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안당 |  




역시 화장실에서 읽기 좋은 책은 짧은 글들이나 짧은 에세이들이다. 그래서 요즘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사전>을 화장실에 갖다놓고, 하루에 몇 페이지씩 읽고 있다. 


그런데 지난 번에 읽었을 때는 별로 눈에 띄지 않던 글 하나가 이번에는 읽은 후에도 한참 동안 잊히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의 내 개인적인 상황과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베르베르가 언급하고 있는 상황은 19세기 프랑스의 극작가 외젠 라비슈가 '페리숑 씨의 여행'이라는 희극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묘한 심리를 드러내는 한 가지 행동'. 즉 주인공 페리숑 씨의 행동이다. 베르베르는 주인공 페리숑 씨의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묘한 심리란 다름아닌 "일견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알고 보면 사람들에게서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행동, 바로 배은망덕"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베르베르는 이 희극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독자들에게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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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부르조아 페리숑 씨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알프스로 여행을 떠난다. 딸에게 반한 두 젊은이 아르망과 다니엘도 딸에게 청혼할 기회를 얻기 위해 페리숑 씨 가족과 동행한다. 일행이 '얼음 바다'라 불리는 알프스 빙하 근처의 한 산장 여관에 묵고 있던 어느 날, 페리숑 씨는 승마를 하다가 말에서 떨어진다. 바로 옆에 낭떠러지가 있다. 그가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고 있는데,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아르망이 달려들어 그를 구해준다. 아르망에 대한 딸과 아내의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정작 은혜를 입은 페리숑 씨의 태도는 다르다. 처음엔 생명의 은인에게 기꺼이 고마움을 표시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도움을 과소평가하려고 애쓴다.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 전나무를 보고 막 붙잡으려던 참인데 아르망이 온 것이고, 설령 아래로 떨어졌다 해도 멀쩡했을 거라는 식이다. 


이튿날 페리숑 씨는 두 번째 젊은이 다니엘과 함께 가이드를 따라 몽블랑 아래의 빙하 쪽으로 트래킹을 나간다. 도중에 다니엘은 발을 헛디뎌 크레바스로 추락할 위기를 맞는다. 이 때 페리숑 씨가 피켈을 내밀어 잡게 하고 가이드와 함께 그를 끌어낸다. 산장으로 돌아온 페리숑 씨는 딸과 아내 앞에서 자랑스럽게 그 일을 떠벌린다. 다니엘은 페리숑 씨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자기는 죽었을 거라면서 아낌없는 찬사로 그를 거든다.


당연한 얘기지만 페리숑 씨는 아르망보다 다니엘에게 관심을 갖도록 딸을 부추긴다. 그가 보기에 다니엘은 무척이나 호감이 가는 젊은이다. 반면에 아르망이 자기를 도와준 일은 갈수록 불필요했던 일로만 여겨진다. 급기야는 아르망이 자기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조차 의심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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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으로 상연 중인 <페리숑 씨의 여행>.



베르베르는 이렇게 줄거리를 소개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외젠 라비슈가 이 희극을 통해 예증하듯이, 세상에는 남에게 은혜를 입거나 신세를 지고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고마움을 모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을 미워하는 자들도 있다. 그것은 아마도 도와준 사람들에게 빚을 진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싫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와준 사람들을 좋아한다. 우리의 선행을 자랑스러워하고 그들이 두고두고 감사하리라 확신하면서 말이다."


어떤가? 독자 여러분도 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심리를 가지고 있다는 베르베르의 결론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이런 경우는 아주 질 나쁜 인간에게서나 나타나는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하는가? 


반면에 누군가가 필자인 내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베르베르의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할 것이다. 오히려 나는 베르베르가 "세상에는 ...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정도로 표현한 것이 불만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압도적으로 많다'라고 했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살면서 배운 것 중의 하나는 인간에 대해 섣부른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즉 상대방이 선량하거나 양식 있거나 너그럽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게 사는 지름길 중 하나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하거나 분노하거나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건 상대방에 대한 내 주관적인 기대 때문이다. 


사실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 인간의 부족함, 불완전함, 어리석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무엇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미화하는 데 공을 들이는 존재이므로, 그러다 보면 동류인 상대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눈을 감고, 역시 이 때문에 종교들이 긴 세월 동안 설파해온 '오래된 진리'마저 감춰지고 만다.  


하지만 지혜로운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 존엄한 유일한 진짜 이유는 인간만이 가진, 자신을 경멸하는 능력"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부족함을 경멸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과 불완전을 인식하고 완벽으로 나아갈 기회도 갖는 게 아닐까?


2018. 1. 14.

 



날짜

2018. 1. 15.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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