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김충희, '서북청년단'



사회의 건강성을 지키려면 극단을 경계하라

- 금안당 

 

 

웹진에 글을 쓰면서 이따금 '내가 왜 글을 쓰고 있지?'란 생각을 한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그야말로 개미 눈물만큼이라도 일조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좋은 세상'이란 건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 라는 그 다음 의문이 이어진다. 추상적으로 말하면 모두가 자유롭고 평화롭고 진실되고 고통 없고 행복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세계는 이와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뭐 사실 나도 이런 이상향적인 세상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전쟁이나 살인, 테러, 자살, 폭력, 아동학대 같은 끔찍하고 극단적인 사건들이 최소한으로 일어나는 사회이기만 해도 감지덕지할 것 같다. 물론 우리의 현실은 이마저도 요원한 목표로 보이게 하지만, 그럼에도 현대 문명에 이르기까지 인류 지성의 발달을 전제로 하면, 이 정도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이룰 수도 있는 이상향이 아닐까 싶다.

 

사실 어떻게 하면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는 굳이 학자나 전문가가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이라면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나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해주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아마 사람들이 이 몇 가지 기본적인 원칙들만 지켜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야말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설사 불행한 사건이 벌어진다 해도 대부분 우연적이고 일회적인 것이어서, 대다수 사람들은 그 불행감에서 쉽게 벗어나 삶의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백인 문명이 들어오기 전의 북미 인디언 사회가 이러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머리와 이성으로 알고 있는 이 앎대로 살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세상을 행복보다는 불행이 넘쳐나는 사회로 만드는 것일까? 오래 전부터 철학과 종교는 이 물음의 답을 구해왔다.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그 원인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었고, 이기심이나 욕심이나 어리석음 같은 인간의 나쁜 심성이 그 원인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었으며, 국가나 지배체제 자체가 억압을 전제로 한다고 보기도 했고, 반대로 플라톤처럼 어리석은 우중(愚衆) 때문이라는 입장도 있었다.   

 

하지만 천국이나 극락 같은 절대적인 이상향이 아니라 좀 덜 폭력적이고 좀 더 합리적인 사회만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문제의 원인을 좀 다른 곳에서 찾는다. 나는 우리 사회가 이토록 분노로 들끓고 폭력적이고 불합리하며 행복한 사람보다는 불행한 사람이 더 많은 사회가 되는 이유가 비정상인 '극단주의'(혹은 비정상)가 정상인 '상식주의'를 능가하고 있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극단주의란 한마디로 광기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하는데, 사실 대한민국은 반쯤 미쳐 있다. 우선 아이들 교육만 해도 그렇다. 조기교육, 사교육 열풍으로 한참 뛰어놀아야 할 초등학생이 마치 수험생처럼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자투리 시간에는 스마트폰 게임이나 컴퓨터 게임에 빠진다. 이런 광기의 교육열은 아이가 대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십년 넘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부모-자식 관계도 순종적이거나 반항적인 두 유형만이 대세이다. 이 경쟁 대열에서 탈락하는 아이들은 자살하거나 은둔형외톨이가 되거나 일탈 청소년이 되어 일찌감치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해당 사회의 '미래'를 보기 마련이다.)

 

아이들만이 아니다. 청년들이나 기성세대가 된 사람들도 이 경쟁적 달리기에서 뒤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삶을 사는 과정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남을 의식하고 세상이 내건 깃발을 쫓아가는 과정이 되다 보면, 그것도 다른 사람보다 한걸음이라도 빨리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인 과정이 되다 보면, 사람들은 제정신을 가지고 살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상당수는 우울증, 강박증, 공황장애, 새디스트와 메조키스트, 싸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분노조절 장애 등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정신병을 앓고 있다.


출처 = http://www.healthfoc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633


출처 = http://scienceon.hani.co.kr/29619



경쟁과 적자생존을 기본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심각한 부작용이다. 이 부작용은  특히 우리나라처럼 압축적인 고도 성장을 이룬 자본주의 사회일수록 더 심각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이런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정치 사회적으로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이 면에서도 태부족인 데다가 분단이라는 환경적 악조건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정신적 허약상태가 전사회적으로 광범해지면, 극단주의가 발호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극단주의는 현실을 단선적이고 흑백논리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도 극단주의 논리는 이해하기가 쉽다. 반면에 정신적 결함이 있게 되면 우리 인간이 사는 복잡한 3차원, 4차원적 세상(현실)을 이해할 능력은 부족해진다. 그래서 극단주의자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거나, 말이 안 되는 억지 논리를 내세운다. 이번에 IS에 가입하겠다고 시리아로 건너간 김군이 펼친 '페미니스트가 지배하는 세상이 싫어서 IS에 가입하고 싶다'는 식의 '논리'(?)도 그런 예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에서 정치이념상의 대표적 극단주의는 일베와 '서북청년회' 같은 극우들과 이석기류의 골수 주사파 같은 극좌들이다.(싸이코패스나 종교적 광신도들 같은 문화적, 사회적 극단주의자들도 있지만, 이들은 아직 집단화되어 있지는 않으므로,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정치이념적 극단주의인 극우나 극좌는 세상을 아군과 적군으로만 나눈다. 이들에게는 중도파가 이해도 되지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세력이다.(실제로 통진당의 정당해산을 청원한 보수단체인 '국민행동본부'의 서정갑 본부장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중도 표방하는 사람은 빨갱이보다 더 나쁜 놈들"이라고 말했다.)  또 이들은 적대세력을 없애야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이들에게는 공존하거나 타협하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이 가는 길에는 항상 투쟁과 갈등과 폭력이 벌어진다.

 

이런 극단주의자들의 사례는 고대학생들이 사용하는 SNS 커뮤니티에 올랐다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4·19 혁명은 공산분자들의 폭동... 추모행사 금지해야"



* 이미지 출처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76011&CMPT_CD=P0001



보다시피 자칭 서북청년단 재건위라는 이 극우집단에게는 4.19혁명이 "공산혁명분자"들이 일으킨 폭동이고, 5.18 광주민중항쟁은 "북한게릴라가 선량한 광주시민들을 이용하여 일으킨 폭동"이며,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역적"이고, 학살자이자 국가반역자인 전두환은 "명예를 회복시켜야" 하는 애국자이다. 역사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해도 정도가 있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다고 실소로 그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이보다 앞서 올린 글의 제목은 "고려대학교가 붉게 물들고 있습니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자신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고대생들이 종복 좌파로 보인다는 이야기다. 보다시피 이들의 공격성과 뻔뻔함이 도를 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궤변이 억지이고 비정상인 줄 모르고, 오히려 자신들이 무슨 '정의'이기나 한듯이 '정상'인 다수의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런 극단주의자들이 힘을 가지면 히틀러와 나찌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그런 것처럼, 자칫하면 우리 사회를 파괴하고 파멸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절대 근거 없는 염려가 아닌 것도 분명하다. 

 

사실 좌든 우든 극단주의는 대단히 위험하다. 그런데도 요즘 언론에서 전하는 핫뉴스는 거의 다 극단주의 관련 소식들이다. 해외 사건들은 놔두고라도, 강남아파트 가장의 가족 살해, 아동 학대와 살해, 인질극, 토막살인, 일베 학생의 패륜적인 세월호 희생자 조롱, 마찬가지로 일베의 화약 테러 사건, 조현아의 땅콩회항과 이 사건에 대한 대중들의 과도한 분노, IS에 가입하겠다며 시리아로 들어간 청년과 청와대를 폭파하겠다고 협박하는 청년... 연일 터져나오는 이 극단적 사건들은 옳고 그르고를 떠나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인지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극단적 사건들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런 극단적 사건들의 잦은 발생빈도는 한편에서는 땅콩회항 사건이나 어린이집 아동폭행 사건에서 보듯이 대중적 분노라는 또 다른 극단을 불러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너무 강한 자극을 자주 받다보니 왠만한 자극에는 무뎌지면서 자꾸 더 강한 자극을 찾는 무의식적 심리를 강화한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건전성을 잃고 광기가 광기를 불러오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어느 언론은 이런 우리 사회를 단순히 분노를 넘어 '증오사회'라고 표현했지만, 증오는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증오는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면, 그는 다시 자신을 부정한 자를 증오한다. 여기에서 극단적인 사건들은 '증오'라고 하는 최악의 감정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한다. '네가 이런 악마 같은 짓을 저질렀으니, 내가 이를 갈 정도로 너를 미워하는 것도 당연한 거야'라는 식이다.

 

그런데 앞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증오'나 '극단주의'와 반대로 다른 사람과의 차이와 공존을 전제로 한다. 또 민주주의는 비록 정치 사회적 개념이지만, 공존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경제민주화'라는 개념처럼 경제적으로도 극단적인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다. 어찌 보면 극단주의자들이 '민주화'라는 용어에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일베들이 '민주화'라는 용어를 싫어한다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유일사상을 따르는 주사파들도 마찬가지다. 북한 또한 국호는 '북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지만, 민주주의 가치를 권력 정체성의 하나로 삼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사실 극단주의를 저지하고 극단화가 불러 일으키는 정치사회경제적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해당 사회가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다. 소홀할 뿐만 아니라, 더 큰 문제는 박근혜 정부 들어 민주주의적 가치가 여기저기서 훼손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진다는 데 있다. 정권 스스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사독재적인 유신헌법의 질서를 '한국식 민주주의'라고 호도했는데, 그 유신헌법의 입안자인 김기춘은 지금도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으로 일하면서 검찰 조직을 휘두르고 있다. 유신헌법이 우리나라 사법부에 의해 반민주적 위헌 법률로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기춘 실장이 자신의 과오를 반성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의 시대로 회귀하기를 얼마나 염원하든, 김기춘 실장이 대통령의 염원을 위해 얼마나 인적, 행정적, 나아가 법적 조치를 취하든, 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50년 전의 군사독재 시절로 회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국민들의 민주의식이 그 당시와는 천양지차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실 박근혜 정부가 '무능'한 이유 중 상당 부분은 국민들의 이 달라진 의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인 것도 있다.

 

연말 정산 파동에서 보듯이 정부는 '꼼수 증세'를 해도 국민들이 그 꼼수를 간파하지 못하고 나라를 위한 충정으로 증세를 감수할 것으로 판단했지만, 보다시피 그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또 영화 국제시장을 관람한 박근혜 대통령이 이 영화를 "젊은 세대에게 윗 세대의 희생을 알게 해준 영화"라고 극찬을 했다지만, 설사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지금의 현실에서 가장 큰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는 젊은 세대가 이 영화로 인해 현실에 대한 불만을 접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현직 대통령이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면서, 과거 세대가 이룬 업적을 마치 자신의 업적인양 빙의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지도자의 책임회피이자 직무유기에 다름아닐 것이다.

 

이렇게 4, 50년 전의 과거에 붙박혀 있는 대통령의 사고방식이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은  대통령의 측근들이 왕조 시대를 연상시키는 십상시라고 표현되고, 불통 이미지니, 만기친람형 업무 스타일이니 하는 대통령 관련 표현들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런 표현들은 민주주의 의식을 가진 대통령에게는 절대 붙을 수 없는 표현들이다. 문제는 민주적 의식을 갖지 못한 지도자는 일본의 아베총리가 그렇듯이 극단주의자들의 지향과 닿게 된다는 것이다.

 

아베총리도 일본의 대표적 민간 극우집단인 '재특회'에 참으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할 뿐만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극우세력의 기를 세워줌으로써 자신의 권력유지에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또한 한국판 극우세력들의 폭력적 행위를 묵과하거나 오히려 은근히 부추김으로써 이들의 세력을 키워주고 이들을 전위부대로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은 신은미 황선씨의 통일 콘서트에 대해서는 두 사람이 종복주의자라는 보수언론의 '혐의'만 아니면 그냥 민간 주도 소규모 행사에 불과한 것을 놓고 무슨 심각한 반국가 활동이라도 벌어지는 듯이 굳이 국무회의에서까지 언급하면서, 건강한 사회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훨씬 더 심각한, 이 행사를 놓고 벌어진 일베 학생의 '테러' 행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또 대북비난 삐라 살포에 대해서는 '표현의 자유여서 정부로서도 막을 수 없다'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이 좀이라도 들어간 언론이나 SNS 상의 여러 표현들에 대해서는 공권력과 극우단체들의 고소, 고발을 앞세워 어떻게든 처벌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이런 편향적 태도는 정부 스스로가 극단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이차대전 후 똑같은 분단상황이었지만 먼저 신나찌당을 위헌정당으로 해산하고, 나중에 공산당도 위헌정당으로 해산시킨 독일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당시 독일 정부는 극우와 극좌, 양 극단 모두에 대해 공정하게 No!라고 선언했다. 반면에 박근혜 정부는 극좌적 성향의 통진당에 대해서는 No!라고 하지만, 극우 성향에 대해서는 오히려 은근히 편을 들고 있다.

 

나는 같은 보수정권이지만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명박 정부는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지지하는 이기적 보수세력이지만, 박근혜 정부에는 단순한 보수를 넘는 극우적 성향이 잠복해 있다. 극우적 성향이 있는 조선일보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등에 대해 못마땅해했던 것도 이 때문이며, 같은 보수 언론이지만 조선일보보다는 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박근혜 정부의 정책들에 더 비판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실 박근혜 정부에 잠복해 있는 극단주의적 성향을 전제로 하면, 대선 당시의 '경제민주화', '국민대통합' 같은 공약들이 왜 지금은 버려졌는지, 왜 그렇게 폐쇄적인 불통의 통치 스타일을 고집하는지, 왜 청와대 비서실이 공안검사 출신들로 채워지는지, 비선실세나 문고리 3인방, 친박인사 등 극소수의 자기 편만 왜 그렇게 고집하는지, 왜 다수의 국민들을 적으로 돌리거나 일종의 분할통치 방식을 사용하여 갈등을 조장하는지, 또 왜 그렇게 여론을 읽지 못하고, 대대로 보수정권의 강점으로 인정받았던 경제분야에서조차 최악의 결과밖에 얻지 못하는지가 이해가 된다.   

 

그런데 보수와 진보를 넘는 극단적 성향이 정권에 내재해 있게 되면, 말하자면 정권의 비민주성이 강해지면, 사회 전체에 갈등과 폭력이 확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극단주의는 이해와 대화와 타협 등에 무능하여, 평화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극단주의는 반대파의 존재 자체를 말살시키려 하기 때문에, 무력과 폭력의 사용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정권 자체에 극단적 성향이 있어서 해당 사회의 극단주의 세력을 조장하는 건, 나라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역사적으로 히틀러의 나찌즘과 일본 군국주의, 그리고 현대의 종교분쟁과 인종분쟁 등에서 보듯이 이는 진보세력만이 아니라 보수세력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실 현대 이후의 모든 전쟁과 폭력은 상대방과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극단주의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극단주의는 민주주의를 퇴보시키는 가장 확실한 무기이다. 따라서 한 국가가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극우든 극좌든 극단주의와 싸워야 한다.

 

이 점에서 나는 헌법재판소가 통진당 해산결정 판결을 내린 것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통진당원들 모두가 극좌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통진당이 심각한 비민주적 정당이고, 필요하면 언제든 폭력적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극좌적 성향이 강했던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국세(國稅)가 사용되고 공식적 여러 특권이 부여될 수 있는 '정당' 형식으로 존립하는 걸 굳이 허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사상과 결사의 자유가 있으니 자발적 민간단체로는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해당 단체나 구성원들이 현행 법률을 위반하면, 이는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극좌적 성향의 단체나 개인만이 아니라 극우적 성향의 단체나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또 현직 대통령의 명예훼손 행위에 대해 처벌하는 만큼 전직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행위도 같은 수위에서 처벌받아야 한다.(아니면 똑같이 허용이 되거나.) 반면에 북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극우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를 통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한다면, 진보단체, 나아가 극좌단체들의 표현의 자유도 그만큼 존중해줘야 한다.

 

극단주의자들로 인한 피해를 막으면서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권력으로 양쪽 극단 모두를 공평하게 처벌하고 제지하는 것이고, 둘째는 양쪽 극단을 똑같이 허용하여 균형이 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일 한쪽 극단만 허용하고 다른 쪽 극단은 제지하면, 그 사회는 균형이 깨어지면서 한쪽 극단으로 쏠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극단주의가 불러올 파괴적인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거칠게 비유하면 첫번째 방법이 신나찌당과 공산당을 똑같이 불법화한 서독식 방법이었고, 두번째 방법이 극우정당도 공산당도 허용하는 프랑스식 방법인데, 어떤 방법을 택하는가는 국민적 합의에 따라 다를 것이다. 분단과 휴전상태인 우리나라는 두번째 방법보다는 첫번째 방법을 택하는 편이 현실적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택하든 양 극단을 공정하게 대해야만 극단주의의 발호를 막을 수 있다.  

 

사실 어떤 방법을 택하는가는 그 당시 정권의 성향, 즉 보수인가 진보인가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이 많다. 다시 말해 보수 정권은 첫번째 방법을, 진보 정권은 두 번째 방법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권 자체에 극단적 성향이 있으면, 그 정권은 공정함에서 벗어나 어느 한쪽의 극단은 조장하고 다른 쪽 극단은 억압한다. 그리고 이렇게 정권에 의해 균형이 깨어져버리면 해당 사회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정부권력은 말할 것도 없고 보수든 진보든 책임 있는 정치세력이라면 자신들의 주장과 행위가 우리 사회의 균형을 깨고 극단주의를 조장하는 결과를 불러오는 건 아닌지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어떤 정치세력이 극단주의에 경도되면, 결국 그 세력은 대중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건 해방 이후 우리 역사도 증명해주고 있다. 하지만 정치세력의 편향성이 일시적으로 극단주의를 조장하고 사회를 폭력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상대방의 극단적 편향성을 제지하고자 반대편 극단성을 그 대안으로 들고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상대가 극단주의적 편향성을 갖더라도 이쪽은 정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상대가 폭력적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이쪽도 폭력적 방법을 사용하면,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확대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니 극단주의를 저지한다고 극단주의와 '싸우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또 극단주의가 야만적이고 저질이라고 해서 똑같이 비웃고 모욕적으로 대하는 것도 상대의 극단주의적 성향을 강화시킬 뿐이라는 점에서 좋은 방법이 아니다.

 

사실 이런 방법들은 '극과 극은 통한다'는 고전적인 격언을 확인시켜줄 뿐, 극단주의를 약화시키는 데는 별반 도움이 되는 방법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정도(正道)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우리의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만일 기성세대가 극과 극이 충돌하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이런 모습만 보고 자란 미래 세대 또한 사회의 주역이 되었을 때, 극단적인 방법 외에 다른 대처방법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서로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거나 무시만 하지 말고, 이해하고 타협하는 모습을 미래세대에게도 보여준다면, 우리는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을 포함하여 각 이념 세력들은 자신의 모습 속에 행여 극단주의적 성향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고, 이런 측면을 정화할 필요가 있다. 지금 당장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내부의 극단주의 경향을 묵과하거나 용인하면, 그 부메랑은 반드시 자신들에게 돌아온다는 점을 깊이 새기면서 말이다.

 

그리고 현재 권력은 그 사회의 지배적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으므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부가 극단주의에 경도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는 각 세력이 자신의 입장 관철을 위해 싸우는 것보다 우선이다.

 

2015. 2. 2. 



날짜

2015. 2. 2.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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