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개혁, 과연 가능한가?
- 금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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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과연 공교육은 정상화될 수 있을까? ⑵ 혁신학교는 공교육의 표준모델이 될 수 있을까? ⑶ 대안학교는 공교육의 대안이 아닌 비전이다! |
(3) 대안학교는 공교육의 대안이 아닌 비전이다!
이 집중기획을 시작할 때만 해도 대안학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번 회가 가장 부담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른 경우들보다는 익숙하고 더 많이 아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아마도 나 또한 대안학교 관계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는 쉬운 법이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라면... '객관적인'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주관' 속의 자신을 자신으로 알듯이, 이번 경우에도 그런 것 같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는 역시 힘든 법이다.
지금 와서 제목을 바꾸는 게 가능할지 모르지만, 제목부터가 뭔가 안 맞는다. '대안학교가 대안이 아닌 비전이라고? 더 정확히 말하면 "비전이다"가 아니라 "비전이어야 한다" 아닌가? 거기다 왜 대안과 비전을 대비시켰지? 대안은 뭐고 비전은 뭐지? 이곳저곳에서 대안이라고 들고 나오니까 대안이라는 표현 자체가 식상했던 건가? 아니면 현실적이지만 펼쳐 보면 빈약해보일 수도 있는 대안책보다는 뭉개뭉개 희망찬 꿈을 꿀 수 있는 비전이란 용어의 어감에 끌려서? 그래, 그러고 보니 솔직한 자기고백보다는 자기 미화에 치우칠 수 있는 표현이네... 하지만, 뭐 어때, 본디 글이란 건 글쓴이의 바람이 반영되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한참을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했다.
또 하나 고민되는 지점은 우리 사회에서 대안학교, 대안교육이란 게 아직 여리디 여린 새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교육의 주도권과 방향성을 놓고 다투는 세력의 하나가 아닌 건 물론이고, 그 영향력 또한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의 제목을 대안이 아니라 비전이라고 했던 게 겸손하거나 대안이라는 용어 자체가 식상해서라기보다 '감히' 대안이라고 나설 만큼 용감하지는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본디 자신의 모습을 다 펼쳐보일 만큼 힘을 가진 어른 같은 상대에게는 그가 보여준 현실적 모습의 '문제점'을 비판해도 논리적 비약을 하거나 잘못된 해석을 내릴 위험성이 적지만, 아직 자신의 가능성을 별반 개화시키지도 못한 어린아이 같은 대상을 놓고 잘하니 못하니 단정하는 건 누가 봐도 섣부르고 공평하지 못한 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안학교의 잠재력만 보고 미화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우리나라 대안교육은 그 역사에 비해 설익은 측면이 있다. 대안학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사설학원 같은 엘리트 교육을 지향하는 '대안학교'나 '대안교육'보다는 '종교교육'의 색체가 강한 대안학교들이 이미 상당수 존재하고, 홈스쿨, 산촌유학, 방과후 학교나 주말학교처럼 그 경계선을 명확하게 하기 힘든 다양한 형태의 '대안적' 교육행위들이 애매모호한 상태로 대안교육의 범주에 걸쳐져 있다. 또 기존 공교육의 부적응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위탁형 대안학교나 다문화가정 자녀와 샛터민 자녀 등 사회 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공교육식 '대안학교'들도 있다. 말하자면 대안교육, 대안학교라는 새싹이 채 성장하기도 전에, 그 새싹의 진짜 모습을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그 식물의 형상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이렇게 된 주요 원인이 기존 공교육이 무너진 데 있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무너진 공교육에서 이탈한 많은 아이들과 부모들이 각자 나름의 살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매년 6, 7만에 달하는 탈학교 아이들 중 반 이상은 두 번 다시 어떤 '교육관련 기관'으로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비(非)공교육적인 모든 교육행위에 대안교육이란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조기유학의 경우,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부실한 우리나라 공교육에 대한 대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안교육은 아니다. 또 부모 품을 떠나 산촌유학을 하는 아이가 시골의 공교육 학교를 다닌다면 이건 공교육인가, 아니면 대안교육인가?
그나마 대안교육이 아닌 대안학교라는 범주로 범위를 좁혀보면, 혼란의 정도가 좀 줄어들기는 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몇 가지 제외해야 할 범주들이 있다. 우선 이런저런 이유로 학업을 중단할 위기에 놓인 학생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공립대안학교와 위탁교육기관들이 그것이다. 이 경우를 우선 제외하는 이유는 이런 교육기관들은 기존 공교육을 보완하는 역할이 일차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학교들은 나름의 독자적인 교육철학을 가지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을 자신의 중심 과제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이들에게 좀 더 많은 자유를 주고 규율을 느슨하게 해서라도 학생들이 기존의 제도 교육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이다.
(이 경우를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대안학교' 범주에서 제외한다고 해서, 이런 학교들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특히 사춘기 아이들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이나 이런 교육활동을 주도하는 교사들이 행하는 헌신적인 노력을 평가절하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우리나라 교육현실에서 가장 고생하고 가장 헌신적인 교사들이 이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제외할 것이 인가이든 비인가이든 이 사회의 경쟁에서 이겨 승자가 되는 것을 교육 목표로 하는 대안학교들, 구체적으로는 좋은 대학 입학을 주요 목표로 하는 대안학교들이다. 이런 학교들은 이름만 대안학교이지, 사설학원이나 사립학교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런 학교들을 제외하는 이유는 당연히 대안적 가치, 대안적 교육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학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대안학교'가 이런 학교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학교들을 찾는 학부모들은 일반학교의 '서민적'인 교육방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돈이 좀 들더라도 좀더 효율적으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주는 학교, 내 아이를 특별대접해주는 학교를 선호한다. 기독교계 대안학교 중에 엘리트 교육을 내건 학교들, 미인가이지만 수업료가 거의 귀족학교 수준이 되는 학교들, 또 입시 학원과 유사하게 수능 대비 중심의 학교들이 이런 학교들이다. 반면에 이우학교 같은 특성화 대안학교들은 학부모들은 학교의 대입경쟁력을 보고 학교를 선택하지만, 학교는 대안적 교육철학을 우선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반드시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번째로 제외할 범주는 교육 이외의 가치, 예를 들면 종교적 가치나 정치적 가치, 공동체 가치 등등이 교육적 가치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경우이다. 말하자면 교육적 가치와 교육 활동이 다른 뭔가에 종속되어 있는 경우이다. 그래서 특정 종교, 특정 정치색, 특정 공동체 구성원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운영되는 학교는 독립적 교육기관으로서의 자율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의 분석에서 제외한다. 다만 부언하고 싶은 것은 다른 가치에 종속되는 교육기관이 잘못되었다거나 대안학교라는 이름을 써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어도 2, 3년 이상의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교육과정이 진행되지 않는 공부방 형태의 방과후 학교나 주말학교, 계절학교, 산촌유학 학교 등도 아무리 대안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해도, '학교'라는 명칭에 걸맞는 일관성과 지속성을 보장한다고 보기 힘들므로 이번 분석에서 제외한다. 이 점에서는 민들레 사랑방이나 하자 센터 등도 분석 대상에 포함되기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제외 기준의 반면이 곧 포함 기준이라고 하면, 내가 규정하는 대안학교란 '대안적 교육철학을 가지고 책임 있는 교육 행위를 통해 미성년자인 학생들의 성장과 변화를 일궈내고자 노력하는 학교 형태의 교육기관'을 말한다. 여기서 형식적인 측면, 학력이 인정되는 인가 학교인가, 아니면 미인가 학교인가, 대안학교 혹은 학교라는 명칭이 들어가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학교의 운영 주체에 따른 학부모 주도형 학교(주로 조합주의적인 방식으로 운영된다)와 교사 주도형 학교의 구별이나 특정 종교색을 가진 주체들이 운영하는 학교와 비종교적 주체들이 운영하는 학교의 구별(종교와 분리된 교육기관으로서의 독자성이 유지되는 한) 또한 이차적이라고 본다.
대안학교를 이런 식으로 성격 규정했을 때 좋은 점은 개교한 지 4, 5년 이상 된 대안학교들 대다수를 중심 범주 안에 포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대안학교의 역사는 혁신학교의 그것보다 오래되었다. 우리나라 대안학교의 첫 시작인 산청 간디학교가 1998년에 개교했으니, 상당수의 대안학교들이 7, 8년 이상, 혹은 10년 이상된 경우들이 많다. 그러고 보면 위에서 내가 대안학교를 '새싹'이라고 표현한 것은 좀 과장이 있는 셈이다. 오히려 대안학교는 10년이 넘는 역사 동안, 우리나라 교육계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비인문계 고등학교들 상당수가 특성화고등학교로 자기 재정립을 했지만, 교육법에서 '특성화고등학교'라는 고등학교의 한 종류가 생긴 후 가장 먼저 특성화고등학교로 인가받은 학교가 산청 간디고등학교이다. 사실 특성화 고등학교라는 학교 유형을 제도권 학교의 한 종류로 법적으로 인정한 것 자체가 고등 대안학교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미 이 당시부터 경쟁 중심의 공교육에서 견디다 못한 아이들의 탈학교 흐름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교육당국의 입장에서는 대안학교들이 자칫 공교육의 대안이 되도록 놔두는 것보다는 공교육 내의 대안으로 만드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던 것읻다.
그런데 문제는 탈 공교육, 탈 학교의 흐름이 고등학생만으로 한정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산청 간디학교도 본래는 중고등 과정이 함께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과정만 인가를 받게 되니, 미인가의 중학 과정과 인가 받은 고등학교 과정이 함께 있는 희안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고, 경남도 교육청의 손을 들어준 법원 판결에 따라 간디학교는 중학교 과정을 분리하여 제천으로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의 경우에는 대안학교가 그나마 인가조건을 맞추기가 아주 힘들지는 않았지만, 중학교는 그렇지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우중학교가 2006년 특성화중학교로 인가 받기 전에는 인가 받은 중학과정 대안학교가 단 한 곳도 없었던 것으로 봐서 말이다.
중학교만이 아니었다. 공교육에 대한 신뢰의 끈을 놓아버린 학부모들 중에는 초등학교 연령대나 초등학교 입학 예정 연령대의 자녀를 둔 부모들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인가 받을 가능성이 0%에 가까운 초등 대안학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수가 중고등 대안학교보다 오히려 더 많았다. 아마도 아직은 입시 부담이나 사회 경쟁력 따위를 염려할 필요가 없는 어린 연령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보다는 내 아이가 전쟁터 같이 살벌한 공교육 현장에서 상처 입고 훼손 당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더 컸다. 그리고 교육다운 교육, 바람직한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더 컸다.
여기에서 우리나라 대안학교의 주요 특징 중 하나가 생겨났다. 즉 학부모가 대안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깊이 관여한다는 특징이. 중고등 대안학교들보다 초등 대안학교들의 경우, 이 특징이 특히 강해서, 심지어 조합식 학교들도 많았다. 파주자유학교만 해도 2002년 처음 '고양자유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개교했을 때, 딱히 무슨 조합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학교 운영위는 학부모들이 중심이었다. 학부모들이 대표교사를 초빙했지만, 학교 재정과 운영권을 교사에게 넘겨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 '고자' 시절의 파자는 교권과 친권의 균형을 잡는 정관을 채택했지만, 이 아슬아슬한 균형은 개교 1년 반 후 교사 주도의 '자자학교(파자의 전전신)'와 학부모 주도의 '고양자유학교'로 학교가 분리됨으로써 결국 깨지고 말았다.
파자의 경우와 달리 상당수의 초등대안학교들은 지금도 여전히 학부모가 주도가 되어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파자는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파자도 교권과 친권의 갈등에서 확실하게 벗어나 교사 주도의 학교가 될 수 있었던 건, 초등과정인 행복한 학교와 중고등 과정인 청미래 학교가 파주자유학교란 이름으로 통합되고, 사립학교의 재단과 유사한 이사회가 학교 재정의 핵심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중고등 대안학교들은 초등 대안학교들보다는 좀 더 학교식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학부모의 영향력도 당연히 초등보다는 덜하다. 하지만 공교육의 학교들보다는 훨씬 더 학부모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미인가 학교들의 경우에는 더욱더.) 실제로 현존하는 중고등 대안학교들 중에도 학교 설립 초기에 학부모와의 갈등으로 학교가 위기에 처했던 경험을 한 학교들이 많다.
대안학교에 몸 담고 있으면서 대안학교의 부정적 측면부터 이야기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 측면만 제외하면 아이들에게 대안학교만큼 좋은 교육환경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과장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 아이들이 인격으로, 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경쟁과 욕심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사는 '상생'의 가치관을 배울 수 있는 다른 어떤 교육기관이 있는가? 소그룹으로 몇 년씩 함께 생활하면서, 부모만큼이나 아이를 잘 알게 된 교사가 아이의 내면을 이해해주고, 아이의 외면을 다듬어주면서 한 인간으로서의 자립심을 북돋아주는 교육기관이 대안학교 외에 달리 어떤 것이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의 다른 어떤 교육기관에서 아이가 위선과 두려움보다는 정직과 용기를 배우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고 인정할 수 있으며, 책임과 자유의 변증법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될 수 있는가?
이는 대안학교에 대한 미화가 아니라, 대안학교가 갖는 잠재적이면서 현실적인 능력이다. (물론 학교마다 편차가 있다. 이 때문에 잠재적 능력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대안학교가 공교육 학교들이나 사교육 기관들과 달리 이런 능력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구성원들의 심리적인 측면이 있다. 대안학교를 이끄는 교사들과 대안학교를 찾는 학부모들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욕심이 작거나 없다. 기득권을 포기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뛰어나고 잘난 제자를 길러보겠다는 욕심을 포기하고, 부모들 또한 내 자식이 남들보다 잘나기를 바라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진정성 있는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교육,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아이의 타고난 성장 잠재력을 훼손시키지 않는 교육이다. 말하자면 교사와 부모가 각자의 욕심을 내려놓고 정말로 아이를 중심에 둔 교육이기만 하면 족하다고 여긴다.
다른 분야는 어떨지 몰라도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서는 이런 태도가 옳다. 아이는 신(혹은 자연, 생명)이 내린 선물이다. 그래서 사람의 얄팍한 의도가 섣불리 개입하지 않는 것이 아이의 타고난 잠재력을 가장 많이 현실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오히려 개입이 많을수록 아이는 상처 입는다. 아직은 압도적인 외부의 힘(주로 보호자인 어른들의 그것)을 제어하거나 활용하면서 자신을 키워갈 수 있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안교육에 관심을 두는 교사들과 이런저런 이유로(두려움에서든 기득권을 내려놓는 결단에서든 기존 제도교육에 대한 좌절감에서든) 대안학교를 찾는 부모들은 사사로운 욕심을 내려놓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해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두번째로 대안학교가 갖는 환경적 측면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소규모의 '작은' 학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생활'이 있다.
교사 경험이나 다수의 사람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람 수가 많아지면 그 만남이 피상적이 된다. 말하자면 심도 있는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교사 한 명이 삼, 사십명의 학생을 감당해야 하고, 그것도 해마다 새로운 아이들을 맡아야 하는 일반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 간 만남이 깊이 있어지기가 힘들다. 어쩌다 교사로서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는 학생이 눈에 띄어도 학생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줄 만큼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다. 챙겨야 할 다른 업무와 다른 학생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또 학생들 서로간의 만남도 수가 많다고 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아니라, 소위 베프가 되는 친구는 2, 3명, 많아봐야 4, 5명이다. 나머지 다수의 반 친구들은 그냥 얼굴만 쳐다보거나 어쩌다 한 두마디 지나가는 말을 건네는 사이이다. 오히려 같은 학년, 그리고 강의식 인지학습이라는 균일화된 공동 경험만이 존재하고 이 안에서 우열을 다투기 때문에, 이런 문화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아이들은 소외 의식을 느끼기 쉽다. 사실 일반학교에서는 대다수의 아이들이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다. 왕따 현상이나 학교 폭력과도 연결되는 패거리 현상이 발생하는 건, 역으로 보면 무리에 소속되는 것으로 이 소외감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아이들의 필사적인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학생 수가 많지 않고, 다른 학년들 간에 격의 없이 어울리는 대안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학생들 간의 만남은 가족적이다. 구성원의 수가 대규모가 아니어서 오히려 더 친밀하고 더 깊이 있고 더 다양한 경험을 나눈다. 또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이 서로 믿고 마음을 나눈다. 기숙 생활까지 함께 하지는 않지만 0학년부터 고등과정인 12학년까지 한 건물에서 생활하는 파자 같은 초중고 통합 대안학교일수록 대가족 같은 분위기가 더 강하다. 그만큼 서열 의식이 없어지고 약자를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런 친밀성과 진솔한 만남은 삼시 세끼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생활하는 공동생활을 하는 것으로 한층 더 깊어진다. 중고등 대안학교들 중에는 시골에서 기숙생활을 하는 학교들이 많다. 혹은 파자처럼 기본적으로 통학을 하지만, 2년 정도의 시골생활과 기숙생활을 교육과정의 일부로 하는 학교들도 있다. 혹은 기본적으로는 통학형이지만, 간디 마을학교나 성미산 학교처럼 대안학교를 중심으로 시골형 혹은 도시형 마을 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한다. (내 보기에 대안학교 공동체성의 가장 순수한 형태는 부모와 떨어져서 아이들과 교사들만이 공동 생활하는 서머힐 형태인 것 같다. 통학을 하거나 마을 공동체를 이루는 경우는 아무래도 아이들 교육에 '부모의 영향'이라는 변수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데, 이 변수는 아이들 교육에 긍정적일 수도 있지만 부정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토대 위에서 대안학교의 세번째 특징인 진정한 민주주의 의식(혹은 시민의식)이 싹트고 훈련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이 나온다. 사실 나는 대안학교를 대안학교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 민주주의적 회의(의사결정)로 본다. (이 식구회의의 명칭은 학교마다 다르지만 여기서는 통일적으로 '전체회의'라고 표현한다.) 이 회의에서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년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하게 한 표를 갖는 의사결정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구성원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때는 끝장토론이라고 할 만큼 각자의 입장이 충분히 소명된다. 이렇게 되면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정해져 있는 규칙에 불합리성은 없는지, 도덕적 선입견이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지, 한쪽의 자유가 다른쪽의 권리를 침해하지는 않는지 세심하게 점검할 수 있다.
대안학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서머힐' 학교의 A. S. 닐도 써머힐의 교사와 학생들이 매주 한번씩 한 자리에 모여서 학교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를 의논하고 그 문제들의 해결책을 결정하는 이 '전체회의'를 무엇보다 중요시하였는데, <자유로운 아이들, 서머힐>에는, 전체회의와 관련된 사례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전체회의에서 나이 든 학생이 12세 이하 아이들에게는 흡연을 금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 안은 통과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의 전체회의에서 열 두살 난 남자아기가"규율이 엄한 학교에 다니는 애들처럼 다들 야외 변소에 가서 몰래 담배를 피우고 앉아 있는데, 이건 서머힐 전체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디고 주장하자,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의 연설에 갈채를 보내면서, 앞서 정해진 규칙을 폐기했다는 사건이다. 아이들은 도덕과 건강보다 정직함과 자유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외에도 위 책에서는 서머힐 전체회의에서 아이들이 보여주는 참신한 발상과 갈등과 문제 해결력 등에 관한 여러가지 사례가 나온다. 심지어 아이들에게 민주주의와 자유의 중요성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겼던 교장인 닐은 의도적으로 학교의 독재적 운영을 선포하기까지 한다. 결국 아이들은 힘을 합쳐 닐의 '독재체제'를 타도하고, 다시 의식 있는 학교의 주인으로 자신들을 자리매김한다. 이처럼 닐은 학교를 민주주의의 '살아 있는' 교육현장으로 삼은 것인데, 우리나라의 대안학교들도 이런 식으로 전체회의를 민주주의 교육의 일환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안학교의 전체회의를 통해 아이들은 앞으로 건강한 민주시민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솔직함과 용기, 책임감, 시행착오와 성공과 실패조차 과정으로 보는 지혜, 타인에 대한 배려와 논리를 통한 설득력, 공정성과 합리성 등 여러 미덕을 훈련한다. 그리고 대안학교의 전체회의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제도적이거나 신분상의 권위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이나 성별 등에 따른 관습적인 서열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교사들을 별명으로 부르며, 존댓말로 대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회의에서는 오히려 교사도 학생도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회의에서 정해진 규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사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사실 전체회의에서는 교사이든 학생이든 똑같이 한 표씩의 의결권만을 가지므로, 교사의 입장보다는 오히려 아이들의 입장이 반영된 결정이 내려질 때가 많다. 게다가 학교 공동체 자체나 내부 구성원들의 필요를 제외하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요구나 강제가 없다. 아이들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그 결정이 공동체(사회)라는 현실에 적용되는 경험을 한다. 이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판단과 선택이 존중받으며, 자신이 공동체(사회)의 책임 있는 주체임을 자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들이 회의를 통해 내린 결정이 항상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시행착오를 겪을 때가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파자 교사들은 이따금 회의에서 아이들의 결정을 돕기 위해 "우리가 부딪히는 대부분의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유익한가 유해한가의 문제"라고 말하곤 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로 보면 남의 것을 훔치거나 하는 등의 문제 행동에 대한 비난이나 처벌이 문제의 해결이지만, 유익 유해의 문제로 보면 그런 문제 행동의 재발 방지가 문제 해결법이 된다.
그런데 대안학교에 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은 교사들의 이런 충고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아이들도 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도덕적 재단에 익숙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공부를 하지 않고 노는 것은 '나쁜' 행동이라고 여긴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 나이가 어려서 현실 요소를 잘 감안하지 못하는 측면도 강하다. 그러니 아이들이 항상 현명하게 판단하고 지혜로운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전체회의의 힘은 아이들에게 시행착오에서 배우게 하는 데 있다. 성급하게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런 경험이 아이들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미성년자이기에 아이들은 시행착오를 저질러도 무슨 큰 일이 나거나, 무슨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비용 효율성면에서 보더라도 부모나 어른들 말을 따를 줄 밖에 모르는 모범생이었다가, 어설픈 어른이 되고 난 후에 낯선 현실을 대면하고 저지르게 되는 시행착오보다는 아마도 훨씬 나을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자유롭고 비권위적인 분위기에서 상호적이며 책임성 있는 태도로 이루어지는 대안학교의 전체회의는 다른 어떤 교육기관 혹은 교육활동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대안교육의 핵심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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