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인 당신이 바뀌어야 아이가 바뀐다 1'에서 이어집니다.


부모인 당신이 바뀌어야 아이가 바뀐다 2

- 금안당 




이 글의 제목이 '부모인 당신이 바뀌어야 아이가 바뀐다'이지만, 솔직히 말해 필자로서 나는 부모인 당신이 전면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전면적으로 바뀌기에는 당신의 나이가 이미 너무 많다. 어른 나이인 당신에게는 이미 나름의 가치관과 세계관, 습관화된 생활방식, 감정기제 등이 거의 틀로서 정립되어 있다. 설사 당신이 그것들을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틀이 깨어진다는 건 당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당신의 자아(에고)를 부정한다는 의미이므로 이건 가능하지 않다. 나라도 나 자신이 부정당하면서 바뀌길 요구받는다면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누군가, 특히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자신의 행동 일부를 바꿀 수 있다. 우리가 부모가 되고 부모 노릇을 하는 건 이 시점부터다. 사실 아이가 없을 때는 혼인한 상태라고 해도 젊은 부부의 행동양식이 미혼 시절의 그것과 크게 달라질 이유가 없다. 물론 지금까지는 생판 남이었던 배우자와 생활을 함께해야 하므로, 서로 양보하고 조절하고 바뀌어야 하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와 아이가 생겼을 때의 변화의 정도 차이는 거의 천양지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가 생기면 이제는 삶의 모든 의미가 아이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간다. 이렇게 아이에 맞추어서 자신의 일부를 바꿔야 하는 상황이 싫은 사람들도 분명 있을 테지만,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아기를 눈앞에 놓게 되면, 이런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부모가 되어본 사람은 누구나 느낀다. 이 때 부모가 된 젊은 부부, 특히 젊은 엄마는 중대한 결심을 해야 한다. 그 결심이란 아기가 만 3살(36개월)이 될 때까지는 모든 것을 아기를 중심으로 삼겠다는 결단이다.

 

물론 엄마만이 아니라 아기 아빠도 같이 그런 결단을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그렇게 되면 육아휴직 기간이 1년보다 더 길 수도 있다), 안 되면 어느 한쪽이라도 확실하게 아기를 책임지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기의 정서적 토대는 출생 후 3년 정도면 거의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 후의 환경과 인위적 노력이 아기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3세 이전보다 훨씬 더 힘이 많이 든다. 따라서 교육학에서는 생후 3년간을 아이의 성장 발달에 결정적 시기라고 표현하는데, 이 시기는 비유하면 오뚝이의 아래쪽 무게중심이 형성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오뚝이의 무게 중심이 제대로 형성되면, 오뚝이가 외력에 쉽게 넘어가지 않듯이 아기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삶의 고난에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또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선다.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가장 집중적인 '투자'를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리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이 시기에 부모는 어떤 유보도 없이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내려놓고 아이의 필요와 상태에 맞추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만약 현실 여건상 이렇게 하는 것이 힘들다면,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은 조부모에게 아기의 육아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가 돈의 거래로 이루어지는 비인간적인 관계에 처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결정적 시기인 만 3년 동안의 육아에서 기본 방침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인간적 육아, 자연주의적 육아이다. 그러니까 아기에게 분유보다는 모유를 먹이고, 종이 기저귀가 아닌 천 기저귀를 사용하고, 적어도 생후 1년까지는 자주 스킨쉽을 하고, 집단시설 같은 산후조리원을 이용하기보다는 친정집이나 자기 집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아기에게 텔레비전 영상 같은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실 세계를 보고 듣고 느끼게 하고, 대형마트 쇼핑에 아기를 데리고 가지 말고, 영유아 조기 교육을 하지 말고, 아기에게 자연을 관찰할 기회를 자주 주고, 짐보리나 아기체육 강좌 같은 것보다는 아기가 부담없이 야외에서 뛰어놀 기회를 많이 주고, 아기와 대화를 많이 하고, 예쁜 옷, 비싼 옷보다는 아이가 활동하기 편한 옷을 주로 입히고, 샴푸, 린스, 유아용 화장품, 살균제, 청결제 같은 화학성분제들을 사용하지 말고, 아기에게 청결보다는 자유로움을 맛보게 하고, 아기가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책을 많이 읽어주고, 남의 아기와 자기 아이를 비교하지 말고, 무엇보다 아이가 있어서 부모인 당신들이 행복하다는 느낌을 아이에게 충분히 전달하고...

 

보다시피 자연주의적 육아는 돈이 별로 안 드는 소박한 육아방식인 대신 부모의 헌신이 많이 요구되는 육아방식이다.(이 때문에 위에서 아이를 중심에 놓겠다는 부모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를 자연주의적 육아라 부르는 것은 아이가 원하는 것이, 다시 말해 아이의 태생적 필요가 이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기는 자기 집이 고급아파트이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가 입는 옷이 비싼 옷이길 원하지 않는다. 또 오줌을 여러 번 눌 때까지 갈아주지 않아도 되는 흡수력 좋은 종이기저귀를 원하지 않고, 비싼 유모차에 앉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기는 값비싼 장난감들에 둘러싸이기보다는 엄마 아빠가 함께 놀아주는 것을 더 원한다.

 

아기는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이 확장되기를 원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에게 심어져 있는 성장 프로그램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서, 이렇게 아기 중심적인 정보에서 확장해가지 않으면 성장이 이루어지지를 않는다. 예를 들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를 기르면서 우리가 아기에게 반복해서 가르치는 말은 아기의 이름과 엄마, 아빠, 맘마(젖) 등 아기의 일차적 필요 및 관계와 관련 있는 용어들이다. 물론 다른 단어들도 가르쳐주지만, 아기가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알아듣는 용어들은 모두 아기 자신의 직접적 이해와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아기가 이렇게 자신의 보호자들과 자신의 공간에 어느 정도 숙달되고(?) 나면, 아기는 좀더 넓은(?) 세상을 원해서 자꾸 집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예전에 할머니들은 이럴 때 아기가 '콧바람'이 들었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기가 텔레비젼 영상으로 펼쳐지는 세상을 이해하거나 고도의 조직화와 체계화가 이루어진 대형마트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는 아이의 이해능력을 넘어선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이해하기 힘든 '현실'에 아이를 자꾸 대면하게 하면, 그때부터 아이의 '혼란'이 시작된다. 아이는 7살이 될 때까지도 어깨에 망토만 두르면 자기도 배트맨이 될 수 있는 줄 안다. 또 아이는 엄마더러 카트 속에 물건을 집어넣게만 만들면 그 물건이 '자기' 것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떼를 쓴다.  그러니 아기를 혼란시키지 않고 착각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아기를 데리고 집에서 나와 동네 놀이터에서 놀게 하거나 동네를 산책하는 정도만 하는 게 좋다.  

 

어린 아이가 문명화된 현대세계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영유아들 중 다수는 대형마트에 가면 그 눈부신 조명등 아래서 차라리 눈을 감고 자는 쪽을 택한다. 또 몇 십 킬로미터의 거리를 순식간에 달려가는 자동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어린아이에게는 전혀 유의미하지 않다. 이때도 아기들은 그 현란하고 혼란스런 정보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눈을 감는 쪽을 택한다. 부모는 이 점을 충분히 의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아기에게 유의미한 정보와 의미 없는 정보가 있고, 무의미한 정보를 아기에게 계속 강요하면 그건 아이에게 혼란을 자초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하지만 비싼 산후조리원, 비싼 유아용품, 비싼 육아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젊은 엄마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내 아이에게 해준 모든 좋은 것들이 종국에는 그 값어치를 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이건 어른의 생각이고, 어른의 욕구이다.

 

아이를 기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어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아이의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현대 문명에서 많은 부모들이 착각하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를 '빈 서판'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이 빈 서판에 무엇을 입력하는가에 따라 아이가 달라질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라도 전혀 다른 성향과 재능을 갖듯이,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많은 점에서 각각 다르다. 어쩌면 개인의 특성 중 50% 이상이 이미 결정되어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이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고 부모가 아이에게 퍼부은 그 모든 입력 요소들은 헛수고로 그칠 공산이 크다.

 

게다가 모든 아이에게 공통되는 생물학적 성장이란 면에서 생각하더라도 이미 성인이 된 부모의 시각에서는 이제 막 생물학적 성장을 시작한 아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어른인 우리 모두는 예전에 자신도 아기였고 아이였다. 하지만 사실 우리 머리 속에는 어렸을 때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어른이라서 더 어린 아이에 대해서라면 잘 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이런 착각은 육아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공산이 크다. 다시 말해 아이의 가장 일차적인 필요와 욕구를 부모가 충족시켜주지 못함으로써 아이가 이미 어릴 때부터 욕구불만 상태에 빠질 수 있고, 이는 아이의 정서와 인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시기 아이의 욕구 중에서 부모가 자주 간과하는 것이 충분한 애정을 주는 것과 세상에 대한 안정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아이는 먹거나 배변을 하는 문제와 달리 심리적인 욕구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젊은 부모는 쉽게 이 측면을 간과하거나 자기 식으로 해석하지만, 심리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고 자란 아이들은 몸과 머리는 자라도 마음은 자라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애정 결핍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다 자란 성인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반드시 아이의 존재를 전적으로 인정해주는 보호자의 친밀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친밀한 애정과 안정감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보호자의 직접적인 손길과 애정 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보면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자기 자식을 사람답게 기를 기회는 똑같이 주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세월호 유족인 김영오씨가 평소 딸 유민이와 주고 받은 감동스런 카톡 문자나 분신한 압구정 아파트 경비원 ㄱ씨가 사건 당일 아내와 주고받은 카톡을 보면, 사람간의 애정은 부와는 정말 별개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애정 깊은 부모들 밑에서 어긋나는 자식이 나올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젊은 부모들은 돈으로 아이의 양육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세를 접어야 한다. 아이가 운동을 하고 싶어하면 먼저 엄마나 아빠와 놀이터와 운동장에서 충분히 놀아주고 난 다음에 이것만으로 아이의 성에 차지 않으면 그때 태권도 학원이든 축구 학원을 보내고,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싶으면 먼저 아이에게 책을 충분히 읽어주고, 아이에게 수의 개념을 알려주고 싶으면 학습지를 들이대기 전에 일상 생활에서 엄마와 숫자놀이를 하면 된다. 또 아이의 사회성을 키우고 싶으면 부모가 먼저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대방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돈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고급 유치원이 아니라 아이들간의 소박하고 건강한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면 된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 양육과 교육의 문제에서라면 너무 쉽게 '돈'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선택한다. 그래서 내 아이가 수학을 좀 못해도 몸값 비싼 과외선생이 하는 과외팀에 들어가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한다. 영어는 어릴 때부터 외국인이 선생님인 영어유치원에 다니면 되고, 장난감, 자전거, 옷 등도 비싸면 비쌀수록 내 아이가 돋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육아와 교육을 돈으로 해결하려 하면 할수록 아이는 망가진다. 

 

예전에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우리 아이 반의 한 어머니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이의 같은 반 친구가 집에 놀러를 왔는데, 그 친구가 자기 집은 45평인데 그 집은 25평밖에 안 된다고 자기 아들을 놀리는 걸 들었다는 것이다. 그 어머니는 어른인 자신이 어린아이에게 평가당한 모욕감에다가 자기 아들에게 느끼는 미안함 등으로 무척 속상해했다. 그런데 내가 이 사례를 주변의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사람들의 한결 같은 반응이 그 정도는 이미 일반화된 현상인데 내가 뒷북을 치고 있다는 식의 지적인 것도 나로서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마도 이게 내가 부모로서 일반학교에 정나미가 떨어진 두 번째 경험이었을 거다. (첫번째 경험은 아이 2학년 때 학년 주임 선생이 담임 선생이었는데, 2학년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너무 공부를 많이 시키려는 걸 보고 부모인 내가 질린 적이 있지만, 이 때는 전학을 하면서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었다.)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고 나서야 나는 일반학교 아이들 중 일부가 그런 아이답지 않은 우월감으로 자기 과시를 하는 행동이, 실제로는 그 아이의 자존감 부족에서 나온 현상이고, 아이의 자존감이 부족한 이유는 그 부모가 아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은 데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예전에는 부모가 아이를 조건부로 사랑하여 아이의 자존감이 부족하더라도 그 아이가 가진 재능과 부모가 바라는 재능이 달라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지만, 위의 사례는 아이가 자기 것도 아닌 부모의 재산(집)을 가지고 친구에게(나아가 어른인 친구의 엄마에게도) 우월감을 내세우는 상황이라는 면에서 나로서는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래서 이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 나는  '아이는 가난하게 키우는 것이 정답'이라는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돈의 힘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배운 삶의 경험만이 아이의 피와 살이 되는 진정한 배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또 아이가 일찍부터 '돈의 맛'을 알게 되면, 자기 노력 없이 돈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손쉬운 방안만 찾게 되어 아이가 망가질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게다가 돈을 이용한 편의적인 해결법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아야, 아이의 성장 과정 동안 아이와 부모간의 인간적인 만남이 계속 유지되고, 아이가 가장 필요로 하는 부모의 애정을 아이가 계속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돈이 없어서 몸으로 때우는 게 아니라 돈이 있어도 몸으로 때우는 게 아이에게는 더 좋다는 이야기다.)

 

* 아, 물론 인간적으로, 또 자연주의적으로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아이의 육아와 교육에 돈이 전혀 안 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처럼 도시화된 인공적인 현대 문명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는 인간적인 환경, 자연적인 환경을 아이에게 제공하는 데도 돈이 든다. 예를 들어 대안학교를 택하면 무상인 의무교육인 공교육과 달리 교육비 등 돈이 들어간다. 또 아이에게 유기농 재료를 많이 사용한 먹거리를 제공하려 해도 마트 등을 이용할 때보다는 식품비가 더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돈이 좀더 든다 해도, 아이의 장기적인 건강과 안전을 생각하면, 유기농 식품쪽이 더 경제적인 것 또한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대안학교도 특별히 고비용이 들어가는 국제학교 같은 곳이 아니면, 지금 당장에도 공교육 일반학교를 다니자면 필연적으로  들일 수밖에 없는 사교육비 정도의 비용밖에 들지 않는 데다가, 장기적으로도 아이의 자립도를 생각하면 대안교육쪽이 훨씬 경제적(?)이다. 

 

이야기가 중언부언 길어졌지만 요약하면 아이를 진짜 인간답게, 사람답게 키우려면 먼저 부모인 당신이 돈으로 육아와 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돈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애정으로 자란다는 인식을 확고히 가져야 한다. 이런 인식을 분명히 하면 당신은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기준을 갖게 될 것이다. - 만약 계속 이렇게 하기가 힘들다면 적어도 아이의 생후 3년 동안만이라도... 이렇게 하기만 해도 아이가 완전히 망가지고 속물적으로 되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생후 3년이 이미 지난 경우라면 힘들겠지만 지금부터라도... -

 

요즘 직장인들에게 인기 있는 드라마 <미생>에 보면, 딸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하는 여자 차장의 일화가 나온다. 그런데 아이가 그린 가족 그림에 엄마의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다. 바쁜 엄마는 이 그림을 보고 실망스럽긴 하지만 아이가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다 다음날 허둥지둥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아이와는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돌아서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다. 돌아보니 아이는 여전히 엄마가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제서야 엄마는 아이가 왜 엄마인 자신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는지를 이해하고, 다시 되돌아가 아이를 포옹해준다. 물론 드라마일 뿐이다. 하지만 아이를 이렇게 건성으로 대하고, 얼른 어딘가에 맡겨야 하는 부담으로 대하는 것이 굳이 드라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다.

 

필요한 건 엄마가 무리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와 24시간을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이라도 아이가 부모의 애정과 친밀감, 그리고 그로 인한 안정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만남을 자주 갖는 것이다. 아이가 이렇게 심리적으로만 안정되면, 아이는 자기 안에 내재된 성장 프로그램을 잘 가동시켜 멋진 사람으로 잘 자랄 것이다. 한 알의 씨앗이 무성한 나무로 자라듯이...


2014. 11. 23. 

 

날짜

2014. 11. 24.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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