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느린구름 |  




개봉하던 첫 날 바로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를 보았다. 추석 연휴 기간이었다. 지금은 윤상의 음악을 듣고 있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우디 앨런 감독을 우디 앨런 감독이라고 불러본 일이 없다. 나는 항상 그를 우디 '알렌' 감독이라고 호칭했다. 지금까지 나열한 말들 사이에는 서로 아무런 개연성이 없어 보인다. 단지 나라는 사람 속에서 자연스러운 순서에 따라 흘러나온 말들이라는 것 외에는 말이다. 


<카페 소사이어티>에 대해 단 한 줄의 평만이 허락 된다면 이렇게 말하고 말겠다. 그 영화요? 첫사랑의 추억에 사로잡힌 사람의 흔한 연애담이지요. 지겹게 반복되고 변주되어 온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허락된 것은 한 줄이지만 결국 두 줄에 걸쳐 이렇게 말하고 말 것이다. 영화관을 나서며 '쳇, 뭐야?' 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 투덜거림은 영화평을 써 보자고 자리에 앉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온전히 가시지 않고 있는 것만 같다. 영화평을 쓰기 위해 선곡한 음악이 하필 윤상의 음악인 것을 보면 더더욱 말이다. 


윤상의 음악을 나는 다분히 투덜거리는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윤상의 투덜거림은 누군가를 비난하고 원망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책'에 가깝다. 윤상은 지난 사랑에 대해서 종종 내가 왜 그랬지... 우리 왜 그랬지... 지금이라면...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언젠가는...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서툴렀었지... 하며 연신 투덜거린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다시 적극적으로 할 것도 아니면서 계속 번민하고 회상한다. 그렇기에 '투덜거린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윤상의 투덜거리는 노래를 들으며 다시 우디 알렌 감독의 영화를 곱씹어 본다. 앞서 밝힌 것 처럼 나는 우디 알렌을 웹 검색어에 무수히 뜨는 것처럼 우디 앨런 감독이라고 발화해본 적이 없다. 고집스럽게도 끝까지 우디 알렌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어버렸냐면 나는 그의 이름을 우디 알렌으로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고등학생 시절에 짝사랑하던 여자아이로부터. 


"우디 알렌 영화 본 적 있어?"


라고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여자아이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고, 집으로 돌아와 우디 알렌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았다. 그때 내가 본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는 지워져 버렸다. 아무튼 영화를 본 후에는 그 여자아이를 더욱 동경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기억한다. 그런 흐름을 보면 아마도 <뉴욕 스토리>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지만 최근에 다시 보니 전혀 처음 보는 영화 같았다. 


우디 알렌 영화 본 적 있어?


안타깝게도 그 여자아이가 내게 <카페 소사이어티> 속 '보니'같은 인물이 된 것은 아니다. 허나 분명히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진짜 보니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말이다. '소사이어티(Society)'라는 단어 속에는 '상류사회, 사교계'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카페 소사이어티'는 다분히 더 나은 사회, 물질적 풍요가 있는 사회를 꿈꾸었던 1930년대 미국인들의 꿈을 담고 있는 업소명이다. 상류 사회로의 진입을 꿈꾸며 할리우드로 온 바비와 보니는 모두 당대의 평범한 미국인을 대변한다. 두 사람은 영화 속에서 모두 저마다의 방법으로 꿈에 그리던 '소사이어티'에 진입한다. 부와 명예를 얻고, 남 부럽지 않을 가정을 꾸린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들이 단 하나 가지지 못한 그 무언가를 그리워 할 때 우리는 좀 아니꼽다. 그것마저 가지려고?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인생은 적어도 누군가에게 전부 주는 법은 없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인생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그냥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별로 필요하지 않은 거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팝스타가 되고 싶은 이에게 탁월한 프리젠테이션 재능이 주어진 것과 같은 것이다. 소사이어티로의 진입이 허락된 바비와 보니, 두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단 한 가지가 무엇이었을지는 영화를 통해 확인하시길 바란다. 


소사이어티의 삶

영화의 카피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30대 중반에 진입하고 보니 마냥 낭만적으로 읽혔던 문장들도 이제는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다. 사람은 과연 자신의 인생의 어떤 일들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삶 속의 많은 선택들은 사실 A와 B 중, 도저히 B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에 A를 선택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삶의 조건들이 선택한 것이지 우리가 선택했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 일들이 참 많다. 그래서 더욱 후회와 미련이 남는다. 삶의 조건들을 무릅쓰고 라도, 내 목숨을 걸어서 라도... 이렇게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보라. 영화 속 주인공들이라고 해도 별로 대단치 않다. 그냥 우리와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되고 만다. 재미 없다. 


그러므로 나는 영화관을 나서며 '쳇, 뭐야'라고 투덜거린다. 윤상의 투덜거리는 음악을 듣는다. 그래도 우디 알렌 만은 끝까지 우디 알렌이라고 말한다. 나의 보니는 먼 과거에 있고, 나의 소사이어티는 먼 미래에 있다. (있을까?) 그러므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오직 투덜거리는 일밖에 없다. 하지만 왜 그럴까. 투덜거리면 투덜거릴수록 웃음이 나는 것은.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가슴이 시리면서도 2017년의 봄을 떠올려보게 되는 것은. 어떤 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남은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대상이 누군가이든, 어떤 꿈 속의 삶이든. 


2016. 9. 29. 

날짜

2016. 9. 30. 21:27

최근 게시글

최근 댓글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