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함이란 감정의 그늘 1
- 금안당
억울함이란 감정은 '(사회적) 관계'에서만, 그중에서도 주로 비교를 통해서만 형성되는 감정이다. 따라서 희노애락애오욕의 7정情처럼 본능적인 타고난 감정이라기보다 후천적이고 사회화를 통해 형성된 감정이다. 7정 중에서 억울함과 가장 가까운 감정은 성냄(怒)이다. 싫어함(오 惡)과 욕심도 억울함과 연결될 수 있는 감정이지만, 성냄보다는 가깝지 않다.
그렇다면 억울함이 먼저일까? 아니면 화가 먼저일까? 사람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를 낸다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화가 먼저이다. 화가 더 본능적이기 때문이다. 억을함은 화를 내는 명분 중 하나로만 작용한다. 게다가 억울함이 반드시 화로만 연결되는 감정인 것도 아니다. 욕심이 커서 억울함이란 감정이 생겼을 수도 있고, 두려움이 억울함이란 감정의 가면을 쓰는 경우도 있으며, 싫어함이 억울함을 그 명분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억울함은 불가피한 감정이 아니다. 만일 세상이 정말로 공명정대하고 합리적이라면, 이런 사회의 구성원들은 억울함이란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억울함이란 감정을 굳이 문제 삼는 건, 사회적 약자 혹은 특정 상황에서의 약자들이 억울함이란 감정의 함정에 빠지는 경우를 너무나 자주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실 억울함이란 감정은 상대방에게 공격받는다고 느낄 때 생기는 감정이다. 어릴 때는 자신보다 훨씬 힘 센 부모 같은 사람이 사소한 잘못을 빌미로 자신을 몰아붙일 때(예를 들어 얄밉게 구는 동생에게 군밤 한대 때린 것을 가지고 엄마가 야단칠 때) 생기는 감정이고, 나이 들어서는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처럼 느끼는 상황에서 자주 생기는 감정이다.
이런 경우들에서 억울한 느낌이 드는 건 당연하다. 어쩌면 이런 불공정한 상황에서 억울한 느낌보다 두려움이 더 커서 감히 항의할 마음조차 낼 수 없을 정도라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비정상은 근대 이전의 전제적 사회나 현대의 독재국가들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또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가정의 아동들도 억울함보다는 두려움의 감정이 압도한다. 이렇게 보면 억울함이란 감정은 어느 정도 평등이 전제로 된 사회나 집단,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구현되고 있는 사회나 집단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감정인지 모른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가 완벽하고 공명정대하게 시행되는 사회는 아직 어디에도 없기에 억울함이란 감정도 생겨난다.(이 점에서는 비록 민주주의를 내걸지는 않았지만, 구성원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통해 개인적 집단적 억울함이 가능한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던 인디언 공동체 같은 소위 '원시부족'들이 오히려 더 민주주의적이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억울함은 힘(권력)의 불균형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힘이 강한 쪽이 주관적(혹은 편파적)으로 그 힘을 행사할 때 억울함이란 감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집단 내에서도 완전히 민주적인 가정이 아니면, 힘의 쏠림 현상이 나타나 가족 구성원 중 한 두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된다.(리더와 권력자는 다르다.) 전근대사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가정의 권력자가 주로 남자 어른이었다면, 핵가족인 지금은 여자 어른(엄마)이 더 힘이 강한 경우도 드물지 않다는 것일 게다. 하지만 가족 중 누가 더 큰 권력을 갖든 그 사람이 민주적 리더가 되지 못하고 권력자가 되면, 가정 운영에 있어서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처사들이 이루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억울함을 느끼는 구성원이 생기게 된다.
사회나 국가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사실 중요한 건 누가 권력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가 어떤 식으로 해당 집단을 운영하는가이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사회이고,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전제가 있어도, 권력을 가진 쪽이 주관적이고 불공정하게 집단을 운영하면, 그 권력이 정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억울한 사람들이 속출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미국사회에서 흑인들은 백인들보다 억울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힘을 가진 백인들이 흑인들보다 많고, 이런 사람들 중에 흑인에 대한 선입견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남이 저지르는 잘못은 잘 파악하지만, 자신이 저지르는 잘못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본디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힘을 가지고 있어서 관계에서 유리한 입장에 서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주관적이고 불공정하게 힘을 행사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잘 깨닫지 못한다. 예를 들어 왜소한 몸집의 사람이 덩치 크고 우락부락한 남자를 만나면 일단 겁부터 나지만, 힘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가진 힘 자체가 상대방에게 위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러 외면하거나 아니면 이 점을 이용한다. 그러면서도 명분상으로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듯이 가장하거나 스스로를 속인다.
하지만 힘의 관계에서 불리한 위치에 선 상대방은 그렇지 않다. 힘 있는 자의 말(명분)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 뻔히 보일 뿐 아니라, 힘 있는 자의 힘에 눌려 초라해지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상대의 잘못을 더 크게 과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억울함'의 감정도 더 강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이 억울함의 감정은 반은 정당하고 반은 과장되었다. 스스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 사연을 제3자에게 이야기했을 때, 대개의 경우 100% 공감을 받지는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당하고 편파적으로 힘을 행사한 사람보다는 덜하다 해도 억울해하는 사람 또한 주관적이고 불합리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주관성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각자 자신의 입장만 강조한다. 이 악순환에서 유리한 건 가해자쪽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아무 피해도 입지 않는 건 아니다. 피해자의 억울함이 감정의 화살이 되어 가해자를 상처 입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더 심한 건 피해자쪽이다. 피해자가 이 악순환에 갇히면 그야말로 몸도 마음도 망가진다. 그는 외형적 물질적으로 손해를 볼 뿐 아니라, 억울함과 분노와 미움과 원망과 복수심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자신을 피폐시킨다. 심지어 피해의식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억울하다는 감정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면 그건 더 억울한 노릇이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지만 관계에서 약자가 억울하다는 기분을 느끼는 건 지극히 정상이다. 그 억울함이 분노나 미움, 원망, 복수심 등을 낳아도 그 또한 정상이다. 하지만 정상은 여기까지다. 악순환의 고리에 휘말릴 만큼 억울함이나 분노나 미움, 원망, 복수심, 피해의식에 빠져버리면 이 때부터 정상의 범위를 벗어난다. 혹은 본인이 억울하게 느끼는 특정 사안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를 넘어서 상대방이 하는 여타의 행위에 대해서도 별도의 확인 절차 없이 분노나 미움, 원망, 피해의식 등으로 확대되기 시작할 때, 정상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러니까 억울함을 느낄 수는 있지만, 이 억울함이란 감정에 매몰되지 않고 이 감정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정답이다.
사실 억울함이란 감정을 극복하는 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억울함이란 감정에 매몰되어 있거나 억울함이 자신에게 익숙한 감정인 사람들은 관계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을乙의 위치에 놓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사람들은 대부분 을로만 있지 않고, 갑과 을의 위치를 왔다갔다 하지만, 을이든 갑이든, 일종의 서열로 자신을 규정하는 관계 자체가 비정상이다.) 억울한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고 억울함을 자신의 기본적인 정서로 받아들인다는 건 자신이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은 자신이 남들과 동등한 존재이고, 남들로부터 공정하고 평등하게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법률이나 공권력의 힘이 닿지 않는 사회의 비공식 영역들에서도 민주주의가 확대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억울함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감정에 매몰되면, 오히려 불공정한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 되어, 이 잘못된 상태를 오히려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예를 들어 2년 전 대리점에 대한 남양유업의 고질적인 불공정 관행이 계기가 되어 촉발된 갑질논란은 잘못된 불공정 관행을 일부 시정하는 효과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 전체적으로 갑과 을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기정사실화하는 부작용도 불러왔다. 이제 소수의 힘 있는 사람들은 갑으로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이미 인정받은 듯이 행동하고, 다수의 힘 없는 을들은 이따금씩 갑 중에서 정말 꼴보기 싫은 몇몇 사람(일테면 조현아같은?)을 향해 강렬한 분노의 화살을 날리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에 빠져 있다. (갑질 논란은 을의 '억울함'이 촉매로 작용했다.) 그리고 이제 다수의 을들은 갑의 웬만한 갑질에는 분노도 하지 않게 되었다. 일종의 자기 '세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 것이 맞는 것일까? 사실 남양유업과 대리점의 관계는 갑을이란 명칭이 붙기 전에 그냥 계약관계이다. 그 계약관계가 불공정하게 이루어진 것이 문제였다. 만일 당시 우유시장 점유율 1, 2위를 달리던 남양유업이 아닌, 업계 순위 꼴찌인 기업이나 신생 기업이었다면, 역으로 대리점측이 해당 기업에 대해 불공정거래 조건을 요구했을 것이다. 갑을관계로 말하면, 이 경우에는 대리점이 갑이고 우유회사가 을이 된다. 하지만 계약관계로 말하면, 겉보기에는 불공정한 계약일지 모르지만, 신생기업은 계약만 성사가 되면 기존의 대리점이 구축해놓은 영업망을 자신의 상품판매에 이용할 수 있다. 반면에 대리점은 '불공정한' 계약관계에서 얻게 될 초과이익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얻을 게 없는 거래이다. 그러니 이 신생기업과 대리점이 맺는 계약이 대리점에게 유리한 불공정한 계약조건이라도 놀라울 게 없다. 하지만 아무리 신생기업이더라도 대리점이 제시하는 계약조건이 도저히 감당이 될 수 없을 만큼 과하면 계약을 맺지 않으면 그만이다. 반면에 대리점 입장에서는 계약 자체가 아예 성사되지 않으면 초과이익을 올릴 기회도 사라지는 것이므로, 대리점도 요구조건을 완화하여 계약을 성사시킬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더 유리한 쪽, 더 힘 있는 쪽은 항상 있기 마련이므로, 100% 공정한 계약을 맺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이란 건 기본적으로 쌍방의 자유의사에 따라 이루어지는 약속이다. 그리고 이때 자유의사의 발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는 불공정 정도가 아니라 불법이다. 따라서 불공정이 도를 넘어서 불법적이기까지 한 상황이라면 이는 계약조건이 아니라 규칙이나 법률, 제도의 차원에서 따로 해결을 해야 한다.
하지만 불공정한 계약에서 생길 수 있는 감정인 약자의 억울함을 근거로 하여 문제 상황을 갑을 관계의 문제로 보기 시작하면, 기준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힘 있는 갑이 항상 옳은 게 아니듯이, 힘 없는 을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힘 없는 을이 느끼는 억울함이 여론의 동정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미 맺어진 계약관계에서 발생하는 책임까지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또 이렇게 갑을 관계로만 문제를 보면, 우연히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된 특정 을의 경우에는 대중의 동정을 등에 업고 어찌어찌 해서 갑의 양보를 얻어내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그 효과가 일시적이거나 일회적으로 그치고 말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유사한 다른 불공정 계약들 전반으로까지 효과가 확대되어 우리 사회의 합리성과 공정성이 좀이라도 높아질 기회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현실에서 보다시피 억울함이란 감정은 쉽게 타인의 동정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동변상련인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이 갑이 아닌 을의 위치에 자신을 놓고 억울함이란 감정을 익숙한 정서로 받아들인다. 이런 상황은 갑질논란, 갑을 관계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성되고, 사람들이 이 용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면서 더 강화되었다.(위에서 말했듯이 이것이 갑을 논란의 부작용이다.)
하지만 누구도 평생 을로만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아무리 대중의 동정을 쉽게 얻을 수 있더라도 을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사는 사람은 없다. 굳이 갑과 을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아마 대다수 사람들이 내심으로 바라는 것은 갑이 되는 것일 게다. 하지만 자칫하다가는 자신의 인간성을 망가뜨릴 수도 있는 '갑'이 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올인하는 것도 그리 선뜻 내키는 일은 아니다. 사실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갑도 을도 아닌 독립된 주체가 되는 것이다. 물질적인 부의 정도에 따라 흔들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충성도 다른 사람의 동정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자기 인생을 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억울함의 감정을 극복해야 한다.
(to be continuied)
2015.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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