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이자 도전의 의미가 되어야 하는 '미생'이란 말
- 금안당
직장 남녀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을 얻으며 인기리에 방송되던 JTBC 드라마 <미생>이 종방되었다. 내가 다른 드라마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드라마에 대한 선입견(상식적인?)으로 <미생>과 여타 드라마를 비교하면, 미생의 특징은 그 '사실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미생>은 직장인, 특히 사람들이 선망해 마지 않는 대기업 직장인의 생활을 가능한 '극화'하지 않고, 가능한 사실대로 그려내고 있다. 이 점에서 똑같이 계약직 사원의 애환을 그렸지만, 주인공 미쓰 김이 자격증 100개 이상을 소유한 그야말로, '신의 능력을 가진 계약직'으로 그려졌던 <신의 직장>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물론 주인공 장그래가 바둑공부에서 배운 복기 능력을 바탕으로 업무 관련 전화번호와 무역 용어들을 며칠 사이에 완전 암기해내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로 그려지는 데서 보듯이, 과장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남녀 직장인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위로'받는다는 느낌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첫번째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미생의 주인공들은 밖에서 보는 대기업 직원이라는 번드르한 이미지와는 달리, 바로 그 대기업이라는 거대 조직 속에 있기 때문에 무엇 하나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기업 회장의 상속자나 이 대기업 회장에게 원한을 품은 누군가, 혹은 신데렐라의 꿈을 이룬 누군가가 아니라, 회사 안으로 들어가면 그냥 조직의 부속물이 되고 마는 신입사원이거나 계약직 직원, 많이 올라가봤자 차장, 부장 정도인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위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어쨌든 해야 한다. 잘리기 싫으면... 계속 그 회사에 다니려면... 그것이 마부장 같은 마초상사가 오과장에게 요구한 사과문 처럼 억지스럽고 부당한 요구라 하더라도... 어찌 보면 참 '찌질한' 인생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미생>은 주인공이 되기에는 많이 부족해보이는 위치의 사람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라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20대 후반 ~ 40대의 모든 직장인들이 자신을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 감정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이 드라마가 '위로'의 역할을 하는 첫번째 지점이 여기에 있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이 '찌질한' 주인공들의 선택, 즉 어떡하든 회사에서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되는 선택이 충분히 의미 있다고 전제한다. 그렇다고 살아남는 게 나중에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냥 견디고, 살아남는 것(이기는 것) 밖에 없는데도 그것을 의미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영이가 남자 상사와 직원들의 그 혹독한 성차별을 견뎌내는 과정도, 스펙 좋은 장백기가 자신의 업무 미숙을 깨닫고 좀더 대접 좋은 회사로 옮기려던 걸 포기하는 과정도 결코 '찌질'하지 않게 묘사된다. 단지 상사에게 야단 맞지 않기 위해서, 혹은 어떻게든 한 단계 승진하기 위해서 하는 중간관리자들의 행동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는 가능한 남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살아남는 주인공들의 처신이 설사 영웅적이지까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애환을 가진) 주인공적인 행동거지는 된다.
여기에 이 드라마가 많은 직장인들에게 위로가 되는 두 번째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다수의 직장인들이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그냥 버티고 견디고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직장생활을 하는데, 이 드라마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건 비굴해서나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가족'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정이다. 그러니 드라마 미생은 다수 직장인들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면서 살고 있는지 알아준다. 그들이 자기 입으로 말할 수 없고, 당사자인 가족들도 잘 알아주지 않는 그들의 애환과 희생을 그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미생의 리얼리즘은, 그리고 리얼리즘이 가져다주는 위로는 여기에서 끝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다. 오차장은 대기업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중간 간부이면서도, 조직 속에 함몰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조직 속에 있는 동안,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조직을 위해 헌신하지만, 그가 염두에 두는 조직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좀 다르다. 그는 조직이나 업무를 '사람'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전무나 부장이 시키는 일이라도 그 속에서 전무나 부장이라는 사람의 의도를 먼저 읽고, 부하직원이라고 해도 그 부하직원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혹은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무엇을 더 가르쳐야 '써먹을 수' 있는지 항상 신경 쓴다. 거래처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차장이 장그래에게 "우리애"라고 표현하고, 그 말을 들은 장그래가 한순간에 회사에 대한 소속감과 오차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게 된 건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오차장은 다른 사람처럼 조직의 룰을 100% 인정하면서도, 다른 조직원들과는 다른 선택을 할 때가 많다. 그는 자신의 업무 추진이나 거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걸 사전에 알면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렇게 할 수 없으면 그 업무를 추진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그리고 일단 한 번 선택을 하면 최선을 다해 성과를 낸다. 상사와의 약속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고등학교 동창에게 당하는 모욕도 참기 힘들지만 감수한다. 말하자면 그는 자존심이라는 겉치레도 내려놓을 만큼 업무에 열정적이다. 그에게 업무는 자기 실현의 장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업무에 접근하는 그는 항상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사장이나 임원이 그냥 사장이나 임원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존경하는 게 아니라, 그 직위에 오르고 그 직위를 유지할 만큼의 능력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전무가 마음에 들지 않고 의심나는 대목도 있지만, 그를 함부로 비판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는다. 반면에 부하직원들이 업무능력이 떨어진다고 그들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이 경우에는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부하직원들도 업무가 자기 실현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킨다. 그는 일을 그냥 일로써 보지 않는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을 함께 본다.
이 점에서 미생은 우리 사회의 청춘들에게 위로와는 다른 의미에서 희망의 빛 하나를 비춰주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건 대기업처럼 사람이 쉽사리 조직의 부품이 되기 쉬운 구조에서도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보여준다. 김대리와 장그래는 이런 오차장에게 푹 빠져 있다. 다른 신입직원들도 다른 상사들과 다른 오차장의 특별함을 알아본다. 그래서 신입사원들은 선차장을 도와주기 위해서 주말에 과외의 업무를 해달라는 오차장의 부탁을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준다. 오차장이 하는 부탁이니만치 그 업무에 충분한 인간적인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차장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일을 한다고 해서 비능률적이거나 무능력하지 않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 이는 거래처에 순한 사람, 좋은 사람으로만 찍힌 박대리와 비교된다. 박대리도 업무와 인간을 떼어놓고 보지 않지만, 업무보다 사람이 우선이라, 거래처에 필요한 요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런 박대리의 인간적인 면모는 약아빠진 사람들에 의해 쉽사리 이용당하고, 그는 성실함에도 업무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이 되고 만다. 아마도 이는 박대리가 '비현실적으로' 사람의 선함만을 믿은 반면, 오차장은 '현실적으로' 선과 악을 함께 지닌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그래서 오차장은 십년 넘게 바둑으로 세상을 본 장그래의 특별한 식견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보면서도, 그런 장그래가 약간의 성취에 겉멋이 들어 자만할 때도 누구보다 빨리 그 허점을 파악하고, 장그래를 '장팀장'이라 부르면서 장그래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자극한다. 마치 예전의 실력 있는 장인이 제자(도제)를 훈련시키는 방식과 흡사하다. 그러니까 오차장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종합무역회사라는 자본주의적인 조직력과 정보력을 활용한 직무능력인데, 그 직무능력을 발휘하는 방식은 장인적이라는 이야기다.
이 둘의 차이는 결국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오차장은 결국 원 인터라는 대기업을 나간다. 그의 방식은 같은 팀으로 일하는 김대리와 천과장과 장그래와 아직 대기업의 방식에 타성화되지 않은 신입직원들에게는 잠들어 있던 내면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놀라운 효과가 있지만, 자본주의적인 대조직에서 그 효과는 그 이상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그는 다른 부서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능력 있지만 내부 라인도 잡지 못해 자기 팀원들의 승진 기회만 가로막는 괴팍한 상사에 지나지 않는다. 대조직이 오차장을 용인할 수 있는 지점은 여기까지이다. 오차장이 더 높은 직위에 오르려면 자신의 장인적 방식을 포기해야 하지만, 오차장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오차장은 능력이 있으니, 대기업을 나와서 자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하던 대로 대기업에서는 끝내 알아주지 않았던 장그래의 재능을 키워줄 수도 있게 되었다. <미생> 마지막회에서 보면 오차장의 얼굴이 확 폈다. 드라마 중간에 오차장을 만난 선배가 한 말, "회사가 전쟁터라고? (그래도)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란 충고와 반대되는 선택을 한 셈인데, 우리는 퇴사한 오차장의 모습에서 오히려 가장 자신만만한 얼굴을 본다. 그러니까 결국 일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모든 직장인의 로망은 회사를 나가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메시지다.
나는 젊은 사람들이 <미생>의 이 메시지를 더 크게 받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평직원, 신입직원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고 가족을 위한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가치평가 없이 그래도 괜찮다고 위로받는 것도 좋겠지만, 문제는 위로가 끝나면 현실은 그대로란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을 보니,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은 앞으로 더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정규직, 그중에서도 대기업의 정규직이 되기란 하늘의 별따기 같아질 것이다. 그리고 <미생>은 설사 대기업 정규직이 된다 하더라도 평생 전쟁터를 뛰어다니는 병사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너무 안전한 길을 구하지 말고, 도전과 위험을 감수해보는 건 어떨까? 보다시피 안전을 구하다가 자신을 잃을 위험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자본이 제시하는 틀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틀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다투거나, 그래도 지옥보다는 전쟁터가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이 틀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사회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아니다. 사회를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들,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사람들, 도전과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 실퍠해도 다시 시도해보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렇게 하려면 능력이 있어야 한다. 실력이 없으면서 무조건 도전하고 위험에 뛰어드는 건 무모한 짓이다. 그리고 실력을 키우려면 장그래가 말했듯이 남들과 다른 '질'과 '양'의 노력을 기울여 배워야 한다. 남들과 같은 정도나 그보다 못한 정도의 노력밖에 기울이지 않으면서 세상이 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지 원망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장그래가 말한 남들과 다른 '질'의 노력이란 게 뭘까? 대본 작가가 그냥 한번 해본 말이 아니라면, 이 드라마에서 남들과 다른 장그래의 '질적' 특징은 그가 10년 넘게 바둑이라는 한 분야를 팠다는 그의 경력이다. 그는 바둑을 두면서 승리와 패배도 경험하고, 부분에 몰두해서 전체를 놓치기도 하고, 바둑이란 전투를 삶과 비교하기도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직장 경험이 없는 장그래는 자신에게 익숙한 바둑 세계라는 관점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회사 업무들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지만 장그래에게는 바둑 경력이 자신의 정신적 스펙이 되는 셈이다. 또 아버지의 죽음으로 바둑을 포기하고 집안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을 때, 어떤 난관도 감수하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은 장그래가 남들과 다른 '양'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고 장담했던 배경일 것이다.
장그래는 이런 남들과 다른 '질'과 '양'의 노력을 기울이기에, 그리고 장그래의 이런 노력을 알아준 오차장이 있었기에, 신입사원 혹은 계약직 사원답지 않게 회사에 나름의 공헌을 한다. 하지만 이런 공헌도 기존의 틀과 그 틀을 유지하는 룰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 틀과 룰에서 보면 장그래는 2년간의 계약직 이상의 위치를 허락받을 수 있는 '우수한'(?) 노동력이 아니다.
그렇다면 <미생>이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는 '안전과 성공을 보장해줄 것 같아 보이는 기득권의 틀 안으로 들어가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가 아닐까? 차라리 그 노력을 자신의 진짜 실력을 키우는 데 기울이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몇 년씩 취업 스펙을 쌓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중소기업에 들어가거나 프리랜서로서 업무 능력을 키우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아닐까?
뭐, 해석은 각자의 자유이지만, 그리고 드라마 하나 가지고 너무 세밀한 분석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 같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2014.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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