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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조영남, 박근혜, 집단지성


'집단지성'이라는 말이 여전히 유행하고 있다. 집단지성은 1910년 개미 사회를 연구하던 학자 윌리엄 모턴 휠리에 의해 창안된 개념이다. 이후 '피에르 레비'라고 하는 프랑스 미디어 철학자가 사이버 공간에 이 개념을 적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집단지성을 단순히 소개하자면 한 사람의 전문적인 개인의 지성보다 여러 다양한 계층이 모여 이룬 집단의 지성이 보다 더 훌륭한(?) 지성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2004년부터 표방된 웹 2.0은 이 '집단지성'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광고문구였고, 2003년 출범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역시 '집단지성'의 핵심 키워드인 참여를 내세운 정부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고안했다는 '민주주의 2.0'이라는 웹사이트 형식 역시 웹 2.0에서 따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집단지성'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환대를 받아 왔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이다. 


최근 영국인의 약 52%가 브렉시트에 찬성했다. 영국의 집단지성이 유럽연합으로부터의 탈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영국인들은 집단적으로 후회하고 있다. 집단지성에게 화를 낼 수는 없으니 처음 '브렉시트'를 제안하고 추동한 원인제공자들을 색출해 비난하고 있는 모양새다. 


조영남의 화투. 다수의 대중이 이 그림을 '고흐'와 같은 100년 전 후기 인상주의 작품과 같은 선상에서 바라본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건이 국내에 있다. 조영남의 화투 그림 대작 사건이다. 미학자이자 예술평론가로 오랜 시간 활동해온 전문 지성 진중권 교수가 총대를 메고 나서, 현대 미술에 있어서 그림을 대신 그리게 하는 것은 근대 이전 화가가 자기가 쓸 다른 붓을 고르는 것처럼 평이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모던아트, 팝아트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앤디 워홀 자체가 이미 자신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므로 조수에게 그림을 맡겼던 것이다. (심지어 그의 작품들은 유명인의 사진이나 광고 포스터 위에 견출지를 올리고 따라서 그려내 만들어 낸 것들이다.) 1950년대의 일이니 벌써 60년도 지난 두 세대 전의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지성으로 명명할 수 있을 국내 대중들의 약 73%가 조영남의 그림이 예술이 아니라 '사기'라고 판정했다. 


제목으로 내세운 두 현상 외에 우리 스스로도 2012년 대선에서 '집단지성'의 힘을 목격한 바 있다. 대중은 대한민국의 미래로 '박근혜 정부'를 선택한 것이다. 현재 대통령의 지지율이 30-40%대를 오가는 것을 보면 최소한 10-20% 정도의 집단지성은 자신들의 판단이 착오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또 재미난 것이 있다. 현재 박근혜 정부를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의 다수는 2002년에 '참여정부'를 미래로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말 지지율은 거의 10%대였다. 그때는 또 그때 대로 자신들이 잘못 판단했다고 여긴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더 우습다. 경제적 부를 원하는 대중들에 의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으나, 압도적으로 인기 없는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집단지성,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짐)!


이처럼 '집단지성'에 대한 거의 성스러운 추앙에 비해 나타나는 현실들은 참 초라하기 그지 없다. 한 인간이 결단을 내리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집단으로 결단을 내리고 집단으로 책임지는 게 그나마 낫다는 것일까?


나는 바로 그 점에서 집단지성의 위험성을 엿본다. 


'집단지성'은 무언가를 책임지고 싶지 않거나, 책임질 역량이 없는 리더가 택하기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라는 것이다. 이런 리더일 수록 겸손함과 인품을 내세우며 자신의 권력의지를 감추고, 조용히 지위를 유지하는 것에 천착할 가능성이 높다.(유엔에서 열심히 존재감을 감추며 오랜 세월을 보낸 인물이 살며시 떠오른다.) 누군가가 이런 유형의 리더인지 아닌지는 평소의 태도에서 종종 드러나는데, 이런 유형의 사람일수록 작은 선택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독점적으로 관철하고자 하고, 큰 결정에 대해서는 다수 구성원에게 공을 돌려버린다. 


가령,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밖에 나갈 옷을 골라 입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일에는 부모 자신의 전적인 의견을 관철하면서도, 학교를 다닐지 말지 등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은 아이에게 최종적으로 선택하라고 맡겨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이 경우 대체로 부모들은 스스로를 무척 민주적인 부모인 것으로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겠지만 실제 초래하는 결과는 '브렉시트'와 같을 것이다. (다행히 아이가 나이에 비해 매우 현명한 아이여서 훌륭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SNS 시대에 접어들 수록 오히려 '우리'보다는 '나'를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들이 생겨난다. 미래는 뭉뚱그려진 것보다 개별적 가치가 더 중요해지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집단의 결정, 특히 전문적인 영역에서의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정보량'과 '판단력', '예측력', '책임감', '직관', '플랜B 설정 능력' 등등 여러가지 '힘'이 필요하다. 전문가가 전문가인 것은 일반인에 비해서 특히 '정보량'에 있어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스스로 자기나 당신이나 아는 것은 비슷하다고 '겸손'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스스로 해당 분야에 전문가가 아님을 자임하는 것이니 그의 전문적 판단에 너무 신뢰를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 


개념적 의미의 집단지성이라도 정확하게 발휘되려면 최소한 '정보량'에 있어서는 집단지성에 참여하는 개별지성의 수준이 동등해야 한다. 누구는 1 정도의 정보량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고, 누구는 10의 정보량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한다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미래를 그릴 수밖에 없다. 브렉시트 이후 드러나는 영국인들의 상황을 보면 유럽연합 탈퇴를 선택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1의 정보량을 지녔던 사람들이고, 잔류를 선택한 사람들은 10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집단지성이란 결국 다수 대중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니, 1의 정보량을 지닌 사람들이 더 많으면 제 아무리 잘난 척 떠들어대도 1이라면 1이 되고 만다. 


만약, 10을 지닌 소수의 사람이 1을 지닌 다수 대중을 끝없이 설득해야하는 상황이라면 그게 무슨 집단지성인가. 그건 계몽주의 또는 전문가 강연회다. 집단지성을 표방한 참여정부를 이끌었던 노무현 대통령도 이렇게 유언을 남기지 않았는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고 말이다. 여기서 '깨어있는(=계몽된)'이라는 수식어를 굳이 넣은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의 영역에서 정보량이 동등하지 않은 개인들이 모여 만든 집단지성이 엉뚱한 결론을 내린 것처럼, 다른 전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의 일들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브렉시트와 같은 국제통상 및 외교분야, 법률 문제, 예술작품의 표절시비, 개인의 심리 분석, 그리고 한 아이와 사회의 미래를 다루는 교육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민중은 개, 돼지"라는 표현을 쓰고, 신분제 계급사회를 선호하는 듯한 발언을 해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기사 참고) 교육은 한 사회의 미래에 대한 비전, 교육이 아이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 과거 교육의 역사, 현재의 정치사회적 상황 등등 여러가지 정보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설계해야 할 전문적인 영역이다. 판단력과 정보량이 현저히 떨어지는 저런 사람을 앉혀놓고 얘기를 하면 이렇게 어이 없는 얘기가 나오고 마는 것이다. 



소규모 집단지성 시대?




집단지성의 유행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웹 2.0 시대도 막을 내리고 웹 3.0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집단지성이 했던 몫의 상당수는 아마도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꿰차게 될 것이다. 집단지성은 이제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한다. 지금은 오히려 책임 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지고 좀 나서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현대에 와서 이른 바 '지식인'이라고 하는 그룹의 역할이 몹시 축소된 데에는 그들의 '사회적 책임감' 결여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집단지성이 가진 장점이 분명히 있다. 전체주의적 독재나 종교적 광신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집단지성을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제 조금 더 소규모의 집단지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굳이 명명하자면 책임감 있는 전문가들의 소신 있는 집단지성이라고 해야 할까? 옛말을 되짚어 보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그러니 일단 배는 바다로 가게 한 뒤 그 항로를 살피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이와 같은 경우 대중의 역할은 이 소규모 집단지성이 낸 대안을 '검증'하는 것이다.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검토하고, 또 다른 소규모 집단지성이 낸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것 역시 살펴서 본 후 판단을 내리고 하나의 안을 '비판적으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는 비전문가인 대중이 할 최선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 이과 같은 맥락에서 나는 개별 대안학교가 '대안'이라는 모호한 집단지성 속에 포섭되기 보다는, 각 학교가 개별적인 교육의 대안모델로서 전문적이고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고 브랜드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다시 한 번 주장한다. 대안교육연대라는 것도 각 개별 학교의 대안성이 독립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할 때 '연대'가 되는 것이지, '대안교육집단'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서 몰개성화가 진행되면 그저 느리게 굴러가는 거대한 바퀴가 될 뿐이다. 


끝으로 집단지성의 결정체인 위키백과 말하는 집단지성을 발휘하기 위한 네 가지 조건을 소개한다. 과연, 여러분이 명명하고 행하는 '집단지성'이  위 조건을 충족시키는지 점검해보시길. 


집단 지성을 발휘하기 위한 조건[편집]

  • 다양성 : 다양한(성별, 나이, 직업, 취미, 가치관 등)사람들이 모여야 한다.
  • 독립성 : 타인에게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만 동조하지 않는,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분산화 :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한 곳에 집중되어서는 안된다.
  • 통합 : 분산된 지식이나 경험이 공유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2016. 7. 9. 



날짜

2016. 7. 9.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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