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 시론(試論)
- 금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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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5-3.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가지려면
-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변증법적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건 흐름을 보는 것이다. 그 흐름을 헤겔이나 마르크스식으로 역사의 발전을 전제로 하는 정반합으로 보든,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역사의 발전과는 무관한 끊임없는 변화로 보든, 현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변화가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 변증법이다.
정치 이념에서 과거를 지향하고 현실을 고정시키려는 보수와 달리, 진보는 미래를 지향하고 현실을 변화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변증법적 사고에 상대적으로 근접한다. 하지만 진보 이념 또한 현실을 변화시켜 고정된 미래를 만들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보면 변증법적이지 않다. 사실 정치이념은 지지자들을 모아 세를 이루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주장이나 입장대로 하면, 확실한 결과가 보장된다고 해야지, 만일 모든 가능성이 다 열려 있다고 하면, 누가 그 이념을 따르겠는가 말이다. 이 면에서 정치 이념이란 건 본래 '과학적'이지 않다.
아마도 삶이란 게 어떤 식으로든 끊임없이 변한다는 데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조차 끊임없이 변화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물리적인 면에서. 우선 수명이 40일밖에 되지 않는 우리 몸의 세포들 중 40분의 1은 바뀌었고, 어제와 오늘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기억을 포함하여 우리의 정신도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다. 주변 사람들도, 그리고 집단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환경도 변했다. 자연도 어제의 날씨와 오늘의 날씨가 다르고, 봄이 시작된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생명체들이 싹을 틔워 우리 눈에 보이는 풍경까지도 바꾸고 있다.
입자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나'라는 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물리적인 측면에서는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당신은 얼마나 인정하고 있는가? 아마도 당신은 어제의 당신과 오늘의 당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SF 영화나 소설 중의 한 단편으로 보이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텔레포트 되어 다른 시공간으로 가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자신을 텔레포트 시킨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고 한다. 그 회사가 과거의 자신을 살해 내지는 소실시켰다는 이유로. 텔레포트를 하게 되면, 두뇌를 포함하여 자기 몸에 저장된, 일종의 정보가 전송된다. 그러니 텔레포트 되어 재생된 그 육신은 똑같은 자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보의 해체 전송 과정을 통해 자기로서의 '연속성'이 끊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도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을 고정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을 더 편해한다. 준거점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라고 하면, 그 사람은 자신이 카오스 상태에 직면할 거라고 예상한다. 혼돈 상태에서는 비상할 수도 있지만, 추락할 수도 있다. 우리 마음은 존재 자체가 소멸할 수도 있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고정된 틀, 준거점을 붙드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자유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와 다르다면, 오늘 내가 고수하려는 '나'는 어떤 나인가? 나는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라는 존재가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이야기인가? 만일 어렸을 때의 '나'와 나이 들어 늙은 '나'가 같은 '나'라면, 신체적 동질성이 유지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철 모르는 어린 아이 때의 사고와 어른이 되었을 때의 사고가 다르다고 하면, 정신적 동질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연속성 혹은 고정불변의 실체로 전제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위 말하는 영혼? 아니면 뇌과학으로도 밝혀내기 힘든 우리의 무의식?
왜 대다수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변화와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아 정체성을 고정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는지 그 메카니즘을 밝히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는 검토해볼 수 있다. 그 결과 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포함하여 사람은 바뀌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외부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도 우선 인정하기가 어렵고, 설사 변화된 상황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기는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어떤 변화든지 간에 '변화'를 싫어하게 되었다.
희안하게도 사람들은 오늘도 어제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 한다.(물론 오늘은 어제와 다른 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싶어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특히 아직 사고의 틀이 잡히지 않은 아이들이나 청년들의 경우에는.) 관성이 붙어서일까? 아니, 내 보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여겨서인 듯하다. 어제 그렇게 했을 때, 반드시 최선이나 최고의 상황을 불러온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위험하거나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 모르는 '새로운' 행위, '다른' 행위를 하는 것보다는 안전한 '익숙한' 행위가 더 낫다는 식이다.
그런데 똑같거나 비슷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다 보면, 사람은 타성화된다. 타성화된 자신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뻔하니, 성취의 기쁨도 없고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진다.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은 위험스럽게 여겨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으니, 자극도 없고, 신선함도 없고, 즐거움도 없어진다. 삶과 세상이 식상한 것으로 변한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식으로 행동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상대방의 다음 행동도 예측이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라고 자신의 선택이 옳은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긴다. 만일 자신의 예측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미친 사람', '정신 나간 인간'이 된다. 이들의 동지는 항상 뻔하고, 이들의 적 또한 항상 뻔하다.
자신의 타성화된 사고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기적이나 신비 현상, 심지어 이상 현상이 발생해도 이들은 이런 이상한 현상에 익숙해질 때까지, 이 이상한 현상을 외면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개과천선하여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더라도 그런 변화를 믿지 않는다. 또 멀리서 오는 배가 돛대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몸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를 보여주어도 누군가가 보물을 가지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오기 전에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여전히 믿는다. 이들은 지나온 역사에서 보면 한 때의 도덕이나 가치, 유행에 불과했던 것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내재화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 사람들은 왜 사회의 피지배층이 지배자들의 동조자 내지는 하수인이 되는지 궁금해한다. 분명히 계급적 계층적 이해관계가 다른데 말이다. 예를 들어 보수임을 자처하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눈에 띄게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고 그 정치 기반을 이에 두고 있다. 그런데 왜 부자도 아닌 사회의 서민층과 하층들이 이런 보수 정권을 지지할까? 소위 진보주의자들은 이들이 보수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속아서 그런 것이라 여길 때가 많지만, 내 보기에 보수와 피지배층이 같은 이해관계를 갖는 지점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다. 피지배층은 현실이 아직 참을 만한 상황에서는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물론 현실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다르지만.) 말하자면 자칫 개혁이나 혁명이 불러올 수 있는 '혼란'보다는 최소한이라도 생존에 대한 담보가 더 낫다고 여긴다.
반면에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는 경우는 두,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본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거나, "예측 불가"라고 평가한다. 이런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이나 직업 개그맨들처럼 새로움의 추구를 삶의 과제로 삼는 사람들이다. 또 예술적으로 상상력과 창의력이 뛰어나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 사람들도 이 유형이다.
두 번째는 식상해진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경우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면서 한두 번 이상씩은 이런 경험을 갖는다. 하지만 이들의 목표는 첫번째와 달리 변화 자체가 아니다. 이들의 목표는 자신에게 자극도 되고 견딜 만하기도 한 새로운 틀, 말하자면 새로운 안정을 찾는 것이다. 독신이면 결혼을 하고, 기혼이면 이혼을 하거나 재혼을 하고, 직업을 바꾸고, 몰두할 만한 새로운 취미를 갖고, 아니면 종교나 이념 등 삶의 새로운 방향타를 갖거나...
세 번째는 자기 정체성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습관이 주는 안정성도 무시하지 않지만, 새로움이 가져올 혼란에 대해서도 겁먹지 않는다. 두 번째 경우와 다른 것은 이들은 어쩔 수 없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거나 그럴 기미가 보일 때, 변화를 의식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흔히 다른 사람보다 한두 발 앞선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상황을 키우지 않는다. 또 르네상스 시대처럼 시대 문화 자체가 새로움이 장려되는 시대에는 상당수의 지성인들이 새로운 발견 발명에 몰두하기 때문에 이 유형은 마치 첫번째 유형과 비슷해보이기도 한다.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기에 가장 가능성이 큰 쪽은 세 번째 경우의 사람들이다. 요체는 변화에 겁먹지 않는 것,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자기 삶의 주역이나 역사의 주체는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반복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왜 이런 사람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더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하면, 현실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고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자연에도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계절의 변화가 있고, 날씨의 변화가 있고, 생태계의 변화가 있고, 생물종의 변화가 있고, 개개 생명의 탄생과 성장, 죽음이라는 변화가 있고, 한 행성으로서 지구의 변화가 있고, 물 분자의 변화에서 보듯이 미시 세계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 자신도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한다. 집단의식도 계속 바뀌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환경도 계속 변화한다. 국가나 사회라는 유기체의 상태도 변화하며, 각 시점마다 문제의 핵심 해결고리도 바뀐다.
이런 상태에서는 어떤 것을 붙잡아 고정시키는 것이 변화를 따라가는 것보다 더 힘이 들고 비효율적이다. 붙잡고 고정시키는 것은 단순한 에너지 낭비 이상이다. 전체가 흐르고 변하는데, 무언가를 붙잡고 고정시키다 보면, 이 힘은 흐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변해, 흐름을 폭력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앞의 글에서 상황에 섣불리 개입하는 것이 오히려 그냥 내버려두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보다는 거리두기를 하고 관찰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렇게 되면 상황을 좀더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어떤 구체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는 것도 상황을 붙잡고 고정시키는 행위의 하나인데, 예를 들어 나는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들이 대통령이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내걸었던 중점 정책 과제들이 하나같이 실패로 끝난 것을 생각하면 이따금 실소를 금치 못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서민적 대통령답게 주택 가격의 상승을 막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참여 정부 때 주택 가격은 그야말로 폭등을 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 대통령답게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루어 주가 지수를 5000 이상으로 올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 코스피 지수는 아주 잠시 2000에 턱걸이를 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박근혜 정부 또한 경제를 살려 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자신했지만, 현 정부 하에서 국민 대다수는 과거 어느 때보다 희망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것들도 집착하고 매달릴수록, 말하자면 상황을 붙잡아 고정시키려고 할수록 힘만 많이 들고 그 성과는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사가 고정되지 않고 항상 변하므로 어떤 미래도 함부로 장담할 수 없다는 진리를 확실하게 이해하면, 오히려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지금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다. 이 상황을 고정된 것이나 바꾸기 힘든 것으로 보는 사람보다는 이 힘든 상황도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며, 나아가 오히려 이 힘든 상황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상황을 고정된 것으로가 아니라 흐름으로 이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만사를 흐름으로 보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덜 힘들어하고 덜 절망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킴으로서 그 사람의 마음도 사고틀도 훨씬 더 유연하고 개방적이 된다.
이런 유연하고 개방적인 마음은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수용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된다. 앞에서 변증법적 사고방식은 현실을 회피하거나 선입견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현실의 본질이 끊임없는 변화라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변증법적 사고방식이란 어떤 변화도 포괄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사실 변증법적 사고방식이란 모든 변화, 다시 말해 모든 운동을 포괄하는 그릇, 혹은 사고틀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면, 그 변화의 최종 종착점의 내용물(헤겔과 마르크스식 변증법에서 '합'이라고 하는)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최종 종착점이란 없으니, 목표 달성이란 것도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형이상학적 논리에서는 과정보다는 목표를 중시하지만, 변증법에서는 과정이 더 큰 범주여서 목표조차 과정이다. 따라서 변증법에서 중요한 것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목표는 과정의 방향을 설정해주는 것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론, 즉 대화법을 보면 목표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 잘 드러난다. 앞의 노예소년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나듯이, 중요한 것은 노예소년이 마침내 답을 찾아내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노예소년이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이런 식으로 대화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방에게 자신의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알아내기를 요구하지 않고, 상대방이 지금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벗어버리도록 만드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이렇게 '과정'을 중시하다 보면 정신세계에서 이야기하는 '지금 이순간에 살아 있기'가 어떤 것인지 이해된다. 이 점에서 변증법은 동양철학과 연결된다.)
그런데 이렇게 가만히 내버려둬도 세상 만사는 다 변하게 되어 있다고 하면 삶의 주체, 창조의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은 어디에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동물처럼 변화에 순응하는 것 외에 달리 무슨 할 일이 있겠느냐고... 하지만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는 우선 고도의 지적 존재인 인간은 이 변화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함으로써.
석가모니 부처는 이 변화하는 세상의 이치를 다르마(법)라고 표현했다. 석가모니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많은 성인과 현자들도 자신이 이해한 세상의 이치, 우주의 법칙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또 철학자들을 비롯한 지식인과 학자들, 그리고 특정 분야를 마스터한 사람들도 자신이 이해한 삶의 법칙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으로 전하고자 했다. 후세의 우리는 이들이 전해준 가르침과 명언과 속담 등등과 또 우리의 직접 경험을 통해 삶의 이치와 세상의 법칙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사실 내 보기에는 전해 내려오는 지혜로운 가르침들이 모자라서 우리가 삶과 세상과 우주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우리가 그들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를 못하거나 혹은 안 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들 대다수는 여전히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 이렇게 세상 운행의 법칙을 이해하고 나면, 그 다음에 주체로서 우리가 무엇을 할지는 아마 저절로 보일 것이다. 아마도 우주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것이 우리 인간이 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나 현자가 아닌 대다수 사람들은 설사 세상만사가 끊임없이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다음에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파악하고 이에 대비하기는 힘들 것이다.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가져도 할 수 있는 최대치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빨리 조짐을 읽어내는 정도일 것이다. 다만 변증법적 사고방식은 변화를 전제로 상황을 보기 때문에 어떤 새로운 조짐 혹은 징후가 나타났을 때, 현재는 미약하고 부분적인 그 조짐이 앞으로는 더 강화되고 나아가 대세가 될지 여부를 다른 사람보다 좀더 빨리 파악할 것이다. 말하자면 예언자가 아닌 이상 미래를 미리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닥쳐올 사태에 대비하거나 닥쳐올 사태를 피할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남에 대해서도 그리고 외부 상황이나 징후들에 대해서도 선입견 없이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색안경을 끼고 있으면 현실도, 현실의 변화도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객관적이고 솔직하게 현실을 보지 않고 자기 나름의 선입견으로 현실을 보면, 아무리 변화에 주목하고 과정에 의미를 부여해도 거기에서 도출되는 최종 판단은 아전인수식 해석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2015.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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