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한 아빠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 '솔드아웃'의 한 장면. 



부모인 당신이 바뀌어야 아이가 바뀐다

- 금안당



2013년 7월, '아이는 놀이가 밥'이라고 말하는 어린이놀이 전문가(?)인 편해문씨가 시사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는 말을 7년 전에 했다. (중략) 아이들이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고 말하고 다니던 시절에 내가 생각한 아이들 나이는 열두 살, 초등 6학년까지였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지금 아이들 나이를 열 살로 수정하며 초등 5~6학년을 내가 꿈꾸던 아이들 울타리 속에서 속절없이 떠나보냈다. 7년 사이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 삶 2년이 그렇게 날아갔다. 누가, 무엇이 그렇게 했을까.


오늘, 대한민국에 사는 초등학교 5~6학년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싶을까? 설마 비석치기와 사방치기라 생각하는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중략) 오늘 대한민국 초등 5~6학년 아이들이 하루 대부분을 보내며 하는 생각은 게임이나 컴퓨터나 카톡이 아니라 '사고 싶다'이다.


'왜 나는 저것이 없을까. 저것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번뇌로 하루를 보낸다. 마치 누구처럼, 그렇다. 당신처럼. 아이들이 지금 빠져든 놀이와 하고 싶은 놀이는 진정 '사는 놀이'다. 소비가 아이들의 놀이가 되었다. 밖에서 동무들과 어울려 마음껏 뛰놀 때 즐겁고 행복한 순간과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 때 행복한 초등학교 5~6학년이다. 포켓몬스터 딱지를 가지고 놀 때가 아닌, 축적할 때 즐거운 초등학교 5~6학년이다. 누구한테 배웠을까. 당신한테. 오로지 살 때 행복한 아이를 볼 때 쇼핑을 욕망하며 행복해하는 아이의 부모와 교사인 당신이 떠오른다. 


(중략) 쇼핑이라는 것에 절어 있는 당신과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상식적인 대화가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사고 싶다'는 소비놀이에 폭 절어버린 아이들한테 교육이라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 원문보기(시사INLive)  


 

또 성 조숙증이란 9세 이전에 2차 성징을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 성조숙증 진단을 받은 어린이가 2006년에 6400명, 2009년 2만1712명, 2013년 6만6395명으로 8년 동안 10배 가까이 늘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경찰이 페이스북과 유투브, 트위터 등에서 아동 음란물을 게시하고 유포한 117명을 적발했는데, 청소년이 절반을 넘었고, 이중에는 8살짜리까지 포함된 초등학생 비율도 28%나 됐다고 한다.

 

말하자면 아이들이 갈수록 섣부른 어른 흉내를 내면서 '조숙'해지고 있다. 당연히 부모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오히려 요즘 부모들은 아이의 '사춘기'가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게 당연한 듯이 이야기하고, 일부 부모들은 자기 아이의 사춘기가 이른 나이에 시작되는 걸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한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에 보이는 아이의 반항적 태도를 '사춘기'라고 해석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걸 과연 사춘기라고 볼 수 있는지 심히 의구심을 갖는 편이지만, 이는 '사춘기'라는 용어 규정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해서 특별히 반론을 펴지는 않는다.

 

사실 문제는 2차 성징이라는 신체 및 호르몬 변화와 함께 나타나는 정서적 혼란을 사춘기라고 규정할 것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이른 나이에 '사춘기'라고 표현될 정도의 이런 정서적 혼란을 겪는 것이 아이의 성장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때이른 신체적 조숙함과 그로 인한 정체성 혼란이 더 이른 나이에 어른으로 성장할, 즉 정신연령이 높아질 가능성을 확대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의 문제이다. 아마도 자녀의 때이른 사춘기 맞이를 환영하는 부모들 중 다수는 첫번째 가능성을 기대해서이겠지만, 과연 현실적으로도 그런가?

 

알다시피 현실적 결과는 이미 나와 있다. 현실적 결과는 신체적 조숙함은 정신적 조숙함을 불러오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상적인 정신적 성장조차 방해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는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당연히 추출될 수 있는 결론이다. 이른 나이에 신체적으로 조숙해지면 아이는 자신의 신체변화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개인적 사회적 책임을 스스로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자기 몸인데도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면, 아동기때처럼 부모는 아이를 보호하고 아이는 부모에게 의존하는 메카니즘이 신체 변화 후에도 계속된다. 아이의 정신 연령 성장을 위한 훈련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적 성장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아무리 신체는 어른의 몸집을 해도 그 정신은 어린애에 지나지 않는, 말하자면 '어른이'가 되고 만다.

 

예전에는 몸은 아이인데 생각이나 행동은 노인네나 어른처럼 한다고 해서 '애늙은이'니, '애어른'이니 하는 말을 듣는 아이들이 이따금 있었지만, 요즘은 이런 별명으로 불리는 아이들은 거의 없어진 대신, '철없는 청년', '철없는 어른'이란 의미의 '어른이'(어른+어린이의 합성어)란 말까지 생겨나고 있다. 이는 평균 초혼 연령대와 초산 연령은 계속 늦어지며, 출산율은 초저출산국(1%대)이라 할 정도로 떨어지고, 이혼률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요즘 젊은이들은 성인 나이가 되어서도 자녀를 보살피거나 가정을 책임지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자유롭지만 좀더 무책임할 수 있는 개인으로 살아가는 길을 택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까 몸은 예전보다 더 빨리 성숙해지지만, 정신 연령은 예전보다 더 늦게 성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특히나 이렇게 철없는 아이처럼 행동하고 처신하는 젊은 층이 많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까지도 암울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이다. 사실 지금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기 권리는 악착같이 주장하지만, 자기 의무는 다하지 않고, 타인에 대한 배려나 관용적 태도는 너무 적게밖에 베풀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지금도 철학자 홉스가 가정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보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이런 각박한 상황이 앞으로 개선될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갈수록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런데도 부모나 교사들은 아이들의 철없는 조숙함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그런 철없는 조숙한 행동들을 하도록 조장하거나 방치한 것이 편해문씨의 주장대로 바로 우리 어른들, 그중에서도 특히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난, 물신주의에 물든 40대 이하의 젊은 부모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1970년대를 분기점으로 잡는 이유는 70년대부터 우리 사회가 산업화 내지는 경제개발의 프레임에 따라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는 산업 자본주의가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하고, 대도시화가 가속화되기 시작했으며, 아파트나 상품화 같은 새로운 생활문화 유형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우리의 가치관도 바뀌기 시작했다. 인륜이나 도의, 대가족 같은 고리타분한 전통적 가치들이 서서히 붕괴되고,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황금만능주의 같은 자본주의 경제를 촉진할 수 있는 새로운 세속적 가치들이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압축적인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변화를 되새겨보거나 뒤돌아볼 새도 없이 변화 자체를 뒤쫓아가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칫 추세를 따라잡지 못하다가는 흐름에서 밀려나 새로운 문명의 혜택을 받기는커녕 패배자가 되기 십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런 변화는 지금은 "빨리 빨리"라는 지시어가 한국인의 상징처럼 되어버렸지만, 내가 초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교과서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두리뭉실한 시간 거리 관념이 우리 사회발전의 장애가 되는 듯이 이야기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그 격세지감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또 대학강의 시간에 만약 기성복을 사 입었는데, 길을 가다가 자기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과 마주친다면 얼마나 겸연쩍겠냐고 하셨던 교수님 말씀도 잊히지 않는다. 70년대 후반인데도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계는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문화였던 것이다. 하지만 경제성장이 일단 자리를 잡고 나자  수공업적인 구시대 의식은 기계생산의 신시대 의식에게 그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이후,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어 사람들은 기계생산이 만들어낸 모든 새로운 것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한편에서 보면 개성이라곤 하나 없는, 그야말로 성냥곽이나 다름없는 집인데, 사람들은 허름한 단독주택의 불편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아파트의 편리성에 매료되었고, 그 규격화된 양식이 매매를 편리하게 하여 자산으로서의 유용성을 극대화한다는 사실에 매료되었다.  나아가 온갖 새로운 가전제품들, 의류와 식품류의 기성제품들, 그외 생활의 편의를 도모해주는 온갖 물품들, 신상품들에도...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물품을 사는 것으로 자기 실현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첨단 IT 기기들을 빨리 받아들이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경제개발 이후 이렇게 새로운 물품의 구입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새로운 물품의 사용을 자기실현과 동일시하는 한국적 소비문화의 특수성이 그 한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운 상품들을 끊임없이 구입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고, 그래서 어떡하든 돈을 벌어야 했다. 어느 순간 우리 사회는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고, 마침내 이렇게 해서 우리 사회의 물신주의, 황금만능주의는 그 순환고리를 완성했다.  그리고 돈의 가치가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공유하는 가치가 되자 이제까지는 전면적인 상품화나 세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영역들, 사교육을 비롯한 교육서비스와 의료서비스, 심지어는 농어업 영역들까지 상품화가 되거나 돈의 액수에 따라 서비스의 양과 질이 세분화되면서 물신주의의 순환고리는 지금까지도 계속 강화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이 물신주의의 폭탄을 본격적으로 맞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 이후에 출생한 세대들인데, 3, 40대인 이들은 지금 젊은 부모 세대가 되어 있고, 이들의 자녀들은 유아에서부터 10대에까지 걸쳐 있다. 이 아이들은 유아일 때부터 엄마와 함께 대형마트에 들러 물건을 구입했고, 따라서 돈만 있으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관념에 어릴 때부터 세뇌당해왔다. 그리고 뭔가를 돈 주고 사는 것이 엄마 아빠를 가장 즐겁게 한다는 걸 옆에서 보고 자랐다.

 

부모가 이 아이들에게 다른 가치를 가르치지 않았다면, 이 아이들이 바라는 바와 갈 길은 뻔하다. 어떡하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이 아이들의 유일한 꿈일 것이고, 돈을 쓰는 것이 이 아이들의 유일한 낙일 것이며, 돈을 잘 벌 수 있는 직업이 이 아이들의 유일한 진로일 것이다. 하지만 너도나도 똑같은 목표를 향해 달릴 것이기에, 달려가는 동안 이미 치열한 경쟁이 벌어질 것이고, 마지막 결전의 자리에서는 피터지는 전투까지 치뤄야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렇게 물신주의에 물든 사람은 자신의 정신적 성숙을 도모할 필요가 없다. 굳이 힘들게 정신적 성숙을 위해 노력하지 않더라도 돈만 벌면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2~30대 청년층들이 일부 경험한 때이른 '조숙'과 뒤늦은 '성숙' 현상은  적어도 앞으로 20년 동안은 그 뒷 세대들의 경우 더 증폭되어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데, 문제는 우리 사회가 과연 이 철없는 젊은이들로 인한 사회혼란을 감당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아마 현재의 추세 그대로 가면, 현재의 추세가 증폭되는 식으로 나타나면 그 아비규환 같은 세상을 감당할 사람은, 설사 정부 당국이라 해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그 방법은 지금이라도 부모와 교사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물신주의와 경쟁 신화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제대로 훈육하고 교육하는 것이다.



2014. 11. 17.


(시간이 없어 다음주에 이어서 쓰겠습니다.)

 



날짜

2014. 11. 1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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