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불감증과 안전 강박증 

- 금안당

 

안전은, 성장은 말할 것도 없고 분배보다도 우선이다.

 

 

또 1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대형사고가 터졌다. 그 전날 천재지변임이 확실한 안나푸르나 눈사태를 뉴스에서 봤을 때도 가슴이 철렁했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 온 사회가 그렇게 '안전', '안전'을 외쳤는데도 또 안전 사고가 터지다니 참 기가 막힌다. 하지만 이번은 같은 안전 사고이지만, 세월호 참사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사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안전 사고가 아닌 요소들이 너무나 많아, '안전' 문제로만 초점을 맞추면, 오히려 참사의 원인을 밝히기가 힘들 수 있다.

 

반면에 판교 환풍구 사고는 전형적인 안전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언론들은 일제히 우리의 '안전불감증'이 불러온 사고였다는 표현을 쓴다. 외신들 또한 올 들어 일어난 경주 마리나리조트 사고와 세월호 침몰, 고양 버스터미널 화재, 장성 요양병원 화재 등을 언급하면서 우리나라의 안전 사고는 안전에 대한 규제가 급속한 경제발전을 따라가지 못한 데서 온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느슨한 법 규정, 법규 위반에 대한 가벼운 처벌, 안전문제 경시, 경제성장 우선주의"(AP 통신)가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경제성장이 우선이라는 전제에서 기업활동(?)을 저해할 수 있는 규제들을 최대한 많이 풀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규제에도 여러 종류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공무원의 관료주의적 업무 처리의 편의를 위해 설정된 규제가 있다면, 이는 푸는 게 맞다. 하지만 안전을 위한 규제라면, 이는 지금도 느슨한 편이니, 오히려 더 강화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영화 제보자가 '국익이 우선인가, 진실이 우선인가'라고 물었던 것처럼, 이 경우에도 '경제성장'이 우선인가, '국민의 생명'이 우선인가를 물어보면, 답은 명확하다. 

 

세월호 참사도 검찰은 화물 과적이니 급선회니 하는 것들이 원인이라고 발표했지만, 설사 검찰 입장대로 청해진해운측, 즉 선박의 문제라고 해도, 더 근원적인 문제는 일본에서는 고철로 취급되는 노후화된 선박을 들여와 화물선과 여객선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 잘못된 법률(해운법)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 법률 개정에 찬성했던 의원들 중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 여야 국회의원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또 이미 수명이 다한 고리원전의 수명을 10년이나 연장해주어 부산과 경남 시민들을 불안불안한 상태에서 살게 하더니, 다시 수명 연장을 거론하는 뻔뻔스런 국회의원들도 있다. 게다가 요즘은 한 달에도 몇 번씩 화학물질 누출 사고가 이곳저곳에서 터지건만, 과연 관련법으로 안전사고를 방지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을 못하는 상황이다.

 

대도시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안전 문제는 법이나 행정조치로 규제하는 수밖에 없다. 인구가 워낙 많아 한 번 터지면 대형사고가 나기 쉬운 데다가, 사람들의 안전 의식도 워낙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의 이동 범위와 방식도 워낙 넓고 다양해서, 특정 상황에 내재된 위험성을 사전에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신약처럼 그 위험성이 아직 확실하게 점검되지 않은 새로운 발명품을 사용해야 할 때도 많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반인들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위험 상황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건 누구여야 할까? 당연히 정부나 지자체가 하는 게 맞고, 국회나 지방의회는 정부나 지자체가 그렇게 행동할 근거를 법으로 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위험상황이 최대한 적게 발생하도록 해야 한다. 안전은 성장은 말할 것도 없고, 분배보다도 우선이다. 이는 개인에게 돈이나 지식보다 건강이 우선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정부와 국회는 안전을 우선으로 삼지 않고 있다. 인구가 워낙 많아 사람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던 중국처럼 우리나라도 그동안 저임금을 기반으로 하여 산업화에 성공한 데다가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이 1980년부터 시작된 '한 자녀 정책'으로 사람이 귀한 시대가 되었듯이 우리나라도 1980년대 이후로 한두 자녀가 대세인 시대로 접어들었고, 지금은 인구 감소와 노령화 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 사람의 목숨은, 특히나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의 목숨은 일차적으로는 그 가족들에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차적으로 정부와 정치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한수원에서 안전과 관계된 온갖 비리가 자행되었음이 밝혀졌을 때, 고리원전의 수명 연장도 당장 취소했을 것이고, 세월호 사건 이후 또 다시 노후 선박에 의한 사고인 홍도 유람선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공연장 사고가 그렇게 여러 번 일어났음에도 안전요원 한 명 없이 행사를 진행한 이번의 판교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삼척 주민의 85%가 원전 유치를 반대했음에도 '법적 효력이 없는 투표이므로 원전 설치를 강행하겠다'는 무대포식 발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며, 2012년 이후 구미 불산누출 사고를 비롯하여 유해물질 누출사고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사태에 '비상시 훈련' 이상의 뭔가 조처를 취했을 것이고, 박근혜 대통령이 아셈회의에서 에볼라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우리 보건 인력을 아프리카에 파견하겠다는 발언을 함부로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안전 불감증이다. 흔히들 안전 불감증이라고 하면 일반 시민들의 안전의식 부재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우리 나라에서 안전 불감증에 걸린 이들은 보다시피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 공무원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기업주들이다.

 

반대로 국민들은 국가가 안전을 책임져주지 않으니, 안전강박증에 걸린 사람들이 오히려 많다. 스스로 조심하는 것 외에는 믿을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좀이라도 위험한 상황이 예상되면 뭐든지 피하려고 한다. 그야말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서 도망가는 꼴이다.

 

세월호 사고가 나고 나서 학교 관계자들과 학부모들이 수학여행을 거부한 것도 그렇고(실제로 수학여행이 중단된 것은 교육부의 수학여행 금지 조치 때문이지만), 싸스나 조류독감처럼 치사율이 낮거나 인체 전염 가능성이 낮은 전염병에 대한 반응도 그렇고,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소고기 수입에 대한 반응도 그랬고, 연례행사처럼 된 어패류의 비브리오 식중독에 대한 우려와 말벌이나 살인진드기 같은 해충에 대한 반응 역시 과하다. 앞의 글에서 말한 세균을 99% 살균해주는 살균제를 아기들에게 함부로 사용하는 것도 이 안전강박증에서 비롯된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또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 때문에 이미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던 아프리카 흑인들까지 기피하는 행동도 참 상식적이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생활을 하는 한, 위험이 예견되는 모든 상황을 피하는 것으로 대처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랬다가는 전국민이 꼼짝없이 집에서만 생활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현명한 해결법도 아니다. 위험이 예견되는 상황을 자꾸 피하기만 하다 보면, 위기 대처능력이 길러지지 않는다. 예전에 아이들과 들살이를 가서 산행을 하다 보면, 지금까지 한 번도 산 길을 밟아보지 않은 것 같은 아이들을 볼 때가 있었다. 혹은 10대 청소년 나이인데도 해초가 붙어 있어 미끄러운 바닷가 바위를 밟는 것을 겁내는 아이도 있었다. 반대로 조심해야 할 상황인데도 부주의하게 행동하다가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는 경우들도 많았다. 어느 쪽이든 예전과 비교하면, 다양한 상황에 적응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소화할 만큼 신체 능력이 발달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연히 위험 상황에 노출되었을 때 대처 능력이 떨어져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오히려 높아진다.

 

또 이렇게 안전강박증에 걸려 있으면, 언론이나 정치인들, 혹은 거대 자본에게 조작당하기 쉬운 상태가 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작은 위험을 크게 부풀리고 큰 위험은 오히려 은폐하거나, 문제를 왜곡한다. 예를 들어 '하우스 오브 카드'라는 미드에서 보면, 교사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는데, 학교에 가지 않게 된 흑인 소년이 거리를 떠돌다 심하게 다치는 사건이 일어난다. 교사들과 대립하던 정치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용한다. 말하자면 언론을 이용해 교사들의 파업 때문에 아이가 다치게 되었다는 식으로 여론 조작을 하는 것이다. 결국 교사 노조는 백기를 들고 학교로 복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정치인의 승리다. 이런 상황은 단순히 드라마가 아니다. 우리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물론 대다수의 안전 사고는 우연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지금 권력을 쥐고 있는 쪽에 불리하다. 하지만 내 보기에 안전 사고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거나 이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는 것 같다. 안전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그 결과는 안전불감증이나 안전 강박증 뿐이다. 오히려 여야가 합심해서 같은 유형의 사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확실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럴 때만 우리 사회가 안전에 대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해결책을 추구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렇게 안전이 보장되어야 여야간의 이념이나 정책 갈등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여든 야든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는 정치는 국민으로부터 외면받을 테니 말이다.  

 

안전대책을 강구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지키기 어려운 과도한 규제도, 또 기업 등의 경제적 이해를 우선시하는 느슨한 규제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 다 쓸모가 없다. 이번 판교 사고의 경우, 내 보기에 '이 곳은 깊이 20m의 환풍구이니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표지판만 환풍구 주위 잘 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었더라도 아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환풍구 철판 위에 올라서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더 좋은 건 환풍구 주위에 철망 벽을 높이 세워 사람들이 아예 올라갈 수 없게 만들어놓는 것이지만). 이 환풍구는 본래 높이도 낮은 데다 계단 옆에 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올라설 위험이 있었는데도, 경고문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 환풍구에 올라선 사람 누구도 이것이 바닥 19m 높이의 환풍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안전대책일수록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의 눈높이에 맞는, 그래서 사용자가 안전의식을 놓치지 않고 위험 가능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도록 하는 게 효율적이다.

 

지난 7월에 호주에 관광을 가서 보니, 관광지라서 그런지 곳곳에 안전 표지판이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술을 마신 상태에서는 절대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한다든지, 악어가 사는 곳에는 절대 물가 가까이 서면 안 된다든지 하는 경고문들이 사람이 물가에 접근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호수에 사는 악어가 식인 악어가 아닌 게 증명된 경우에는 수영 금지 푯말이 없었다. 그 호수는 가파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2단 호수여서, 우리나라 사람이 보기에는 위험해보이는 곳이었는데, 오히려 수영 금지나 추락 주의 같은 경고문이 없는 것도 신기했다. 덕분에 그곳에 온 사람들은 천혜의 자연이 주는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또 자연 상태에서 대형 산불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구역 구역을 정해 미리 인공 산불을 내는 방식도 신선해보였다.  

 

사실 모든 안전 사고를 100% 방지할 방도는 없다. 하지만 기본만 잘 되어 있어도, 원칙만 지켜도 50% 이상은 방지할 수 있는 것이 안전 사고이다. 기본과 원칙이란 사람의 생명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정신이다. 그 다음으로 나머지 50%의 안전사고를 줄이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무조건적인 규제가 아니라 가장 자연스런 규제이다. 예를 들면 신호등 없는 로터리 방식이 사거리 신호등 방식보다 교통사고가 적게 나고, 사고가 나더라도 접촉 사고 정도라고 한다. 아마도 로터리 방식이 관련자 모두의 안전 의식을 깨어 있게 만드는 환경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2014. 10. 19. 



날짜

2014. 10. 20.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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