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청와대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는 바첼레트 칠레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국민의 대표가 '증오의 희생자'여서는 안 된다
- 금안당
지난 한 주는 그간 비공개적으로만 떠돌던, 대통령의 소위 '비선'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했다. 그러면서 소위 '불통정치'라고 하는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이 도마에 올랐다. 그러면서 야권이나 일반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권과 보수언론, 그리고 일부 관료들까지도 진실 규명 이전에 대통령이 일단 이 '비선 실세'들을 먼저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전횡이라고까지 묘사될 수 있는 '불통정치'의 문제가 일부라도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지배층 내부의 이 진흙탕 같은 권력 다툼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요구를 받을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이런 반응은 정치에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이 봐도 좀 상식적이지 않다. 비선 실세라고 하는 정윤회 씨는 대통령 스스로도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사람"이라고 했으니, 대통령 자신도 그가 '민간인'으로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는 일이 아닌가? 또 아무리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 한 비서진이라고 해도 그 비서진들의 모호한 행동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사람들이 대통령의 통치스타일까지 문제 삼는 판이면, 굳이 그들을 가까이 두고 대통령이 사서 오해를 받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청와대 대변인 입을 통해 민간인인 "정윤회씨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충분히 '편들기'로 오해할 수 있는 논평이 나온다?
대통령이 가족도 아닌 사람들을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지도자로서 나를 위해 애써준 사람들을 배반할 수 없다는 '의리' 때문일까? 아니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내' 사람을 빼고는 누구도 믿지 못하겠다는 피해의식 때문일까? 지금까지의 정황에서 보면 지도자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의리'라기보다는 박근혜 대통령만의 독특한 심리기저에서 나오는 태도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이는 건 아마도 비단 나 같은 사람만의 추측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개인적 심리특성이라고 하면, 오히려 사태가 훨씬 더 복잡해진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심리는 프라이버시의 영역과도 관계되는 문제이면서, 논리나 타인의 조언이나 여론 등으로 쉽게 바뀔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대통령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실 박대통령의 독특한 '통치스타일'을 바꾸라는 주장도, 얼핏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이 스타일이란 게 개인적 특성과 관련된 것이면, 그것이 아무리 일국의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말처럼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국의 대통령이란 자리는 우리 사회의 어떤 직위보다 공적 측면이 사적 측면을 압도하는 자리이다. 이 때문에 대통령의 프라이버시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공적 측면과 관계가 있을 경우에는 거의 보호받지 못한다. 그만큼 영향력이 막강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통령은 공, 사의 구분이 명확한 것을 넘어서 적어도 재임기간 동안에는 공을 위해서 사를 희생해야 한다. 만일 대통령이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이나 세력을 과도하게 편애하거나 반대로 과도하게 미워한다면, 그 사람은 전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해야 할 것이다.
아래는 내가 1년 9개월전, 2013년 3월 8일에 썼던 글이지만, 웹진에 공개하지는 않았던 글이다. 시기가 대통령 취임 직후여서 행여 '정치적'인 글로 비쳐질까 하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아래 글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지도자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잘 이해되지 않는 이번 비선 의혹 사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예전에 적었던 이 글이 생각나 여기에 옮겨본다.
인터넷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칠레의 전대통령 미첼 바첼레트라는 사람과 비교하는 아래의 글을 읽었다. 박근혜의 '앵그리 정치', 바첼레트에게 배우세요.(다음 아고라) 미첼 바첼레트는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물러나고 나서 그 다음 정권에서 복지부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하다가 2006년~2010년 칠레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위 글에서 제시한 인상적인 자료로는 대통령 취임시 30%대에 불과하던 지지율이 4년 임기를 끝내고 물러날 때는 80% 이상의 국민들이 그녀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인상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는 이런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조차 퇴임 직전 지지율은 25%에 미치지 못했다. 바첼레트도 박근혜처럼 자국 현대사의 업보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 장성이었지만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고문받아 죽었다. 그녀 또한 이런저런 방식으로 반독재 투쟁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 권력투쟁의 핵심에서 당사자가 아닌 2세대인 것 또한 박근혜와 비슷하다. 그러기에 바첼레트도 독재자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15년 이상이 지나서야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바첼레트와 박근혜 대통령, 두 사람 모두 개인적으로 과거사는 영광인 동시에 상처이다. 사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어두운 심리적 그늘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상처는 그 사람이 한 나라의 정치 수반이 되는 데 있어 심각한 결격 사유가 된다. 왜냐하면 정치 지도자의 자리는 공적인 이유로든 사적인 이유로든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전국민을 그 상황으로 함께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통령이 자신의 개인적인 부정적 감정과 상처를 이겨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문제가 심각해지지 않을까? 그런데 바첼레트는 2006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나는 증오의 희생자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평생 증오를 이해와 관용과 사랑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우리의 박근혜 대통령 또한 특히 부모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자신을 희생자이자 피해자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이 부정적인 감정은 얼마나 극복되었는가? 과연 박근혜 대통령은 일국의 건강한 정치지도자가 될 만큼,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민을 분노나 파멸의 길이 아닌 이해와 상생의 길로 이끌 만큼 준비되었는가? 아니면 33년여만의 청와대 재입성은 처절한 와신상담의 결과일 뿐인가? 이건 심리적인 문제이니만치 지금 여기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나같은 국민을 포함하여)은 아직 대통령 취임 몇 주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섣부른 평가와 추측을 삼가야 할 것이다. 게다가 타인의 심리를 예단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책도 아닐 뿐더러 위험하기도 하다. 나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 우리나라 현대사가 계속해서 과거에 발목이 잡혀왔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제대로 청산할 수 있는 현명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각의 지도자들은 상대방의 오류와 과오를 자신들의 집권 혹은 권력유지 명분으로 삼았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이 민족상잔의 6.25 전쟁을 일으킨 것을, 박정희 정권은 제2공화국 장면 정부의 무능을, 전두환 정권은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을 건설적으로 지도하지 못한 야당 지도자들의 무능을, 노태우 정권은 3김의 분열을... 그리고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집권했지만, 지도자가 청산해야 될 지역주의를 오히려 이용하여 당선된 김영삼, 김대중 정부와 분단 상황 등 옛 과제들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 선진경제화된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이념 갈등을 조장한 노무현, 이명박 정부... 해방 이후 70여년이 다 되어가는 이 긴 과정 끝에 이제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다. 경제 성장에 성공한 부친의 후광을 업고... 어쩌면 박근혜의 당선에 누구보다 큰 기여자는 야당, 특히 친노세력일지 모른다. 친노세력은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불러온 국민적 회환과 애도의 감정을 이용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과는 덮고 공만을 치켜세우는 정치적 조작을 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놓고 이런 조작이 가능하다면 친박 세력이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2012년 한 해 동안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서는 죽은 자들이 되살아나 살아 있는 국민들에게 자신의 후계자를 설득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다. (아마도 외국인들에게는 이런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가 신기하고도 놀랍게 다가올 것이다. ) 요컨대 정치지도자가 정말로 전국민적인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기 위해서는 스스로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이 과거에 받았던 피해든 성과든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지도자가 앞장 서서 역사를 되돌리는 꼴이 되고, 변화된 시대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는 결국 무능한 지도자로 낙인 찍힐 수 있다. 바첼레트 대통령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위의 취임사에서 보듯이 그녀가 ‘과거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녀는 성공했다. 4년의 임기를 마쳤을 때 30%대에 불과하던 지지율을 80%대까지 끌어올린 것을 보면 말이다. 역사학도(?)로서 말하면, 나는 우리나라 현대사가 과거의 온갖 공과에 발목 잡혀서 그야말로 힘들게 한 발 한 발 나가고 있는 상황이 보는 것이 예전 3김 시절에도 그랬듯이 답답하고 짜증난다. 물론 과거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 점은 인정하지만, 자칫하다가는 사회의 다른 분야들은 앞서가는 데, 정치만 뒤처지고 말 것이다. 정치지도자들이 이렇게 과거에 발목 잡혀 있을 때 문제는, 현재나 가까운 과거에 대한 평가 역시 왜곡되기 쉽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각각의 정치지도자들이 과거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나름으로 자신의 시대적 과제를 떠맡아 해결했던 측면들에 대해서까지 반대파들이 너무 박한 평가를 하는 것 또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 시작한 것이건 박정희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고, 김영삼 대통령은 후진적 경제구조 문제를 해결할 핵심 열쇠인 금융 실명제를 실시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아이엠에프 극복과 함께 우리나라 현대정치사에서 처음으로 ‘화해’라는 코드를 내걸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에서 권위주의를 벗겨낸 업적이 있다. 정치적 반대파들은 상대방의 이런 업적들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개인적 관계에서도 상대방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먼저 봐주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듯이, 정치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금은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나름 정치 견해를 가졌다고 하는 개인들까지 자신과 입장이 다른 상대 진영의 흠집을 잡아내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다. - 물론 그 정권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치지도자로서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경우, 예를 들어 북한 김일성 정권의 6.25 전쟁 감행과 이승만 정권의 3선 개헌, 명백한 위헌 행위인 박정희의 유신 헌법과 긴급조치, 전두환의 광주 시민 학살 등은 해당 정권의 공으로 덮어질 문제가 절대 아니다. 사실 이런 사건들에 대한 과거사 평가가 애매모호한 것이 지금 우리의 발목을 잡는 요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 김구 선생이 말했듯이 “동포 간의 증오와 투쟁은 망조다.” 따라서 정치 지도자들이 앞장 서서 이해와 타협을 통한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현대사가 더 이상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따라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말이다. |
이상이 예전 글이다. 부언하면 바첼레트는 올해 3월 칠레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위 글에서는 인용하지 않았지만, 바첼레트가 성공하는 정치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직언할 참모를 곁에 두야 한다... 현장을 다 가볼 수 없기 때문에 대통령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주변에 둬야 한다. 요구되는 것은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 로열티(충성심)다. 어떤 경우든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이건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신뢰한다.”
라고 말했던 대목도 요즘 상황에 비추어 한번 더 되새겨볼 만하다.
2014.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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