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가지 사정으로 억울한 정치인들이 참 많다


억울함이란 감정의 그늘 2

- 금안당



50대 후반의 나이인 내가 자랄 때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은 ‘한恨이 많은 민족’이란 정의를 스스럼없이 내렸다. 이 때의 ‘한’은 ‘원한’이란 의미도 일부 있었지만, 그보다는 국어사전에도 나오듯이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때의 감정은 억울함과 달리 분노보다는 슬픔 혹은 체념에 더 가깝다. 아마도 억울함이 켜켜이 쌓이면 한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정서가 그 한 많은 ‘한’이 된 것은 일제 식민지 치하 36년과 분단, 이승만 박정희 독재의 수십 년간이 만들어낸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정서가 이렇게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감정이라는 사실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던 건 내가 대학에 들어가서 사회과학 공부를 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전에는 기성세대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어느 정도 느끼고 거부감을 갖고 있던 사춘기 시절에도 이 한이라는 정서가 불러오는 희생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쪽이 더 강했다. 아직 어린 나이인 청소년이 생각하기에 기성세대와 세상의 힘은 너무 막강하여, 힘 없는 사람들이 체념에 가까운 한이라는 감정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폭력을 피해 우리 집으로 몇 번 피신 온 젊은 아기 엄마의 하소연에, ‘그럼 차라리 이혼을 하라’고 당돌하게 조언했던 것이나, 자식들 앞에서 자꾸 아버지 흉을 보는 엄마에게도 역시 그럴 바엔 이혼을 하라고 한 마디 했던 기억은 뚜렷하다. 아마 어린 나이여서 참고 견뎌 마침내 한으로까지 삭혀야 하는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내 보기에는 분명히 다른 선택지가 있는데도 그 억울하고 한 많은 정서를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 세대가 30대일 때,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가 끝나고 6월 민중항쟁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나자,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광고문구가 한 때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시민이 주체가 된 민주화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체념과 무기력의 정서에서, 더불어 한의 정서에서도 벗어나게 해주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 시대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을 설득한답시고 어른들이 습관처럼 내뱉던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체념과 무기력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힘 있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억울함이란 감정이 우리 사회에서 쉽게 용인받고 나아가 동정받기까지 하는 현실이다. 물론 어느 쪽이나 100% 순수한 모델은 아니겠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정서를 미국 사회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좀더 뚜렷이 드러난다.

 

예컨대 미국인들은 아무리 힘 있는 사람 앞이라도 꼭 해야 할 말을 못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만일 힘 있는 사람 앞이라고 해서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 그 때문에 뒤늦게 억울한 감정을 호소하는 미국인이 있다고 하면, 미국사회에서 그는 동정받기보다는 유약하고 어리석은 겁쟁이로 낙인 찍히기 쉬울 것이다.

 

예를 들어 땅콩회항 사건에서도 만일 회항이 법적으로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가장 책임이 큰 사람은 비행기 안의 난동자(조현아)를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난동자의 지시에 따라 비행기를 회항시킨 기장이다. 어딘가에서 괌 추락사건을 비롯하여 1990년대 대한항공의 사고율이 많이 높았을 때 내놓은 대책의 하나(외국 분석가들의 제안을 받아들인)로 국제선의 조종실 내에서는 영어만 사용하도록 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 특유의 서열에 따른 일방통행식 조직문화가 조종실 내에서 부기장이 기장에게 전혀 이견을 피력하지 못하게 하는 억압적인 문화를 만들어냄으로써 비행기 사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땅콩회항 사건 역시 결국은 오너 일가와 승무원 간의 서열적이고 억압적인 조직문화가 그 근본원인이다. 이런 서열적이고 억압적인 조직문화에서는 현장 책임자, 전문가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는다.

 


화제가 됐던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상황실 모습

반면에 미국사회에서는 현장의 긴급한 위기 상황이나 작전 상황에서는 대통령조차 현장 책임자의 의견을 존중한다. 만일 현장 책임자가 위기 상황에서 윗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미국사회에서는 아마 동정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중간 책임자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도 동정의 여지가 있고, 오히려 여론은 그 최종 책임을 최상급자에게로 돌린다. 최상급자를 제외하고는 중간 책임자, 현장 책임자, 전문가에게 아무런 권한도 부여되지 않는 억압적인 조직문화 때문이다.

 

이런 조직문화가 일반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4개층의 억울한 사람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세월호 희생자와 그 유족, 그리고 땅콩회항 비행기에 탑승해 있던 승객 같은 순수 피해자들이다. 두 번째는 현장 실무자들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는 123정의 정장과 해경들과 언딘, 땅콩 회항에서는 조현아가 닥달한 스튜디어스와 사무장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얼마 안 되는 권한과 현장에서 저지른 사소한 잘못(만약 잘못이 있다고 하면)의 정도에 비해서 훨씬 더 큰 책임을 요구받는다는 점에서 억울하다.

 

세 번째는 그 상황에 대한 실질적인 최종 책임자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는 해경이고, 땅콩 회항 사건에서는 기장이며, 메르스 사태에서는 질병관리본부장 혹은 복지부 장관이다. 이들 또한 억울한 이유는 법적 형식적으로는 이들에게 특정 사태에 대해 충분한 권한이 주어져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책임에 걸맞는 권한이 전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법적 형식적으로만 주어진 권한은 이들에게 사태의 책임을 지울 명분으로만 작용한다.

 

얼마 전에 국회에서 폭로된 영상, 메르스 사태에서 ‘경유 병원은 감염 위험이 없다’는 내용이 적힌 쪽지가 최경환 부총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이 면을 잘 보여준다. 그 쪽지는 맨 아랫단에 “BH(청와대) 요청”이라고 적혀 있어 그 쪽지를 작성한 이가 청와대 관계자임을 보여주는데, 문제는 그 쪽지가 복지부 장관 손을 거쳐 최경환 부총리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쪽지의 내용, 즉 경유 병원은 감염 위험이 없다는 단정이 사실이 아님은 경유병원들에서도 메르스 확진 환자들이 발생함으로써 바로 그 다음날로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그러니까 복지부 장관은 눈앞의 자기 업무와 관계되는 전문적인 내용의 단정에 대해서도 아무런 자기 의견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야말로 순수하게 윗사람(이 윗사람이 공식 상급자인 대통령이 아니라 3인방이나 십상시로 대변되는 비선 라인으로 추정된다는 점도 문제지만) 의견의 전달자 역할만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만일 국회의 요구대로 메르스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문형표 장관이 물러나는 결과가 생긴다면, 아마 당사자로서는 정말 억울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윗사람 말을 잘 들은 죄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네 번째로 억울한 사람은 상징적 책임자인 대통령일 것이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5천만 인구에게서 발생하는 온갖 세세한(?) 일들을 어떻게 다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언론이나 야권은 무슨 일만 생겼다 하면,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하고, 대통령의 사생활까지 들추면서 잘했니, 못했니를 따진다. 설사 특정 사태에 대해서 정부가 대처를 잘못하여 문제가 커졌다 해도, 그건 담당 공무원의 문제이지, 대통령의 책임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현장에 자꾸 개입을 하는 것은 실제 책임자와 실무자들이 워낙 무능하니까 ‘국민을 위해서’ 청와대가 나서준 것뿐이지, 진짜로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그 사태에 대해 책임이 있어서는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라는 근거에서. 물론 추정이다. 하지만 상징적 책임자와 그 측근들이 정말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마찬가지 논리에서 땅콩회항 사건으로는 조양호 회장이, 메르스 사태로는 이재용 부회장이 굳이 사과할 필요도 없었던 게 아닐까?


어쨌든 이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 사회에는 억울한 사람만 가득하고,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억울하게 느낄 이유야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는 한의 문화에서 억울함의 문화로 이전되었다.(서글픈 일이다.) 상급자나 권력자 앞에서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문화, 불만은 대놓고가 아니라 뒷담화로만 하는 게 ‘정상’으로 여기지는 사회, 옳든 그르든, 심지어 위헌이든 아니든 대통령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 사회이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회......

 

억울한 사람은 많은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우리 사회의 일면. 영화 <카트> 중.


그런데 이런 자가당착에 빠진 우리 사회에 한 ‘이단아’가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 바로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이다. 물론 그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박대통령과 함께 일할 때조차도 할 말은 하겠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협력 관계를 형성했고, 그 스스로 박대통령과의 관계를 군신관계 등이 아닌 동지관계라는 관점에서 보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철학과 소신이 기존 권력자와 차이가 나든 아니든 기회 있을 때마다 그것을 공개적으로 밝혀왔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의 이런 행보들은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언론의 주목조차 크게 받지 못했다.(예전에 정윤회 문건 사건과 관련하여 청와대 행정관의 K-Y 발언이 드러났을 때도 언론들은 주로 K, 즉 김무성의 반응에 대해서만 주목하고, 왜 Y인 유승민이 함께 거론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달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대통령이 국무회의라는 공식석상에서 그를 향한 미움과 분노를 여과없이 표출하자, 사람들 눈에는 그가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존재로 비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대통령의 찍어내기로 인한 여당 원내대표의 사퇴라는 정치 과정이 아니라, 좀더 배경적인 측면, 즉 우리나라 언론은 왜 이번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유승민 의원의 ‘특별함’에 주목하지 못했는가라는 점과 왜 박근혜 대통령은 하고많은 비박 의원들 중 유독 유승민 의원을 그렇게 이를 갈 정도로 미워하는 것일까라는 점이다.

 

이야기를 짧게 하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그것이 미국식 사고방식 및 행동방식과 한국식의 그것과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유승민 의원의 정치노선을 지칭하는 ‘합리적 보수’는 우리나라에는 전례가 없는 정치노선이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합리적 보수라는 명칭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정치 분야를 제외한 여타 분야들, 특히 지식인이나 전문가들이 주로 관계하는 분야들에서는 상당 정도 자리를 잡은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라는 경제는 합리성이 없이는 발달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우리 경제가 선진 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건 그만큼 사회문화적으로도 합리성이 정착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유교문화적 전통이나,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정치문화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미국식 사고방식, 합리성과 논리성을 근거로 하는 사고방식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대놓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준석 한나라당 전 비대위원장이 비록 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지만, 당이라는 조직 전체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하여 음행정관의 이야기를 김무성 대표에게 전달한 것도 마찬가지 태도이다. 하지만 이준석 전 위원장의 이런 행동은 같은 정치인 무리에서도 언론에게서도 무시당하거나 비난당했다. 굳이 대놓고 그렇게 곧이곧대로 전달해서 분란을 일으킬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확실히 이준석 전 위원장의 행동 방식은 한국식 정치문화에서는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유승민 의원의 경우도 본인은 평소에도 자신의 소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냈지만, 그런 행동방식은 한국식 정치문화에서 그리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고, 언론 또한 그의 이런 행동방식의 특별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친박이었다가 비박으로 돌아섬으로써 이제 원박인 의원 중의 한 사람, 그와 정치 역정이 비슷한 김무성 대표와 유사한 사람 정도로 치부했다. 이 때문에 박대통령이 굳이 유승민 의원을 지목하기 전까지 그는 동료 정치가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반면에 박대통령은 권력자로서의 본능적 감각으로 가장 참아줄 수 없는 사람, 절대권력자로서 자신의 허구적 이미지를 가장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 있는 사람이 유승민 의원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승민 의원은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자신이 지키고 싶은 가치가 우리나라 헌법 제 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법과 원칙,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현정권, 특히 자신을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대통령의 비민주성과 불합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유의원의 이런 솔직한 자기 주장은 기존 정치권과 기존 메이저 언론에게 국무회의 석상에서 대통령의 폭탄발언 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그만큼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의 지배층 내에서는 낯설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기자회견 이후 유승민 원내대표가 여권 대권주자 지지율 1위에 오른 데서도 증명이 되듯 일반국민들 사이에서는 이런 사고방식이 그렇게 낯설지도 않았고 거부반응이 일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유승민 원내대표의 정치철학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시대조류를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다시 이 글의 원래 취지로 돌아가서 주목해야 할 점은 거의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가장 앞장 서왔던 사람인 유승민 의원으로서는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의 사퇴를 압박하는 이 과정에서 누구보다 그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많은 명분과 근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 억울함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그는 사퇴 과정도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적인 절차적 정당성, 즉 의원총회를 통한 결정에 따랐다. (그 전에 있었던 대통령에 대한 공개사과도 의원총회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의 사퇴 결정이 표결 없이 박수로 추인된 것에 항의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억울한 상황에 빠진 이유가 ‘자신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상황’ 탓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예를 들어 유승민 의원 사태에서 보듯이, 상황 탓을 하는 사람은 유승민 의원이 아니라, 김무성 대표를 비롯하여 유승민 의원 사퇴안을 통과시킨 나머지 새누리당 의원들이다. 그리고 만약 대통령이 말 한 마디 했다고 자기들 손으로 뽑은 원내대표를 사퇴시킨 데 대한 비난여론이 광범하게 일었다면, 억울하다고 느낄 사람들은 유승민 의원이 아니라 그를 사퇴시킨 다른 의원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억울하다는 감정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로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신이 억울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는지, 아니면 스스로를 억울한 처지에 몰아넣지 않을 수 있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이런저런 사욕 때문에 그런 곤란한 처지에서 벗어날 기회를 스스로 내던진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편의 폭력을 견디며 사는 아내는 이혼하면 남편이 제공하는 경제적 혜택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것이 두려워서 이혼을 선택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녀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이다. 폭력을 견디며 비인간적으로 사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하면 이혼하는 것이고, 반면에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결혼생활을 유지하면서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완화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다.

 

또 공부 머리를 타고나지 않아서 아무리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데, 공부 못한다고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게 싫고 억울한 학생도 선택지는 두 가지 중 하나이다. 하나는 타고난 머리는 없어도 남들보다 몇 배 노력하여 보란 듯이 성적을 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부는 잊고 다른 분야에서 자신의 소질을 찾아보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놓고 억울해하면서 계속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도 소극적 선택지 중 하나라고 볼 수는 있지만, 이것이 자신에게도 손해인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란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보다시피 합리적이고 의식적인 선택을 하면, 억울함의 감정이 많이 줄어든다. 의식적인 선택을 하면서 그에 동반될 책임도 함께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건 단순히 억울함의 감정을 감소시키는 효과만 가져오는 게 아니다. 책임이 동반되는 의식적인 선택을 하는 건 인생의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이다.(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왜냐하면 남 탓이나 상황 탓을 하면서 억울함의 감정에 빠져 있는 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하나, 억울함의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단순히 남탓이나 상황 탓을 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욕심을 버리는 일종의 자기 희생을 해야 한다. 아니, 모든 욕심을 포기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하나의 가치(혹은 욕심)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포기하라는 이야기다. 그래야만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 하나를 실현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영화 ‘소수의견’에 보면, 피고인의 아들을 죽인 것이 민간 용역이 아니라 국가 공무원인 경찰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변호인들은 국가를 상대로 ‘100원’을 손해배상 청구액으로 내건다. 단돈 100원의 배상액을 받기 위해서 재판을 거는 것은, 피고와 변호인이 오직 진실을 밝히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욕심도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되면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칠 배심원이나 판사가 어떤 선입견을 갖거나 오해를 할 여지가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또 세월호 유족과 희생자들도 세월호 침몰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배.보상금을 포기했다. 이렇게 되면 아마 이제 극우세력들도 세월호 유족들이 더 많은 보상금을 받으려고 시위를 한다는 흑색선전을 더 이상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희생자들에게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몰아가는 상황 자체가 비극적이지만, 일상 생활에서도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은 아니라도 둘 중 하나, 혹은 셋 중 하나만 목표로 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결과를 빚어내는 경우는 대단히 많다. 이는 유승민 의원의 원내대표직 사퇴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원내대표직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가 목표로 한 것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지키는 것, 하나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물론 아직 중간결과이지만) 그는 원내대표직을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반면에 양손의 떡, 두 마리 토끼를 다 얻으려 욕심을 부리는 사람일수록, 억울한 감정의 포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는 둘 다를 얻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김무성 대표처럼 대통령과의 관계도 무난하게 유지하면서 당의 리더십도 강화하려 하거나, 우리가 흔히 봉착하는 경우처럼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호평도 받으면서, 자신의 업무도 잘해내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성과를 함께 이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서 선택의 ‘합리성’ 문제가 대두한다. 합리적 논리적으로 판단했을 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없다. 이런 경우는 하나를 얻기 위해서 다른 하나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 이런 경우는 벤다이어그램으로 말하면 한 목표가 다른 목표의 부분집합이 되는 경우이다. 하지만 두 개의 목표가 교집합에 불과하거나 서로 무관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는 불가능하다.

 

감정적이거나 주관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가능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길 추구하는 미국식 사고방식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것이 ‘계약’이나 ‘법률’이다. 미국식 사고방식, 혹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서는 ‘약속’이 시작이자 끝이다. 애초에 약속한 것 외에 달리 정의나 기준이 있지 않다. 따라서 계약과 약속을 하는 단계에서 자신이 내걸고자 하는 조건을 분명히 해야 한다. 계약에서 ‘내가 이 정도 말했으니, 나머지는 상대가 알아서 듣겠지’라는 건 없다. 그러니까 합리적인 계약에서는 애초에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말이나 행동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에서는 ‘약속’이나 ‘협정’이나 ‘계약’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눈치를 보느라 계약 당시에 자신의 요구조건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고, 계약서도 두루뭉술하게 표현된다. 심지어는 중요한 경제적 거래인데도, 계약보다는 신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문서 작성조차 하지 않는다. 물론 합리적이지만 기계적이라고 할 수 잇는 미국식 사고방식이 좀더 인간적일 수 있는 동양적 사고방식에 비해 반드시 더 나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동양적 사고방식이 오히려 불합리와 불공정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의 '배신'이라는 기준이 오히려 구태정치를 부활시키는 효과를 불러오듯이.)

 

본격적인 자본주의 사회에 진입한 지 50년이 다 되어가지만, 우리는 아직도 ‘계약’에 익숙하지 않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후보자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어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것도 여전하고, 민간 차원은 말할 것도 없고 공공조직조차 계약서 작성을 제대로 하지 않아 예기치 않은 피해를 보는 경우가 속출하는 상황도 여전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개인들이 아직 자본주의적 시민사회의 개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개인은 기본적으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개인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아직 스스로가 충분히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의 선택에 대해 자신이 충분히 책임져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억울함이란 감정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정서 중 하나가 되고, 갑을 관계라는 현대판 사회신분제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 배경에는 우리 사회의 이런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 상당수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고, 사회 구조나 권력 구조 등에 책임을 묻는 것은 일견 타당하다. 실제로도 왜곡되고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하게 국가와 사회가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우리 경제는 이미 고도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들었고, 이런 경제 시스템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광범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 되어야만, 다시 말해 미국식 사고방식을 좀더 많이 받아들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땅콩회항 사건에서 보듯이 이제 서열적이고 가부장제적이고 불합리한 조직문화는 기업의 성장을 위협하고, 메르스 사태에서 보듯이 상명하복식의 비효율적인 국가방역 체계는 나라의 경제 안정조차 위협한다. 나는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세대가 그 이전 세대의 한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했듯이, 지금의 젊은 세대는 우리 세대의 ‘억울함’이란 정서를 굳이 자신의 정서로 가져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 이미 자본주의적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지금의 3, 40대는 그 전 세대보다 더 합리주의적인 가치관을 지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합리적 보수라는 기치를 내건 유승민 의원에 대한 지지도가 진보, 보수를 불문하고 3, 40대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 나는 억울함이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지배적 정서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위로받음이 대중의 주요한 정서적 욕구 중 하나가 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비생산적인 억울함이란 감정적 함정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위로받음보다는 스스로 책임지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억울함이란 감정이 일견 타당성이 있다 해도, 억울함이란 감정은 개인을 앞으로 나가게 만들고 성장시켜주는 그런 요소가 절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억울함이란 감정은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자칫 잘못하면 개인을 퇴행시킬 수 있는 그런 요소이다.

 

지금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지 알 수 없지만, 예전에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농담 같은 명제가 있었다. 물론 이 때의 출세는 권력이나 경제력을 가진 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자신이 가진 힘으로 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어찌 보면 지위와 신분과 서열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농담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억울해하기만 해서는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반면의 진실을 담고 있는 농담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말을 ‘억울하면 성공하라’로 바꾸면 어떨까? 단 성공하는 것이란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행복하게, 즐겁게, 평화롭게, 지혜롭게 등등) 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

 

어쨌든 중요한 건 억울하다는 감정에 빠져 있으면 절대 성공할(혹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첫 번째 글을 내고 몇 주째 완결하지 못해 나의 부담이 되고 숙제가 되었던 이 글을 이제야 마친다.

 

2015. 7. 13.



날짜

2015. 7. 13.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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