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글은 청미래학교 1년차이던 2006년 6월에 쓰여졌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지나 예전 홈피 교사방에 제가 올린 글들을 읽어본 사람들이 거의 없으니, 필요한 걸 다시 게재했으면 좋겠다는 교사들의 의견에 따라 그 첫번째 경우로 올립니다.




애니어그램과 아이들  


 

토, 일요일, 에니어그램 1단계 강의를 4년전 쯤에 듣고 이번에 세 번째로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들었던 게 재작년 여름...

 

처음 들을 때는 긴가민가 하다가 간신히 내 성격유형을 찾아내 기분좋아 했던 기억이 있고, 두 번째 들었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좀더 잘 이해하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고, 그리고 이번에는 학부모 교육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지만, 내가 교사로서 새로운 위치에 서게 되었기 때문일까, 학부모들의 성격유형을 이해하면서 그를 통해 아이들의 모습을 더 많이 이해하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사실 풀꽃샘과 가을구름샘이 2번째로 들은 이번 강의에서 비로소 자신들의 유형을 제대로 찾아낸 것도 이번 교육의 주요한 성과라면 성과랄 수 있겠지만, 그보다 교사들의 관심은 이번 교육을 통해서 이해하게 된 점들을 아이들에게 적용해보는 게 우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제 밤에는 교사회의를 하다가 아이들 한 명 한명의 성격 유형을 추측해보기까지 했다.^^:; 물론 섣부른 판단이나 오판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해보니 아이들에 대해 더 잘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5번인 나는 뭔가 본질적인 측면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면, 그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완전히 재충전되는 듯한 느낌을 느끼곤 한다.)

 

에니어그램의 강점은 어떤 유형은 좋고 어떤 유형은 나쁘고가 아니라 어떤 유형이든 타고난 유형, 다시 말해 그냥 누구나가 인정해야 할 전제라는 데서 출발한다는 데 있다. 그 사람이 어떤 번호이든 그 유형 자체가 나쁘거나 부족한 경우는 없다.

 

이는 그 사람이 자기 유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자기 유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유형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 유형의 부정적 측면(어느 유형이나 가지고 있는)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자신의 유형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주된 이유는 (어떤 유형에 대한 세상의 선입견을 별도로 하면) 그 사람이 해당 성격유형의 부정적 측면으로 자신을 많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고, 자신의 본래 성격유형과 자신이 현재 드러내고 있는 부정적 측면을 구분해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장미꽃은 장미꽃대로, 호박꽃은 호박꽃대로 그냥 그 자체로 완벽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선입견과 달리 장미꽃은 이런저런 이유에서 꽃잎의 아름다움과 색상의 선명함만으로 벌과 나비를 유인하지 못하기에 향기까지 강하게 풍긴다. 반면에 호박꽃은 꽃잎의 크기와 색상만으로 수정에 필요한 만큼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리하여 호박꽃은 장미꽃을 부러워하는 일이 없고, 이는 장미꽃 또한 마찬가지이다. 만일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호박꽃이든 장미꽃이든 자신이 서 있는 지점에서 진화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호박꽃이 하루 아침에 장미꽃이 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상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인간만이 이 사실을 잊고 있다. 자신의 성격유형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자신의 성격유형은 자랑스럽지만, 자기 주변 사람의 성격 유형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 혹은 어떤 사람의 성격 유형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한 이 사실을 잊고 있다.

 

그리고 옆집 아이와 자기 아이를 비교하는 부모나 자기 아이의 스타일은 생각하지 않고. 적어도 이것 하나만은 해내거나 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부모, 너무 쉽게 너무 단정적으로 우리 아이의 장점은 이것이고, 우리 아이의 단점은 이것이라고 판단하는 부모도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에게, 아니 사람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가 아닌가에 있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인정해줘야 할 그 사람의 존재적 측면은 무엇일까? 에니어그램은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유형은 부정하거나 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그냥 모두가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요소라는 점을 전제함으로써 이 면에서 우리에게 나름의 답을 준다. .

 

3번 부모는 뭔가를 이뤄내는 것에 자기 삶의 무게를 둔다. 그런 3번 부모가 보기에 모든 것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뭉개두고 있는 9번 아이가 답답하기 그지없다. 자신은 먹기 싫은데 먹기를 강제하면, 먹는 것도 아니고 안 먹는 것도 아닌 자세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식탁 앞에 뭉개고 앉아 있어서, 결국 엄마 입에서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먹어.”라는 말이 나오게 만드는 게 9번 아이다.

 

그런데 3번 엄마가 쟤는 아무리 강제해도 자기 싫어하는 일은 결국 안 하는 애(다른 아이들에 비해 싫다는 내색도 강하게 하지 않으면서)라고 자기 아이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특성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고 여긴다면,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문제는 위와 같은 과정을 밟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아이에게 먹을지 말지를 물어보고, 먹지 않겠다고 하면(9번 아이는 거부의 의사표시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점까지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먹겠다고 할 때까지 그냥 놔두면 된다. 이런 과정을 밟으면 엄마도 아이도 상대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쌓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아이는 엄마의 태도에서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느낌을 갖는다.

 

하지만 성과주의적 경향성이 강한 3번 엄마는 아이에게 밥을 먹여야 한다, 그것도 몸에 좋은 음식을 먹게 해야 한다는 의식에 자신도 모르게 지배된다. 그래서 먹을지 말지를 아이에게 물어볼 때도 아이가 먹겠다고 했으면 좋겠다는, 아니 적어도 먹지 않겠다고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강요’의 느낌을 전달한다. 이렇게 되면 그렇지 않아도 공공연하게 거부하지 못하는 9번 아이는 마지못해 식탁에 앉지만, 실제로 밥을 먹는 건 아니다.

더 문제가 되는 건 이런 일이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복해서 음식과 관련하여 싫은 상황을 경험한 9번 아이는 이제 음식에 대해 선입견을 갖는다. 그래서 자신이 배가 고파도 배가 고프다는 의식보다 밥 먹는 건 싫다, 혹은 야채는 싫다는 선입견에 눌려 여전히 먹는둥마는둥 밥을 먹거나 심하게 편식을 한다.

 

에니어그램에서는 9번 유형을 움츠리는 형으로 구분한다. 움츠리는 형은 공격형이나 순응형과 달리, 자신의 호불호를 겉으로 잘 표현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강요하거나 포기하지도 않는다. 동일하게 움츠리는 형인 4번과 5번 역시 중심 기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에게 이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을 잔소리나 강요로 시킬 수는 있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이들에게 그 일을 계속해서 자발적으로 하도록 시키려면 이들이 머리나 가슴, 혹은 의지의 차원에서 그 일의 필요성을 정말로 납득할 때만 가능하다.

 

반면에 순응형인 2번과 6번과 7번은 자신의 욕구보다 다른 사람의 욕구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다. 그래서 자신이 알아서 자신의 욕구를 접는다. 겉보기에는 같은 바른생활맨으로 보이지만 공격형인 1번과 순응형인 6번은 그 사고전개가 전혀 다르다. 1번은 흐트러진 생활을 하면 무엇보다 자신이 참을 수 없기에 바른생활맨이 되지만, 6번은 자신이 흐트러진 생활을 하면, 다른 사람들도 흐트러진 생활을 할 것이고, 그런 상황은 나름의 세상 질서와 체계성을 추구하는 6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버거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에, 6번은 먼저 자신이 바른생활맨이 된다.

 

그래서 공격형은 내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의 것들까지 ‘내것’으로 소화가 되어야 모든 것을 단순화한 상태에서 본능적이고 강렬한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순응형에게는 ‘내것’에 대한 욕구가 적다, 순응형은 ‘나’라는 개체는 없어져도 ‘나’로 인해 전체나 타인이 괜찮아진다면, ‘나’는 ‘내몫’의 역할을 한 셈이다. 왕자를 위해서 물고기의 몸에서 인간의 다리로 바꾸는 고통을 견디는 인어공주가 이런 순응형의 모델이다. 하지만 인어공주의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왕자의 무심함 때문에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마는 인어공주처럼 순응형은 언제든 타인들에게서 “네가 좋아서 그런 고통을 견딘 것이지, 내가 그런 고통을 견디라는 요구를 하지는 않았어”라는 매몰찬 이야기를 들을 위험을 품고 산다.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균형을 찾아야 한다. ‘내’가 너무 강한 것도, ‘내’가 너무 죽는 것도, 움츠리는 형들처럼 나와 타인들, 혹은 세상 간의 어줍짢은 타협을 추구하는 것도 제대로 된 균형이 아니다.

 

부모나 교사가 아이들을 대할 때 아이가 이 세 가지 유형 중 어디에 속하는가를 파악하면, 도움이 된다.(아이를 조금만 관찰하면 아이의 성격유형은 파악하지 못해도, 이 세 가지 유형 중 어디에 속하는가는 파악하기 쉽다.) 그래서 공격형 아이들의 행동을 자제시키려면 “다른 사람은 놔두고 본인이나 잘 하세요”라는 충고가 적절하고, 순응형 아이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란 화두를 던져주는 게 도움이 되며, 움츠린 형 아이들에게는 특정 상황에서 가능한 선택 가지들을 제시하고 본인 스스로 분명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성격유형을 이 3가지 범주로 구분했을 때의 장점은 번호 유형으로 구분할 때보다 바라보는 사람의 선입견 혹은 호불호가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 특히 인생을 어느 정도 경험해본 어른들은 공격형과 순응형, 움츠린 형 중에 어느 것이 더 낫거나 더 좋고, 어느 것이 더 못하거나 나쁜 게 아니라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는 걸 이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시선으로 아이를 보면 된다. 말하자면 그냥 ‘내 아이의 성향은 이렇구나’라고 인정해주면 된다. 그리고 이런 선입견 없는 인정 위에서라면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감정이나 아이에 대한 판단이 실리지 않아, 아이가 부모의 충고나 조언을 받아들이기가 더 쉽다.

 

사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에게 선입견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선입견을 가지고 아이를 대한다. 부모들이나 어른들은 아이의 어떤 성향에 대해 “쟤는 왜 저렇게 느려터졌는지 몰라”, “쟤는 왜 저렇게 말만 번지러하게 할까”라는 식으로 바라본다. 근데 사실 이건 “왜”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그 아이의 타고난 성향이 그런 것이지, 왜?라고 물어봤자 대답을 찾아낼 수 없다. 게다가 이렇게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건 부모들이 아이의 그런 성향을 불만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성향에 대해 부모가 불만스런 시선을 보낼 때,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을 느끼게 되고, 이는 결국 애정결핍증으로 인한 제반 문제행동―공격적 행동이든 방어적 행동이든, 혹은 과장된 행동이든 위축된 행동이든―을 유발하게 만든다.

 

사실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욕구여서, 이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모든 행동과 말과 생각이 이 욕구에 좌우된다. 하지만 무의식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이 욕구는 의식 차원에서는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본인 자신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주변에서 보는 사람은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워낙 압도적이기 때문에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렇다면 부모의 어떤 태도가 아이의 성향을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일까? 예를 들어 똑같이 행동이 느린 아이의 태도를 놓고, “우리 아이는 굼벵이야.”라고 표현하는 경우와, “우리 아이가 좀 느긋한 편이지”라고 표현하는 경우와 “우리 아이는 참 어른스럽고 신중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각각 다르다. 첫 번째 경우는 행동이 잽싸지 못함의 단점만을 과장해서 표현한 반면, 두 번째 경우는 장점이 부각되면서도 느린 행동의 단점을 수정할 여지를 남겨둔다. 그리고 세 번째 경우는 장점을 부각시켰다는 면에서는 좋지만, 그 성격이 단점으로 작용할 경우, 수정할 여지를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이중 첫 번째 표현의 문제점은 누구나 인식할 만큼 쉽게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많은 부모들, 그중에서도 공격형 성향을 가진 부모들이나 성향에 관계없이 자기 스스로 스트레스 상황에 빠져 상대를 배려할 여유가 없어진 부모들이 생각 없이 쉽게 내뱉곤 한다. 반면에 세 번째 표현은 순응형의 부모들이, 그리고 두 번째 표현은 움츠린 형의 부모들이 자주 사용한다. (살아가면서 자기 성향의 단점을 인식하고 이를 수정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 사람들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기 아이 칭찬만 하고, 집에서는 아이에게 짜증이나 화를 내는 부모처럼 첫 번째와 세 번째의 표현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또 두 번째 표현은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구체적인 상황 문맥 속에서 보면 두 번째 역시 나름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경우도 많다.

(써다 보니 나의 5번 성향 때문에 이야기가 쓸데없이 분석적으로 늘어졌다.^^::)

 

어쨌든 이런 표현의 차이가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서 나온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이건 기술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아이에게 칭찬을 많이 하거나 아이더러 잔소리를 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반대쪽 극단으로 아이를 대해온 경우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건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부모 자신의 선입견을 털어내는 것이다.

 

그럴 때 되새겨야 할 건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건 아니라는 점과, 예를 들어 추위가 없고서는 더위도 존재할 수 없듯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도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특정 요소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호불호의 감정을 투사하는 건 에너지 낭비,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잘못된 현실인식을 불러오는 지름길이라는 경계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특히 부모와 교사는 누구나 도를 닦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의 닦이지 않은 마음과 즉자적인 태도로 인해 아이가 애정결핍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릴 수도 있으므로...


2006. 6월. 파주자유학교 교사 금안당



 

날짜

2013. 2. 2.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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