 물질인 다이아몬드의 예를 들어보면 분명해진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로 인정받는 것이 다이아몬드(금강석)이다. 그렇다면 이 '가장' 단단한 물질을 무엇으로 다듬을 것인가? 만약 다듬지 못하고 자연에서 주어진 원석 그대로, 혹은 결에 따라 쪼개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면, 아무리 단단한 물질이라도 그 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변질되지 않으면서 원하는 대로 변용이 가능한 금보다 더 못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다 17세기 이태리에서 다이아몬드의 연마법이 개발되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의 가루로 원석 다이아몬드를 연마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가루라고 해도 같은 경도(硬度)를 가졌으므로 서로에게 손상을 줄 수밖에 없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연마 효율을 높이기 위해 가루에 올리브 기름을 섞는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을 이기려면, 한쪽이 먼저 가루가 되어 다이아몬드로서 자신의 가치를 내려놓아야 한다. 일종의 살신성인인 셈이고, 죽은 자가 산자를 이기는 원리이다.
보다시피 현실에서는 모순도 없고 이기고 지는 것도 없다. 모순이 있고, 이기고 지는 승부가 있는 곳은 인간의 머릿속이다. 그래서 변증법적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은 없고, 이기고 지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혹은 모순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인식할 필요는 없고, 중요한 건 이기거나 지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면 된다.
그런데 헤겔이 밝혔듯이 세상의 모든 변화와 갈등은 '모순'이라는 존재 없이는 설명하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비민주적 독재사회가 있으면 시민들의 민주 사회에 대한 열망과 모순되기 때문에, 독재사회는 시민혁명을 통해 민주사회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는 식이다. 만일 독재사회 내에 아무런 모순이 없으면 독재사회가 민주사회로 변화 발전할 이유도 없다.
이렇게 사회나 개인의 변화와 발전의 주원인 혹은 동력으로서 '모순'의 존재를 가정한다면, 뭐, 크게 틀린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온갖 생명체들을 포함하여 이 세상은 변화무쌍하고, 이렇게 세상이 변화무쌍한 것은 서로 반대되는 힘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이 서로 반대되는 힘들의 작용을 모순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순에 중점을 두면 변화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변화의 방향을 예측할 수는 없다. 또 모순을 반대되는 힘들의 충돌로 여기기 때문에 모순의 해결책을 이기고 지는 승부가 있는 '폭력적 방법'에서 구하기 쉽다는 단점이 있다.
창과 방패의 예에서 보듯이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창과 방패가 부딪혀 보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양쪽의 세력이 팽팽하게 같으면) 둘 다의 패배일 테고 말이다. 설사 어느 한쪽이 일시적으로 승리한다 해도 이런 폭력적 충돌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상처뿐인 승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순, 다시 말해 변화의 원인에 방점을 찍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는 앞에서 사람들이 설정하는 대부분의 '원인-결과, 즉 인과관계는 타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선 도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컨대 역사의 변화를 마르크스식으로 항상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보거나, 헤겔식으로 정-반-합의 과정을 통한 개념의 성장 발전으로 보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고, 기타 여러 교조적 이념의 한계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 말하자면 선입견에서 일정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선입견에서 벗어나면, 섣부른 편들기나 섣부른 일반화를 그만두고 '거리 두기'를 한 상태에서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즉 무위(無爲)와 흡사해보이는 관찰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창조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관찰 자체가 갖는 소극적 창조로서의 의미이고, 둘째는 올바른 관찰이 가져다주는 문제해결, 즉 적극적 창조로서의 의미이다.
관찰한다는 건 판단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흔히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어떤 것이라도 하는 게 낫다고 여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잘못된 개입보다는 개입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미 순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리에 역행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이다. 순리에 역행할 때 자기 자신과도 다른 사람과도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그러면서 자기 자신과도 다른 사람과도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는 적어도 순리에 역행하지는 않고 있다는 의미이며, 파괴가 아닌 창조에 일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둘째로, 선입견 없이 관찰을 한다는 건 '거리 두기'를 한다는 의미여서, 그 사건의 상태나 변화의 과정을 전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고, 이렇게 되면 소위 '모순'의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니까 얼핏 보기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 동어반복이지만, 거리를 두고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이 때의 해결책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다. 상황이 순리대로 흘러가도록 물꼬를 틔워주는 것이다. 그 방법이 소위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든, 아니면 '원인'과 관계 없는 다른 해결책이든.)
흔히들 자본과 노동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계급투쟁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자본과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동운명체이다. 자본이 살기 위해서는 노동이 살아야 한다. 노동자 계급이 살아 남기 위해서도 자본가 계급이 살아남아야 한다.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을 없애고 공산주의 사회를 만든다지만, 이렇게 되면 노동자 계급도 소멸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 아닌 다른 모순이 전개된다.
다른 한편에서 자본주의 사회에는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 아닌, 다른 모순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소생산 영역이나 대안적 생활방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소비 방식이 포괄하지 못하는 영역(혹은 쁘띠 부르조아적 생산양식이라고 부르는 영역)이다. 본래 한 사회의 주요 모순의 한쪽 주역이었던 계급이 그 다음 사회의 주역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예를 들어 고대사회에서 봉건 사회로 옮겨갔을 때, 주역은 노예가 아닌, 전혀 새로운 계급인 농노였고, 봉건 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옮겨왔을 때 주역은 농노가 아닌, 전혀 새로운 계급인 자본가였다. 그 전 사회에서 한쪽 주역인 계급이 그 다음 사회에서 주역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다른쪽 주역과의 공동운명체성 때문이다.
그러니 현실은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여름이 있으면 겨울이 있다. 어느 한쪽이 심하게 과해지면 흐름이 막히 거나 왜곡과 편중이 일어나면서 전체가 같이 몰락한다. 거리를 두고 관찰을 하면 전체적인 흐름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러면 자동으로 어떤 식으로 해야 문제가 해결될지도 보인다. 또 전체적인 흐름이 보이면 앞으로의 전개를 어느 정도 예견하는 것도 가능하다.
반면에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모순'되는 두 명제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예를 들어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노동자'에게 이로운 정책이 '자본가'에게도 이로운 정책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또 성공이 아닌 실패가 그 사람에게 더 이로울 수 있다는 주장도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이해당사자, 즉 모순의 주역들은 이런 주장을 절대 받아들 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해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이런 '모순된' 주장이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주역이 아니기 때문에 거리 두기를 해서 객관적 전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부 선진국들에서 이루어진 귀족이나 상류층의 자발적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그 당장은 자산가가 손해를 보고 서민층이 혜택을 입는 행위인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나라 국민들로 하여금 자산가에 대한 반감을 완화시키고, 국가 전체적으로는 계층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을 감소시킴으로써 해당 국가의 자산가들은 더 안정적으로 자신들의 경제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또 부모는 기겁을 할 수 있지만, 교사들이라면 누구나 내실 없이 기고만장한 학생의 경우에는 성공보다 한 두번의 실패가 그 학생의 인생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변증법적 인식을 한다는 건 자신의 문제, 자신이 한쪽 주역일 때에도, 아니 특히 그럴 때 상황을 객관적, 전체적으로 조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만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이로운 해결책, 갈등과 모순을 확대시키지 않고 감소시키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독일 통일을 일궈낸 폰 바이체커 독일 전 대통령 이나 인종차별 철폐와 국민화합을 동시에 일궈낸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처럼 자기 당파의 당장의 이해관계에 갇히지 않고, 나라 전체의 이해를 우선하는 지도자가 훌륭한 지도자이듯이, 이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러하다. 남편이나 아내가 남편이나 아내로서의 자기 이해관계를 넘어서 가족 전체에 바람직한 입장에 설 때, 그 가족이 장기적으로 안정되고 건강해지듯이, 회사나 학교, 동료 관계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모두에게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도, 당장의 이해관계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는 서로 상대방 탓을 하거나 서로가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고집하는 경우보다 더 설득의 여지가 있다. 또 끝까지 설득이 되지 않더라도 같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 들면 양보할 수도 있다. 어차피 장기적인 비전에서 제시한 방향이니, 꼭 지금 당장 실천되지 않아도 변화의 필요성은 앞으로 더 커질 테고, 한쪽이 양보를 하면, 상대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설득당할 가능성도 더 커질 수 있다.
보다시피 변증법적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당장의 이해관계를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식견과 공정함의 미덕을 가져야 하고, 무엇보다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명예든 소유든 권력이든 애정이든, 결핍감에서 비롯된 집착하는 마음은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기가 힘들다. 거리 두기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변증법적 사고방식은 인간의 심리와 만나고 세계관과 만난다. 그래서 다음 번 글에서는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기 위해서는 '솔직함'의 미덕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할 생각이지만, 여기에서는 일단 이번 글을 마무리하자.)
원인으로서의 모순에만 주목하는 것, 이기고 지는 승부에 집착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거리 두기를 방해한다. 나는 앞의 글에서 변증론자들은 "3차원 세상 속에 있기도 하지만, 3차원 세상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입지에 설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위에서 판단을 내리기 전에, 혹은 해결책을 찾기 위해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의 건설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집착이 강해서 거리 두기를 하기가 힘든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내가 추천하는 한 가지 방법은 형이상학적 모순 명제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는 명제는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절대 명제를 부정할 수 없기에, 받아들이기는 힘들어도 이해가 되는 모순 명제이다. 그렇다면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은 같은 것이다" 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모순 명제는 이해가 되는가? 아마도 이 오르막길을 인생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시간이라고 여기면 이 모순명제도 이해가 될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삶의 사다리를 오를 때 반드시 내려오는 것에도 대비를 하게 마련이다. 또 "인간은 이 세상 속에 있지만, 이 세상 출신은 아니다"는 모순 명제는 어떤가? 또 "밀어낼수록 다가온다"는 명제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명제, 혹은 신은 "모든 곳에 편재하니, 어디에도 없다"는 명제는? 이런 모순(명제)들을 외면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다 보면 거리 두기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삶에 대한 집착이 느슨해진다.
그러니 해결책은 세상의 모순에서 갈등과 투쟁을 보는 데 있지 않고, 모순 상황이 빚어내는 그 에너지와 동력이 세상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고 즐길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걸 이해하는 데 있다. 여기서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모순이 발생한다. 즉, '거리 두기는 삶의 방관자가 아니라 가장 능동적인 창조자를 낳는다'는. 과연 그러한지 한 번 상상해보시길...
201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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