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이냐, 인권이냐 

*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차용한 제목입니다.

- 멀고느린구름 


 LIST 

 ⑴ 교권이란 무엇인가?

 ⑵ 교권침해 증가, 문제는 어디에?

 ⑶ 결국, 교육민주화가 답이다. 



들어가며 


사전에서는 교권을 ‘교사로서의 권위와 권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권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는 기본적 권리’이다. 근대적 의미의 ‘인권’은 17세기 르네상스 시기에 태어나 영국의 권리장전(1689)으로부터 프랑스 시민혁명의 인권선언(1789)까지100년의 세월을 거치며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천부인권(天賦人權) 사상에 뿌리를 둔 근대적 ‘인권’은 유엔의 세계인권선언을 통해 현대 문명사회의 근간이 되었다. 1978년, 유엔인권위원회는 '국가인권기구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지침'(Guidelines for the Structure and Functioning of National Institutions)을 제정하며 세계 각 국에 독립적인 국가인권기구를 둘 것을 독려했다. 


우리나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에서 2001년 11월 25일, ‘국가인권위원회’를 설치한 이후에야 비로소 ‘인권’에 대해 국가 차원의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2010년 10월 5일,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된 것은 그로부터 9년 후의 일이다. 성인의 범주에서 논의 되던 인권을 넘어서 학생과 청소년, 그리고 어린이의 인권에 대해 비로소 공식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세계 기준의 제도를 마련하고자 한 시도는 국내에서 의외의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교권’이었다. 교사의 권리와 학생의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보장하려는 시도가 충돌하는 나라, 그것이 지금 우리 나라의 현주소였다. 



(1) 교권이란 무엇인가?


‘교사로서의 권위와 권리’ 라는 사전적 정의에 의거한다면 교권은 두 가지 측면의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하나는 ‘교사로서의 권위’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또 하나는 ‘교사로서 응당 가져야할 권리’는 무엇인가이다.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권위라는 것은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사전은 다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사로서의 권위’란, 교육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을 뜻할 것이다. 


최근 교육감 선거의 각 토론회에서도 드러났 듯이 소위 ‘보수’를 표방하고 나온 교육감들은 대개 학생인권조례로 대표되는 학생들의 인권을 제한해야만 교권이 바로잡힌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수 표방 후보들이 제한해야한다고 본 학생 인권으로는 대체로 두발 및 복장에 관한 자유, 소지품 검사, 연애 문제 등이 거론되고 있다. 


거꾸로 생각을 해보자. 학생의 두발과 복장을 단속하고, 소지품을 검사하며, 학생 개인의 연애 문제에 개입할 권한을 이른바 교권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교사의 권리가 존중되는 것을 통해 교사는 어떠한 권위를 얻게 되는가. 


사실상 보수 표방 교육감 후보들이 주장하고 있는 교권이란 것은 헌법으로 보장되고 있는 ‘신체의 자유’를 아동기 및 청소년 시절에는 교사들의 각자 판단에 따라 제한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난 시절 교사들에게 초헌법적 권한을 부여해왔다. ‘교육’이란 이름 하에 학생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심지어 폭행하는 것마저 용인해온 것이다. 여전히 구시대에서 새로운 시대로 건너오지 못한 일부 교육자들이 이런 과거의 초헌법적 관행을 ‘올바른 사제문화’니, ‘인성 교육을 위한 고육지책’이니, ‘정립해야할 교권’이니 하는 말들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 볼 일이다. 


다시 먼저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학생들의 신체를 교사들이 규제하고, 검사하고,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사의 권위란 곧 ‘전지전능한 통제자’로서의 권위가 아닐까. 우리는 다시 원초적인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겠다. 교사란 무엇인가? 교사란 전지전능한 통제자로서 학생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하는 것일까. 


학창시절 권위적인 교사들을 떠올려보면, 그분들이 늘상 하던 말이 있다. 


“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데….” 


그분들은 정녕 스승의 그림자도 함부로 밟지 못하는 서슬퍼런 교권의 회복을 바라는 것일까. 그런데 저 예라는 것도 깊이 들여다보면 번지수를 잘못 찾아든 예다. 옛 선비들이 어째서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았을까. 옛 스승들이 선비들의 머리 길이가 1cm라도 규정에 어긋나면 바리깡을 들고 고속도로를 내서 그랬던 것일까. 야구방망이로 종아리를 후려갈겼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정기적으로 책보를 풀어헤쳐서 춘화라도 찾아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까. 당연히 모두 아니다. 


옛 선비들이 스승의 그림자를 함부로 밟지 않았던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고 명백하다. 바로 스승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회복해야할 사제문화라는 것이 어찌 일제강점기 시절 군대식의 강압적인 사제문화이겠는가. 바로 그 일제가 우리에게서 뺏어 갔던 스승이 제자를 존중하고, 제자는 스승을 존경했던 조선 시대 유생들의 사제문화가 아니겠는가. 옛 스승들은 함부로 제자를 하대하지 않았으며, 제자의 비판에 늘 깨어 있었고, 제자 아끼기를 자신의 몸처럼 아꼈다. 어느 선현이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이라는 유학의 정신을 깨고 함부로 제자의 몸에 손을 댔다는 말인가. 그런 스승이 어디 역사에 이름자 하나라도 떳떳이 남길 수 있었겠나. 


보수를 표방한다는 교육자분들께서는 제대로 ‘보수’를 먼저 알고 와야 하지 않겠나.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민족을 통제하던 통제자형 일본인 교사, 친일 교사들이 어찌 우리의 전통적 스승이겠나. 그것이 어찌 우리가 보존해야할 전통적 사제문화가 될 수 있겠는가. 


‘교사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것은 단언컨데 단 한 가지밖에 없다. 교사의 권위는 오로지 학생의 존경으로만 세워지는 것이다. 학생의 공포로 세워지는 권위는 교사의 권위가 아니라 독재자나 통제자의 권위일 뿐이다. 교사 분들께 질문 드리고 싶다. 스승이 되고 싶습니까, 감독관이 되고 싶습니까. 


오랜 세월 ‘오인된 교권’에 의지해왔던 교사들이 갑작스런 변화로 겪을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어른들의 몫이지, 아이들의 몫이 아니다. 우리가 감당해야할 과제이지, 그 과제를 풀기 어렵다고 아이들에게 다시 돌리려 해서야 스승의 면이 서겠는가. 


다시 한 번 침착하게, 그리고 깊게, ‘참된 교권’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리고 우리 함께 힘을 모아서 다시 한 번 제자들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보자. 아이들이 벌벌 떨며 스승의 그림자를 피해가는 세상 말고, 아이들이 방긋방긋 웃으며 기꺼이 스승 앞에 예를 다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오랜 세월 교육계에 몸담아 온 교육자들은 물론, 새롭게 교육계에 입문하는 교육자들도 ‘학생 인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성찰할 필요가 있겠다. 



2014. 7. 1. 


* 다음 편 바로 가기 - (2) 교권침해 증가, 문제는 어디에? 



날짜

2014. 7. 2.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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