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대 후반 남자인 지인이 자서전처럼 쓴 글의 일부다. 20대 자식을 가진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교육학자들 외에 이 나이의 아버지들이 우리나라의 교육풍토에 대해 좀이라도 언급한 글이 흔치 않아, 이 자리에 옮겨놓아본다. 물론 웹진의 입장(이런 게 있다고 하면)과는 전혀 상관 없다. 그냥 이 나이의 남자들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읽어주면 되겠다. - 금안당 -
교육 유감
- 청송
나에게 국가 교육은 초등학교 때부터다.(그때도 유치원은 있었지만 그건 딴 나라 얘기였다.)
초등학교 때의 기억들은 희미하지만 4학년인가 5학년 때 소금집이라는 가게에서 이틀 정도 과외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과외 공부가 내 생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서 보니 어린 마음에도 이런 식의 설명이라면 혼자 해도 충분한 것을 굳이 구슬치기하는 시간을 빼앗겨가며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던 기억이 있다. (옷 잘 입고 다니는 아이들이 잘난 체하는 게 더 싫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고 중학교에 들어간 마지막 학번이었던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된,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스파르타 교육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교육이라고 해봤자 해질 때까지 교실에서 공부하고, 전기 사정이 안 좋았기에 어두워져 글자가 안 보이면 체력장 준비로 운동장에서 공이 안 보일 때까지 던지기 연습을 하고, 달리는 운동을 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마산 중학교에 가야 했는데 200점 만점에 192점이 커트라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모들이 보기에는 점수 1점에 피를 말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수험생이야 그냥 시험을 치르니 그런가 보다 하지, 무슨 깊은 생각이 있을 리 없었다.
당시 담임이 음악 선생님이었는데, 마침 음악 문제가 말썽이 되어 선생님이 곤욕을 치렀던 일이 생각난다. 노래를 배울 때는 대위법적 2부 합창인가 그랬는데, 시험 문제는 도돌이표가 나오는 악보를 제시하곤 도돌이표가 정답이라고 정해지는 바람에 선생님이 잘못 가르쳤다고 엄마들이 항의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버지들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때 경기 중학교에서 무로 엿을 만들 수 있느냐는 입학 시험 문제가 신문 사회면에 실리고 난리를 피울 때였으니, 그때도 입시 전쟁은 치열했던 셈이다. 재수생은 있었지만 재수 학원은 없었기에, 그냥 다른 초등학교에 재입학해서 일 년 더 공부한 다음 중학교 시험을 쳤다. 다른 친구들은 빡빡머리로 교복을 입은 중학생인데 자기는 같은 동네에서 초등학교를 한 번 더 다녀야 했으니, 어린 마음에 상처가 얼마나 컸겠는가? 어른들이 몹쓸 짓을 한 꼴이지만, 13살짜리가 뭘 어쩌랴?
다행히 시험에 합격한 나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머리 깎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 때 기억이라곤 수학이 암기과목임을 이해 못하고(고등학교 가서야 깨달았다), 그냥 수학 머리가 없는가 보다 하고는 공부를 게을리 해서, 시험 마칠 때마다 얻어터지던 일 하며, 중3 때 평생 볼 무협지를 그때 다 읽은 일 하며, 일본식 당꼬 바지를 입고 마치 히틀러처럼 열변을 토하던 교장 선생님 모습과 미술 하던 친구가 여자 친구 집을 찾아 간다기에 따라나섰다가 창원 산업도로 건설 중인 교각에서 지도 선생님에게 걸려, 중3이 공부 안하고 싸돌아다닌다고 꾸지람 듣던 일 정도다.
그러다 시험 시즌이 돌아와 고등학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마산 중학교에서 공부 잘하면 서울 대학과 맞먹는 경기고를 신청했고, 그 다음은 서울고, 경복고, 그리고는 부산고, 경남고였다. 집안이 서울이나 부산에 유학 보낼 형편이 안 되면 똑똑해도 그냥 마산고에 가야 했다. 나의 중학교 성적이 중간 정도였으니, 당연히 아무 생각 없이 걸어서 다니는 마산고에 들어갔다.
머리가 좀 트이는 고등학생이 되자, 남들 노는 일요일마다 학교에 나와 공부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지금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지만 머리가 천재가 아니라는 건 중학교 때 이미 알았던 터라(중학교 때는 어린 생각에도 똑똑한 친구들이 많았다), 내 인생에서 고등학교까지는 그래도 공부를 하는 게 현명하다 여기고, 졸업 때까지만 열심히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 당시에도 교사들은 4당當5락落이니 하면서 잠을 4시간만 자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나는 하루 8시간씩 꼬박꼬박 자면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자 가야 할 대학을 정해야 했다. 그때의 실력으로는 운이 좋으면 서울 농대 정도는 간신히 들어갈 것 같았지만, 서울 유학 자금도 은근히 걱정이 되고 그냥 부산대 공대가 친구들이 가는 대세였기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의사협회 사무장을 하시던 아버지께서 한의대가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 보셨다. 의사라는 직업이 좋은 건 알겠는데, 의대에 보낼 돈은 없지만 한의대는 6년이니, 그 정도는 서울에 친척도 있고 하니 공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경희대 한의대를 알아보니 정보가 거의 없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원 정보지와 선생님 정보력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는데, 오로지 서울대학만이 학교의 서열을 올릴 수 있다고 압박받던 선생님들에게 3류 대학에 대한 정보가 풍부할 리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서울대학을 한번 쳐 보고 후기인 경희대를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3학년이 되자 경희대학이 전기로 바뀌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서울대에 한 번 쳐볼 욕심으로 제2 외국어인 독일어 공부까지 하고 있었는데 경희대학은 국, 영, 수, 그리고 선택과목 하나가 전부였다. 허탈했다...
그 당시엔 지금 학력고사의 전신인 예비고사가 있었는데, 입학 성적 반영 비율이 평균 10~20% 정도였다. 일류 대학일수록 본고사 비율이 높았고, 내려갈수록 예비고사 비율이 높았지만, 고3짜리가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었으니, 그냥 그렇게 공부해서 한의대에 들어갔다.
고등학교까지만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부터는 안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십대 꼬맹이가 멋대로 판단하도록 둘 만큼 세상살이가 턱없이 만만치는 않다는 걸 절감하면서 대학 생활 6년을 보내다 보니, 어떻게 시간이 때워졌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대학 졸업 시즌이 되었다.
100% 합격하는 국가고시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시험인지라, 일년 동안 다시 수험생, 고시생이 되었다. 기왕 하는 공부, 게다가 명색이 고시 수준의 공부인데 대학원 시험도 같이 보라고 주위에서 권유했지만, 대학원 시험조차 치르지 않은 몇몇 꼴통들 중 한명이 되고 말았다.
그 뒤 한의사를 하는 동안에는 교수가 된 대학 동기들이 자기 대학에 와서 박사학위를 받아가라고 쉽게 이야기하며, 한의학 박사가 되면 권위가 생겨 한의사 직업에 도움이 될 거라고 유혹했지만, 여자가 얘기하는 것만큼도 달콤하지 않았기에 그냥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세상이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쓰잘머리 없는(?) 박사학위를 따느라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기 싫었다.
그러다 자식을 낳고 큰 놈이 대학에 갈 시기가 되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듣고 교육 받은 것만 기억한다. (간혹 천재성이 있어 그 밖의 것도 창조하는 놈을 보긴 했지만...) 그래서 세뇌가 중요한 거다.
거의 모든 한국 남자들이 그런 것처럼 나도 잘될 놈은 그냥 두어도 잘되고, 안 될 놈은 한 재산 털어 넣어도 안 되는 것이니,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안달복달 할 필요 없이 교육도 반半자유 방임이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안 통하면 자신이 방임주의로 빙의하여 마누라에게 일임해 버리는 경우가 있었지만 말이다.
나도 이를 못 벗어나 고등학교까지 방임주의로 일관하다 애가 고2가 되어서야 학원을 운영하는 동기를 찾아 부탁했다.
“친구야, 우리 애가 이제 고2가 되었어. 돈은 달라는 대로(?) 줄 테니 공부 2년만 시켜다오.”
이 말을 들은 친구가 혀를 차며 학교 다닐 때 자기가 좀 똑똑하다고 생각하던 놈들은 대부분 다 지금 와서 이딴 소리를 한다고 탄식한다. 그러면서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하느냐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과외를 시켜 잡지 않으면 지금 와서는 똑똑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니 다닐 때는 고2 때 힘껏 하면 중위 그룹에서 상위 그룹으로 올라가는 일이 가능했지만, 지금 시스템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아~! 그 말을 들으니, 애가 좋은 대학을 가고 안 가고의 문제보다 마누라 원망이 한 가득 쏟아지는 상상이 먼저 머리를 스친다. 당신처럼 그런 식의 천방지축인 교육 방식을 언젠가는 후회할 거라는 말이 기억나서다. 그러나 어쩌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켰지만 역시나였다.
큰 놈 고2 때 해외여행에 데리고 갔더니 패키지에 같이 온 사람이 나를 보며 놀라던 모습이 기억났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고2를 데리고 여행을 다니느냐는 핀잔이었으리라. 그래서 하루는 술을 마시고는 마누라에게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진다"고 큰소리쳤다. 그때 아마 마누라는, ‘그래, 늙어 죽을 때까지 돈 벌어서 자식 교육 제대로 못 시킨 거 돈으로나 보상해라’는 체념 반, 복수 반의 생각이 들었겠지만,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걸.
솔직히 나는 이 사회의 교육 풍토가 싫다. 아니, 싫은 정도가 아니라 무섭다.
물론 자기 자식 좋은 대학 보내서 한평생 잘 먹고 잘살게 해주고 싶은 거야 인간의 본성이지만, 자식의 삶의 질이나 인생의 가치는 무시하고, 오직 돈만 잘 벌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다 같이 미쳐 돌아가는 엄마들도 한심하고, 그걸 대놓고 반박도 못하면서 술집에서만,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고 푸념이나 늘어놓으며 수수방관하는 아버지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러기 아빠라는 단어 자체의 성립을 이해할 수 없다. 과거에는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고 아버지들이 자신을 희생하여 자식에게 올인했지만, 지금의 기러기 아빠는 뭔가? 자신을 희생해서 무엇을 얻는가? 자식이 행복하면 자신도 행복하다는 환상의 대리만족을 위해서?
요즘 자식들이 잘되면 자신을 위해 희생해준 아버지에게 쥐뿔이라도 감사하는가? 자식이 잘 나가서 외국에라도 나가 살게 되면 가문을 위한 제사조차 어림없는 일이 되고 말지 않는가?
설사 국내에 남는다 해도 나중에 아버지를 위해 벌초라도 해준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자식에게 그동안 투자한 눈물의 자금은 꼬박꼬박 갚아줄 것인가? 고생한 아버지 발을 씻어주는 수고를 할 것인가? 아버지가 병들어 누웠을 때 한걸음에 달려와 옆에서 지켜봐 주리라는 보장은 있는가? 자식을 위해 조건 없이 희생하는 것이 아버지의 길이라면, 아버지가 무슨 신이라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자신이 잘나서 공부 잘하는 줄 아는 개인주의에 물든 요즘 자식들은 아버지가 능력이 되니 자기에게 투자를 한다고만 생각할 뿐이지, 빚내어서 없는 돈 만들어 자신을 교육시켜 준다고는 생각할 줄 모른다. 또한 자기 앞가림 할 줄 아는 똑똑한 자식이라면 부모에게 그런 식으로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못난 아버지들이 자기 발등 자기가 찍어 놓고 다른 아버지들 서글프게 자살은 왜 하는가?
자식을 해외에 보내야 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식이 똑똑하기는 한데 전투적이고 살벌한 한국식 교육하고는 안 맞아 이 땅에서는 감당이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자식이 장애가 조금 있는데 왕따시키는 일이 일상인 이 나라에서는 도저히 정상적으로 교육을 못 받겠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공부와는 상관없이 자기가 겪었던 교육 현실에 환멸을 느껴, 있는 돈에 그냥 좋은 환경에서 자식을 인간답게 키우고 싶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한국에 놓아두면 데모를 하여 잘 나가는 집안 풍비박산 낼 우려가 있는 고위 공직자의 자식들, 뭐 그 정도겠다.
보내는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같이 따라가는 엄마는 뭔가? 서로 얼굴 자주 보고,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논쟁을 벌이거나 싸우기도 하며, 스킨십도 즐기고, 지지고 볶고 사는 게 가족 아닌가? 그런데도 남편을 버리고 자신도 버려가며, 어린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게 유일한 정답이라고 부추기는 한국의 현실은 또 어떤가?
그런 일이 미친 짓이고 쪽팔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이런 해괴한 일을 벌이는지 나로서는 아무리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것도 오직 미국과 캐나다로만 보내면서 말이다. 사대주의에 찌들어 겉멋만 부리길 좋아하는 한국 여자들의 일그러진 잘난 척 때문이다.
외로움에 지쳐 자살을 택하는 기러기 아빠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자살을 택하지 않는 기러기도 결국 영혼 없고 기운 없어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돈이라는 칼자루를 쥔 갑이 칼날을 쥔 을에게 꼼짝 못하는 이유를 나는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건강하고 재정적으로 별 근심이 없는 것, 만사가 꼭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평안하고 여유롭게 일이나 운동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제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 이런 게 다름 아닌 행복이라는 정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나라의 교육 풍토가 몸서리치게 싫지만, 어쩌랴, 우리 세대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을... 어차피 이 시궁창에 머리 박고 살아야 하는 게 서글픈 내 운명인 것을... 그래도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부르짖는 이 사회에서 오직 내 마누라, 내 새끼만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느껴야 한다.
한국에서만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다는 생각에 우울해지지만 자식들은 이미 다 커버렸고...
이 나이에 내가 또 뭘 어쩌겠는가마는...
2014.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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