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 시론(試論)
- 금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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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가지려면 - 당신은 얼마나 솔직한가? |
5-2.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가지려면
- 당신은 얼마나 솔직한가?
솔직성의 면에서 놓고 보면 가장 불리한 것이 3차원적인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이다. 3차원적인 사고방식은 2차원적인 평면적 사고방식이나 4차원적인 변증법적 사고방식보다 솔직하지 못하다. 왜 그럴까? 3차원적인 사고방식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인데, 왜 솔직하지 못한 걸까?
대표적인 2차원적 사고방식인 극단주의가 감정과 행동의 일치 하에 이루어진다는 건 이해가 갈 것이다. 2차원적인 사고에서는 독단적 판단이 있을 뿐 논리는 없다. 따라서 가식이나 위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들의 욕구나 감정은 그대로 말로 뱉어지며, 욕구나 감정을 충족하기 위한 행위가 자행된다. 변증법적 사고방식에서도 각 부분을 파악하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언제나 우선이기 때문에, 느끼는 것과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는다. 자신의 말과 행위의 근거, 혹은 정당성을 주장할 때는 자신이 '관찰'한 사실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렇게 한다.
반면에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상황의 각 측면을 구별하여 분석할 뿐 아니라 욕구와 감정, 앎과 행동도 분리시킬 수 있다. 말하자면 이 모두가 한 덩어리, 전체로 파악되지 않고 각 부분들로 파악되기 때문에, 단절된 각 부분들 간에는 공백이 존재하게 된다. 거짓이나 위선이 들어설 수 있는 건 이런 공백, 혹은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네 오른손이 한 일을 네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예수가 이 말을 했던 의미와 다른 의미에서 '내 오른손이 한 일을 내 왼손이 모르는 체할 수' 있는 것이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이란 이야기다.
덕분에 3차원적 세계관에서 솔직함과 개방성은 미덕이 아니다. 오히려 도덕이나 윤리, 교리, 이념처럼 형식적 틀을 지을 수 있는 가치가 우선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성과 논리,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측면들이 있다. 인간의 감정이 그렇고, 생식 욕구를 포함한 생물학적 욕구들이 그렇고, 직관과 상상, 의지 등과 같은 인간의 창조 능력이 그렇다.
이처럼 인간이라는 실체를 다 포괄하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최고이고 최선이라고 자부하는 형이상학적 사고방식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치 기성복에 자신의 몸을 맞추듯이 이 가치관에 자신을 꿰맞춰야 했다. 그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 치수가 자신의 치수와 달라도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기성복을 벗어던지지는 말아야 했던 것이다.
사실 쉽게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3차원적 가치라는 이 기성복은 보기에 꽤 그럴 듯했기 때문이다. 이 그럴 듯한 것을 함부로 무시했다가는 그 사회에서 자칫 손가락질 당하거나 처벌 받거나 심지어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인간의 타고난 욕구와 감정, 창조력을 포괄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이 낳은 부작용 중 하나는 그 전의 전통사회들과는 다르게 다수의 '정신이상자'들의 양산이다.
3차원적 사고방식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아무리 생물학적인 욕구라고 해도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이 있고, 허용되지 않는 욕구가 있다. 예를 들어 2차 성징기인 사춘기에 나타나는 청소년들의 성적 요구가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현대사회들이 이 어린아이들의 성적 욕구의 자유로운 분출이 가져올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아이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다. 아이들더러 이 욕구를 억누르고 자제하는 것이 정상이고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벌을 주고 죄의식을 갖도록 만든다.
이런 일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청소년 때만이 아니라, 아주 어릴 때부터, 심지어는 갓난아기 때부터 일어난다. 감정과 느낌도 통제된다. 허용되는 감정이 있고, 허용되지 않는 감정이 있다. 그래서 말 못하는 아기가 울음으로 자신의 불편을 알릴라치면, 그 불편을 어른이 알아주기보다 '울지 마! 왜 울어? 뚝!'이라는 지시를 먼저 듣게 된다. 아기로서는 생존과 직결되는 기본적인 욕구들을 제외하고는 부모가 무엇을 허용하고, 어떤 것을 허용하지 않는지, 어떻게 하면 부모가 좋아하고 어떨게 하면 싫어하는지에 예민해지지 않을 수 없다. 눈치를 보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대개의 경우 생존을 위해 부모의 보호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아기는 부모의 선호와 요구에 자신을 맞춰주는데, 이런 게 소위 말하는 사회화 과정이다.
부모가 형식논리적 사고방식이 강할수록, 아이의 사회화 과정을 기성품을 찍어내는 듯이 여길 가능성이 크다.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에 폭력이나 힘을 통한 강제는 포함되지 않지만, 훈련과 세뇌와 잔소리와 따지기는 포함될 수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이자 학대일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아이는 타고난 가능성이나 잠재력, 개성보다는 부모가 설정해준 틀 안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부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 아이가 문명화 되고 인간이 된다고 여긴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세뇌를 거부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어릴 때의 아이는 부모의 요구에 맞게 다듬어진다. 하지만 부모의 요구가 아이의 타고난 개성과 자연성을 너무 무시해버리면, 아이는 신경증적인 상태가 된다.
게다가 형식논리적으로 육아를 할 때의 문제는 부모 자신이 일관성을 갖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부모 자신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따라서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과 욕구, 창조력 등이 언제 돌출할지 모르는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 같으면 잔소리를 하던 아이의 잘못도 부모가 기분이 좋으면 그냥 넘어간다. 기분이 나쁘면 평소에는 인정과 칭찬의 대상이던 아이의 행동도 짜증스럽게 대한다. 아이는 헷갈리고 혼란스럽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규칙을 파악하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힘든 일인데, 일관성이 없는 훈육은 아이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이도 세상의 규칙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좀이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외부세계를 대할 수 있고, 나름의 자아정체감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아이는 눈치보기를 계속 하거나 부모에게 의존적이거나 자존감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아이가 발달단계에서 필요한 욕구들, 특히 정서적 욕구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의 부모들은 자신이 설정한 계획표에 따라 아이를 만들어내려고 열심이다. 알파 부모니 타이거 부모니 하는 부모 유형들이 모두 이 유형들이다. 이런 유형의 부모들은 아이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물론 이들도 마구잡이는 아니다. 육아서에서 제시하는 아동의 발달단계론들을 면밀히 연구한다. 하지만 만 2세에서 만 3세 사이에 아이의 언어 이해력이 발달한다고 육아서에서 제시하면, 이들은 이 시기에 아이더러 외국어를 배우게 한다. 모국어는 아이가 어차피 '자동으로' 배울 테니 신경 쓸 것 없다는 전제에서.
육아서에서 아이가 언어에 관심을 보이는 건 자신이 엄마와 별개의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 아이가 개별자로서의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수단으로, 말하자면 소통 수단으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배경 설명이 있어도 이는 중요하지 않다. 또 개별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아이가 인정하기 위해서는 아이가 정서적 안정감과 충족감을 느껴야 한다는 배경 설명이 있어도 이 또한 중요하지 않다. 육아와 훈육이 아이의 욕구와 필요에서 출발하지 않고, 부모의 설계, 부모의 계획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설계도대로 아이를 만들어나가는 것, 계획표대로 시행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의 욕구와 필요와 관심과 개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서는 부모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해서 아이는 자신을 감추는 법, 숨기는 법, 위장하는 법을 배운다. 거짓말을 배우고 변명을 배우고 남 탓 하는 법을 익힌다. 아이가 부모의 3차원적 사고방식을 다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부모의 비난과 잔소리를 피할 방법은 익히고 부모의 인정과 칭찬을 끌어올 방법은 익힌다. 뭐, 성공확률은 아이마다 다르지만...
3차원적 사고방식으로 아이를 대했을 때 또 하나의 문제는 그 논리가 아이가 이해하기에는 복잡하다는 것이다. 아이 눈에는 그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아이 눈에는 해야 하는 이유도 제각각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제각각이다. 분명히 나름의 일관된 원칙과 정신이 흐르고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법률이 그런 것처럼.
예전에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에서 에너지 절약에 대해 배우고 난 후 집에 와서 자신이 있는 공간을 제외하고는 방의 불을 자꾸 끄고 다녔다. 자기 방도 화장실 간다고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전등을 껐다 켰다 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하면 점등시마다 높은 전력이 사용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에너지가 더 많이 낭비된다고 설명했더니, 아이는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혼란스러워 했다. 그러니 3차원적 사고방식은 어제의 옳음이 오늘의 그름으로 바뀔 수도 있고, 더 많은 지식을 갖지 않으면 잘못 알고 있을 확률도 높다. 그래서 3차원적 사고방식에서는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부모가 이런 기준에 맞추기를 요구하면, 아이는 엄청난 짐을 지게 된다. 아이 능력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짐을. 결국 그 짐을 다 소화하지 못하는 아이는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야야 할 일을 하게 되는 실수를 자주 저리르게 되고, 이 실수를 감추기 위해 또 다시 온갖 거짓을 발명하게 된다. 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기준과 규칙을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을 만나면 아이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전혀 판단하지 못하고 무력해지고 만다. 이런 무력감을 감추기 위해서도 아이는 또 다시 거짓말을 발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사람은 거짓이 습관이 되어 양파껍질처럼 자신을 겹겹이 감싸고 있는 상태가 된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도 스스로 거짓을 말하고 행동하는 줄 자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 거짓으로 가득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에서 거짓은 나쁜 것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짓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따금 주위에 돌직구를 날리는 사람이 있으면, 혹은 예의와 윤리를 무시하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있으면, 왠지 부럽기도 하고 자신과는 다르다고 느낀다. 혹은 왠지 모르게 그 사람에 대해 화가 나기도 한다. 부모가 덜 형식논리적일 때, 아이는 좀더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이 된다.
(반면에 변증법적 사고, 유연한 가치로 아이를 대하는 부모는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아이를 이끌려 하지 않고, 아이를 관찰하여 아이의 타고난 필요와 욕구와 관심, 정서에 주목하고, 부모로서 자신의 역할을 이를 충족시켜주는 것에 두는 사람들이다. 아이는 타고난 대로의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에 꺼리낌을 느끼지 않는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위험성을 줄인다는 측면에서 꼭 필요한 최소한으로만 정한다. 아이가 삶의 다양한 경험을 맛보고 삶의 다양한 기회에 접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지 않기 위해서이다. 또 부모의 판단을 우선 들이밀지 않으므로, 아이는 선입견 없이 자신의 환경을 충분히 경험한 후에 나름의 판단과 배움을 가져갈 수 있다.)
앞에서 나는 변증법의 특징 중 하나가 사실주의적 사고방식에 있다고 했다. 그 대목을 다시 한 번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보다시피 변증법의 또 다른 특징 하나는 그것의 리얼리즘적(사실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변증법은 사실에 충실하다. 변증법은 욕심으로 존재하는 현실(배우자의 불륜, 집안의 가난, 장애 상태)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에서 출발한다. 변증법은 현실을 본질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출발점이자, 본질이 발현된 결과물로 본다. 이렇게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로서 받아들이려면, 현실에 대한 선입견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이 때 현실은 그냥 삶의 조건일 뿐이고, 조건은 불리하거나 유리하지도 않고, 좋거나 나쁘지도 않으며, 옳거나 그르지도 않는 '중립적'인 것이란 전제를 되새기는 게 도움이 된다."
그러니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자면 자신과 타인들과 세상을 '민낯'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과 세상의 거짓된 '포장'에 현혹되면 사실과 진실을 파악하기가 힘이 든다. 또 자신의 진심과 진실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볼 렌즈 자체가 이미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C가 "그래도 나는 D보다는 우월한 사람이야"라는 선입견을, 혹은 부모가 "그래도 어른인 내가 아이보다는 더 낫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면, C와 부모는 근거 없는 선입견 때문에 D와 아이를 실체 그대로 보지 못한다.
게다가 피그말리온 효과 혹은 로젠탈 효과라는 게 있다. 미국의 교육 심리학자 로젠탈에 의해 이루어진 실험으로 학생들의 지능검사를 하여 그중 일부의 학생이 지능지수가 높아 앞으로 성적이 향상될 거라고 그 학생들의 담임에게 통보했다. 그러자 6개월 후 그 명단에 들어 있던 아이들의 성적이 모두 올랐다. 하지만 교수가 교사에게 통고한 학생들의 명단은 실제로 지능지수가 높은 학생들이 아니었다. 그냥 무작위로 선정한 명단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 아이들의 성적이 오른 건 지능이 높아서가 아니라 교사가 해당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어서이다. 플라시보 효과처럼 정말로 믿으면, 그 믿는 사람이 당사자이든 아니면 상대방이든, 믿는 대로의 현실이 펼쳐진다는 이야기다.
이 이론에 따르면 거꾸로 상대방이 열등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바라보면 그 사람은 적어도 그런 선입견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그런 열등한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불확정성의 원리처럼 판단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판단하는 자와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판단 주체가 왜곡된 렌즈로 판단 대상을 보면, 판단 대상의 일그러진 상은 그냥 상(像)이 아니라 판단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현실로 보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판단하는 자의 선입견은 강화된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우리의 잘못된 선입견에 반하는 현실과 사실 증거에 여러 번 부딪힌다.(현실은 언제나 가장 신뢰할 만한 우리의 스승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가진 선입견에는 균열이 발생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지금껏 지녀왔던 선입견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돌아보면 어이가 없다. 그런 거짓에 현혹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건 말할 것도 없고 내 삶이 낭비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내가 왜 그런 엉터리 같은 생각을 고수해왔지? 누가 내 머릿 속에 그런 거짓을 불어넣었지?
사실 삶 속에 거짓이 끼어들면 거짓은 올바른 인식의 방해물이기 이전에 삶을 낭비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에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이 거짓말이 통하려면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야 하고, 그 거짓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뭔가 또 다른 위장을 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 당사자는 자신의 거짓이 드러날까 봐 끊임없는 불안과 초조에 시달려야 한다. 그럼에도 거짓은 결국 밝혀지기 마련이다. 결국 그 모든 노력이 도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애초에 혹은 중간에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만 있었더라도 이런 쓸데없는 노력으로 삶을 낭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문제는 자기 안의 거짓을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거짓이 거짓임을 인식하지 못하니 개선의 여지도 없다. 사실 우리가 대부분 틀린 견해인 선입견을 마치 옳은 견해인 듯이 붙잡고 있는 것은 우리가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씨에게 어떤 인종은 열등하다는 선입견이 있다고 해보자. A씨가 이 선입견을 고수하는 것은 자신은 그 인종이 아니므로 따라서 자신은 우월한 존재다라는 포장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A씨의 실제 모습은 자존감이 낮고 열등감에 시달리는 존재다. A씨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세상의 참 모습, 삶과 생명의 진실을 보자면 보는 자가 투명한 시야를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100% 투명한 시야를 갖는 것, 아무 선입견이 없는 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인 부모 밑에서 자라고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자신의 시야를 덜 왜곡되게 만들 수는 있다. 우선 자기 속의 거짓을 인지하여 그것을 벗어버리는 것이다.(이 경우에 남의 거짓은 크게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내 시야가 투명하면 다른 사람의 거짓도 더 잘 드러날 테니 말이다.)
그러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 제목도 있지만,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개의치 말아야 하므로 용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아마 우리가 인사치레로 하는 거짓말만 해도 하루에 대여섯 번 이상은 될 것이다. 다른 사람 기분 좋으라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상관 없지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는 사이에 자신도 속아넘어간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자신의 이런 거짓말들로 만들어낸 '착한 사람', '예의바른 사람'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면 이제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에 자신을 계속 가두고 있다가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해보라. 결국 삶을 사는 건 선택의 문제다. 선택한다는 건 얻는 것도 있지만 잃는 것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진짜 자신과 거짓 이미지 중에 선택하는 문제이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설사 남에게 미움을 받고 나쁜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받을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자라면서 지니게 된 피해의식이나 애정결핍, 죄의식, 두려움, 도덕과 윤리, 이념이나 교리 같은 경직된 세계관 등도 나의 거짓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다수의 종교에서는 투명한 시야를 갖고 신이나 우주의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참회나 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참회나 정화를 도와주는 방법으로 기도(구복기도가 아닌)나 명상을 제시했다. 왜 기도와 명상이 정화와 참회의 수단이 되는가 하면, 우리의 허위의식, 거짓이 우리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속에 감춰진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솔직할 때 갖게 되는 가장 큰 특혜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듯이, 세상도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고, 그럴수록 삶과 세상이 생각보다 단순하면서 완벽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세상과 삶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세상이 복잡해보이도록 만든 건 인간의 거짓과 치장과 위장 들이다. 반면에 투명한 시야로 그 거짓과 치장과 위장들을 꿰뚫어볼 수 있다면 우리는 단순명쾌한 세상의 이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솔직함이 곧바로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변증법적 사고방식을 갖기 위해서는 솔직함이 필요조건이다. 그러니 우리는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의 영향으로 우리가 습관처럼, 혹은 자신의 일부처럼 지니고 있는 거짓들을 먼저 벗어버려야 한다.
2015.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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