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느린구름 |  





도올 선생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존경해마지 않던 시대도 이제 저문 것 같다. 최근의 광화문 촛불 집회에서 보여졌던 주최측의 갈등 양상(도올 선생이 관계자의 양해를 구한 뒤 사회자 김제동의 진행 중간에 올라와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과정에서 발언이 길어지자 주최측에 의해 발언을 중단 당한 일)에 대한 것도 어느 쪽이 더 결례를 범한 것이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한창 노자 <도덕경>과 공자의 <논어>를 공중파에서 강의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시국대담을 나누던 시절이라면 아마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해는 저물고 저녁은 오게 마련이다. 청춘의 전반기 대부분을 도올 선생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보낸 제자의 입장에서는 안타깝지만 한 '문제적 인간'을 바라보는 다양한 견해는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문제적 인간의 문제적 작품이 영화관에 걸려 있다. 도올 선생께서 지난 1년 간 연변에 체류하며 연변대학 초빙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고구려의 유적지로 비정되는 장소들을 찾아 떠난 로드무비이다. 행운이 따라서 시사회에 초대를 받아 선생의 해설을 직접 들은 뒤에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점에서 썩 좋았다. 


첫째는 도올 선생의 위트가 전혀 녹슬지 않았다는 점이고, 

둘째는 국수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무한도전의 역사 강의보다 트렌디하다. 역사의 현장을 시종일관 쫓아가고 있지만 관객들은 사실 (외람되지만) 도올 선생의 엉덩이에 더 대단한 인상을 받고 영화관을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 중반 토굴로 들어서며 선생이 고구려 역사의 웅혼함에 대하여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중에 카메라는 토굴 입구를 꽉 채운 선생의 엉덩이를 잡는다.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 홀승골성의 광대한 규모에 감탄하는 동시에 허리가 아프다며 영험할 것 같은 바위에 그대로 드러누워버리는 식이다. 마치 카메라가 옆에 없는 것처럼 생생한 노년 도올의 모습이 그대로 보여진다. 


이런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서 돌출해 졸음을 쫓는다



이것이 단지 노년의 고단한 육체만을 전시하는 방식이었다면 숙연해지고 말았겠지만, 도올 선생의 정신과 언변은 너무나 새로운 기대와 감격으로 청춘의 육성을 쏟아낸다. 노년의 육체 속에 든 청춘의 정신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긴장감을 준다. 이는 마치 이 영화가 진정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상당수의 영화평들이 이 영화를 보고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글을 남기고 있다. 풀어서 말하자면 "이야- 우리나라(우리 민족)가 사실 이렇게 넓은 중국 땅을 다스렸던 대단한 나라였다니! 저 중국 땅이 다 우리 꺼였다니! 우리 민족은 정말 대단한 민족이야!" 라는 말이다. 도올 선생은 저 <환단고기>의 지지자들과 같은 민족부심의 부활을 노리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일까. 


북부의 추위에 고통스러워하는 도올 선생


"노년의 육체 속에 든 청춘의 정신이 묘한 대비를 이루며 긴장감을 준다. 
이는 마치 이 영화가 진정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우리가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그것을 추억하고 정신 승리의 쾌감만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지막 저녁 노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 그칠 것이다. 내가 읽어낸 도올 선생의 메시지는 바로 노년의 육체, 오래된 고구려의 땅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 노년의 육체와 고구려의 고토 속에 담긴 '청년 고구려'의 정신이었다. 


<나의 살던 고향>에서 선생의 엉덩이와 더불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한반도의 지도를 거꾸로 뒤집어 보는 장면일 것이다. 거대한 대지의 땅에서 태평양의 바다를 향해 펼쳐지는 시선. 바로 '고구려 패러다임'이다. 광활하게 뻗어내린 뿌리를 바탕으로 거대하게 솟아올라 세계를 바라보는 커다란 세계수의 모습. 어쩌면 이것이 바로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인에게까지 전해진 세계인식이 아닐까. 우리 개개인이 세계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세계인이라고 하는 인식! 고구려의 땅을 회복하는 것보다 그 인식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도올 선생은 말한다. 




"우리 개개인이 세계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세계인이라고 하는 인식! 

고구려의 땅을 회복하는 것보다 

그 인식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과제라고 도올 선생은 말한다."



중국 당국이 아무리 동북공정을 정책적으로 펼친다고 해도 중국인의 가슴에는 고구려가 없다. "고구려."라고 소리 내어 말했을 때 아무런 가슴의 울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구려!"라고 했을 때는 분명한 진동이 느껴진다. 그러니 결국 현재 중국이 고구려의 영토를 국경 안으로 보유하고 있지만, 고구려가 지녔던 정신은 우리들에게 이어져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은 '영토 확장'이라고 하는 과거의 하드웨어적 가치에 여전히 매몰되어 있지만, 우리는 '인식의 확장'이라고 하는 새로운 소프트웨어적 가치에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그 새로운 가치의 가장 기저에 '고구려 패러다임'이 있다. 미래를 우리의 것으로 주도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힘이 분명 거기에 깃들어 있다. 세계 시민의 감각으로 세계로, 다시 세계로! 



2016. 12. 20.

날짜

2016. 12. 20.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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