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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는 누군가의 교사가 된다



수많은 일본드라마 가운데 이 작품을 시청하게 된 이유는 교육 현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오이 유우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거나,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안경 미녀로 나온다거나 하는 부수적인 것들은 작품 선택에 결코 결정적 영향을 주지 않았다. 메인 사진을 남주인공인 '사쿠라이 쇼'로 하지 않고 아오이 유우로 한 것도 공연한 오해를 살 것 같으나 이미 그렇게 해버린 것을 돌이킬 수 없다는 차원에서 넘어가도록 하자. 이 일로 내가 적폐청산의 대상이 된다고 해도 별로 할 말은 없다.


앞서 소개한 '사쿠라이 쇼'가 연기한 남주인공 '나루미'는 35세의 평범한 영업사원이었다가 사내 정치에 휘말리며 갑자기 사립 케이메이칸 고등학교의 교장으로 발령이 나게 된다. 나루미에게 주어진 임무는 케이메이칸 고등학교의 경영 적자를 해소하라는 것이다. 불가능한 임무를 부여해 눈엣가시인 나루미를 골탕 먹이려는 카가야 전무의 계략이었다.  




대학시절 예비용으로 수학교사 자격증을 따놓기는 했지만 '교육'에 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나루미 신임 교장은 세일즈맨의 방식으로 학교를 경영하기 시작한다. 교사들에게 학교의 적자를 메꾸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강변한다거나, 신입생 유치를 위해 인근 지역의 중학교 교무주임 등을 일일이 접견하고 다니고, 은행대출을 받아 신규 투자를 하려고 한다. 


기존 케이메이칸의 교사들은 이런 젊은 교장의 행동에 강한 불만을 토로한다. 교육'만'을 생각해야 할 교사들이 불필요하게 학교 재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학교 재정까지 고민하는 것은 교사들의 몫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특히, 연차가 있는 중견 교사들은 '기존의 관행'대로 모든 일들을 처리하려고 한다. 학생모집, 학교설명회,  수업까지 어느 것도 딱히 바꿀 필요가 없다. 그대로도 별 무리 없이 학교는 유지되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루미 교장은 학교의 대외 평판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본사에서 해고 당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새로운 해법을 찾고자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점차 교육의 본질적인 요소들에 눈을 뜨게 된다. 





비록 역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한일 양국의 관계는 냉랭하지만, 일본 사회와 우리 사회는 여러 부분에서 닮은 점이 많다. 교육은 그 중의 하나다. - 일제강점기 때 이식된 일본식 (군대형) 근대 교육의 영향력이 여전히 우리 교육계의 바탕에 깔려 있다. - 학생들이 더 이상 (혹은 여전히) 학교를 사랑하지 않고, 교육의 내용과 사회의 내용은 그 괴리가 점점 심해진다. 사회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시험 성적을 올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과거의 교육은 이미 한계를 드러낸다.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는 인간'이 되기 이전에 아이들은 어떤 어른에게서도 '한 사람의 성숙한 인간'으로서 자립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학교에는 서로에 대한 혐오, 어른에 대한 불신, 미래에 대한 절망, 자기 자신에 대한 예정된 패배감이 넘쳐흐르고 있지만 교육현장의 그 누구도 섣불리 근본에서부터 이것을 바꿔내지 못한다. 


이런 일본 교육계의 문제는 우리 교육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과거에는 일본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10년 앞서 간다고 했지만 이제는 거의 그 속도가 비슷해지고 있는 추세다. 이 모든 변화의 기저에는 '저성장 사회'라는 엄연한 사회 현실이 존재한다. 


저성장 사회는 쉽게 말해 미래가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는 사회다. 아니, 해서는 안 되는 사회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우리는 이제 미래에 대한 낙관에 기대기 보다 현실을 바로 보고, 현재를 살아가는 나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 방법들을 배워가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교육은 종언을 고한 지 오래인 '코리안 드림'의 시대를 고고하게 살고 있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 


<먼저 태어났을 뿐인 나>에서 경직된 교육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나루미를 보며 나의 몇 년 전 과거를 떠올렸다. 사립 대안학교의 중등 과정 정교사로 부임해 여러가지를 개혁해보려고 혼자 고군분투했었다. 그때 내가 만약 '교장'이나 '교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뭔가를 더 바꿀 수 있었을까? 하는 공연한 아쉬움도 든다. 


아오이 유우가 맡은 교사 마시바는 자신의 벽을 가장 먼저 뛰어넘는 훌륭한 교사다



나루미가 세일즈맨의 관점에서 하려고 했던 개혁은 케이메이칸 고등학교를 고객인 학생과 학부모에게 매력적인 학교로 변화시켜, 안정적인 수업료 수익을 확보하겠다는 아주 단순한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나루미는 이어서 생각한다. 


1. 학교를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 3주체인 교사, 학생, 부모를 변화시켜야 한다. 

2. 학교의 핵심 상품은 수업이므로, 수업이 새롭고 재밌어져야 한다. -> '액티브러닝'이라는 엔터테인먼트형 교육 도입

3. 학생들이 학교를 즐거운 곳으로 여기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 동아리 활동을 강화하고, 유망한 동아리에 설비와 전문 코치를 적극 지원한다. 학교 공식 행사에 학생을 주도적으로 참여시킴.

4. 교사와 학생들이 좋아하는 학교라도 부모들이 만족하지 않으면 신입생은 늘지 않는다. -> 교사들이 직접 거리에서 전단을 돌리고, 저녁 시간마다 학교 초청 개별 간담회를 갖는다. 



'액티브 러닝'을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엔터테인먼트형 수업과 자기주도학습을 결합한 형태



나루미는 위 네 가지 매우 기본적인 사항을 적극적으로 개혁함으로써 케이메이칸 고등학교를 변화시켰다. 그렇게 변화된 케이메이칸 고등학교는 사실 거의 준 대안학교의 모습과 유사하다. - 우리 사회의 대안학교에 대한 인식이 썩 좋지 못하니 다르게 표현하면 유럽형 사립 고교의 모습에 가까워졌다고 보면 될 듯. - 나루미의 '매력적인 케이메이칸 고등학교' 프로젝트가 척척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모종의 대리만족감을 느꼈다. 나루미가 이루어낸 것들이 내가 과거 대안학교 교사로서 바꿔보고자 애썼던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이미 과거의 일이고, 이제 나는 더 이상 교단의 교사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누군가의 교사가 된다. 반드시 교단에 서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의 선배로서, 동료로서, 부모로서 가르침을 전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나루미 교장의 교육 개혁이 성공한 이유는 그가 유능한 세일즈맨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몹시 바람직한 전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위치에 섰다고 해도, 우리는 단지 '먼저 태어났을 뿐인 나'다. 





이런 시대에 왜 공부를 해야 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대학을 잘 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잖아 라는 식으로 답했던 기존 교사들과 달리, 나루미는 최대한 현실에 가까운 답을 고민해서 찾으려고 애쓰고 성심껏 학생들의 물음에 답한다. 스스로 교육자로서 완성되어 있다고 자만하고 있었던 기존 교사들에 비해, 나루미는 자기 자신이 교육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에 오히려 더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나는 선배니까, 나는 부모니까, 나는 이 일을 이미 잘 아는 사람이니까 하는 선입견을 툭 내려놓고 "그저 먼저 태어났을 뿐이야" 라고 여기며 상대의 생각을 경청하고, 현실 속에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비로소 조화로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어쩌면 나루미 교장의 개혁안에 선입견을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케이메이칸 고등학교의 교사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훌륭한 어른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이미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선입견과 기득권의 높은 벽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 나루미 교장보다 고작 한 살이 더 많다고 끝까지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한 교사의 모습은 이 드라마의 주제와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 반대로 나루미 교장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교감은 오히려 나루미 교장의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 준다. - 


솔직히 나는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오만해지려는 인간이다. 그런 속성을 타고 태어나버렸다. 솔직히 말해 아오이 유우 씨 때문에 보게 된 이 드라마 덕에 다시 한 번 내가 단지 먼저 태어났을 뿐인 거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저성장의 시대다. 여기서 성장은 비단 경제적 성장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인격도 저성장이다. 이미 어른이라고 다른 게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2018. 1. 17. 멀고느린구름.


날짜

2018. 1. 1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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