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지난 2006년에 멀고느린구름 선생님께서 개인적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글입니다. 허나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무분별한 오리와 닭의 살처분 관행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몇 가지 시사점이 있을 것 같아 다시 이곳에 옮겨와 봅니다.
살처분된 동물들을 위한 어설픈 채식주의자의 항소 (2006)
- 멀고느린구름
우리나라에서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거의 범죄에 가깝다. 설혹 소위 어른들이 있는 자리에서 함부로 "저는 채식주의자야요" 라는 고백을 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지기 십상이다. 자신만만한 불호령의 이유는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보기를 만들 수 있다.
1.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에는 없어서 못 먹었다 이놈!
2. 이 눔의 새끼! 음식은 골고루 먹어야혀!
3. 꼴값한다.
4. 너 불교냐?
5. 아니, 이 좋은 걸 왜 안 먹니? 고기는 복음이란다.
우리 모두 고기 먹고 천국 가세~ 고기 천국! 채소 지옥!!
자, 함께 고민을 해보자. 우선 1번, 없어서 못 먹었을 때도 채식주의자는 어차피 고기를 안 먹는다. 고기를 못 먹었던 게 서러워서 고기를 먹는 거라면 고기를 못 먹어서 서럽지 않았던 사람은 굳이 고기를 먹을 필요가 없다. 2번, 고기에서 얻는 영양소는 충분히 다른 채식으로도 대체 가능하다. 그리고 개인에게 건강을 권할 수는 있어도 강요할 수는 없다. 3번, 그래 나 잘났다. 4번, 요즘은 불교도 가끔 육식하더라('불살생'의 의미를 좁게 해석한 경우이다. 내가 죽이지만 않았으면 괜찮다는 입장). 5번, 너나 잘 드세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종 '다름'을 '틀림'으로 착각한다. 나는 이것이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전혀 다른 언어를 혼동하여 쓰는 우리의 언어습관과도 분명히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채식주의는 육식을 위주로 하는 삶에 대하여 다른 삶이지, 틀린 삶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옮고 그름을 따져야 한다면 오히려 과도한 육식 위주의 삶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5번의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 채식주의자가 되는 경로를 몇 가지 살펴보자. 우선, 가장 이해하기 쉬운 이유로 '체질 때문에'가 있다. 대부분의 채식주의자가 육식자들의 질문 공세에 지쳐서 이 모범답안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 답안은 이 답안 하나로 더 이상의 변명이 필요치 않기 때문에 간편하고 쌈박하다.
또 다른 경로는 무척 복잡한 경우들이다.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인한 경로가 그렇다. 가장 흔한 것이 종교, 혹은 개인의 신념에 의한 생명존중사상의 영향으로 채식주의를 선택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불살생'의 원칙에 따라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음식 문화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 경우 식물에는 생명이 없는가? 하는 복잡한 철학적 논쟁이 예상된다.
정치적 이유에 의한 채식주의는 최근들어 메인스트림에 합류했다.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세계적 패스트푸드 업체나 대한민국의 위대한 통닭체인점들 등의 대량 동물학살에 반대하는 의미로 채식주의를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앞서 말한 종교적 이유로 인한 채식주의의 모순점(식물은 생명이 아닌가)을 벗어난 지점에 있다. 이 유형의 채식주의는 개인적 선택에 의한 채식주의에서 더 발전하여 하나의 '시민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동물보호협회 등에서도 참여를 하고 있고, 새로운 대안사회를 이룩하려는 단체들도 많이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채식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채식을 전투적으로 단호히 거부하려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에도 고민거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음식점에서 만들어지는 음식에는 고기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고기를 다 걸러내고 먹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죽은 동물을 그냥 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채식주의 운동에서는 그렇게 고기들이 그냥 버려지고, 소비자들이 찾지 않아야 동물학살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분명 일리 있는 말이지만 그냥 버려지는 동물들이 좀 안쓰럽다. 또 이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육식의 대용으로 생선식을 택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생선이라고 동물이 아니고 고통이 없겠는가 하는 말을 해주고 싶다. 또 그렇게 해서 소나 돼지의 고통이 주는 대신 바다 이웃들의 고통이 커진다면 운동의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커밍아웃을 할 시간이다. 이 글의 제목이 강력히 암시하고 있듯이 나는 위의 대열 중 어디에 해당하는 정석적인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말 그대로 어딘가 어설픈 채식주의자이다. 내가 채식주의를 하는 원칙은 다른 채식주의자들과 다르다. 나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내가 죽일 수 없는 것, 즉 내가 생명에 책임질 수 없는 것은 먹지 않는다.'
나는 돼지를 닭장 속에 움직이지 못하게 가둬 놓고, 한 달 동안 영양제와 고기사료를 잔뜩 먹여서 살찌운 다음 컨베이어 벨트 속에 넣어서 난도질하게는 못한다. 물론, 소도 말도 오리도 닭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생선도 못 죽이고, 곤충도 바퀴벌레를 빼고는 함부로 못 죽인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채소를 땅에서 뽑고, 나무에서 열매를 따는 일이다.
문명사회가 되면서 인간은 자기가 하기 싫은, 하지 못하는 일은 분업을 통해서 성취했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동물을 죽이는 일을 두려워 해서, 진즉에 동물을 죽이는 직업을 분화시켰다. 우리 전통에서는 백정이라고 불리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다른 인간이 못하는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더럽고 천한 사람으로 취급 당해왔다. 생명을 죽이는 일은 자신의 인생 속에 죽은 이의 목숨을 하나 더하는 일이다. 그만큼 자기의 인생이 무거워지는 일이다. 용기 없는 문명인들은 그것을 스스로 감당하려 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백정은 어쩌면 우리의 죄를 개인의 몸으로 다 감당해내고 있는 문명의 대속자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얼마나 비겁한가.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런 인간의 비겁함이 싫어서 내가 살생할 수 없는 것은 먹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나의 채식주의 인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다. 무수한 사람들로부터 앞서 만든 보기의 1번부터 5번까지의 대사를 인물만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고등학교 때는 잠시 말랐다는 비난을 견딜 수가 없어서 1년간만 딱 눈감고 고기를 먹는 프로젝트를 가동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체중이 줄어드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고기가 살을 찌운다는 기존 학설의 오류를 발견하는 것으로 나의 육식 1주년 계획은 끝이 났다. 한국경제가 발전하면서 외식을 할라치면 어김없이 고기가 든 음식들이 등장했다. 밖에서 밥을 사먹으려고 하면 먹을만한 메뉴는 제육덮밥 따위 밖에 없었다. 이 사회는 아직 채식주의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다. 어디를 가도 고기가 보이는 이 사회에서 나 역시 가끔씩은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므로 수도자적인 자세로 채식만을 고집하기는 어려웠다.
지금의 나는 역시 웬만해서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기를 먹는다고 한다면 제육덮밥에 나오는 고기 정도이다. 그것도 정말 먹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우연히 먹을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면 먹지 않는다. 내가 1년간 육식을 섭취하는 빈도는 5개월에 1~2회쯤이다. 그리고 고기를 먹을 때는 반드시 해당 동물에게 사죄와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신에게 기도를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 그것은 인간중심주의의 한 형태라고 여긴다. 죄는 신에게 진 것이 아니라 동물에게 진 것이고, 우리에게 음식이 되어준 것은 신이 아니라 동물이지 않은가.
현대의 문명인들은 동물이 가진 생명의 무게를 지나치게 경시하고 있다. 한 예로 우리나라의 통닭산업이 이렇게 성장한 뒤에는 엄청난 닭학살이 숨어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우리나라의 꼬꼬닭 학살은 해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통닭산업 성장에는 한 기업의 닭 도살 기계 발명이 핵심 원동력으로 자리하고 있다. 기존의 양계는 닭장에서 닭을 기르고 인간이 직접 도살하여 시장에 내놓는 방식이었는데, 90년 후반부터 자랑스런 한국인이 특별한 기계를 발명하면서 혁신되었다. 기존의 기계는 컨베어 벨트 위에 닭이 든 상자(닭 머리만 구멍으로 나와 있다)를 올려놓으면 벨트가 회전하면서 닭 머리만 댕강댕강 잘라내는 방식이었다(물론 절대 마취하지 않는다). 이 방법은 머리가 잘려나간 닭의 몸을 다시 추스려 내장기관을 뽑아내야 하는 번거러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번거로움은 한 한국 발명가에 의해 사라졌다. 기존의 목을 치는 작두형식의 기계가 아니라 닭 머리를 잡아 당겨서 그대로 뽑아내는 기계를 만든 것이다. 이 방식을 쓰면 닭의 머리와 함께 닭의 척추기관을 따라 닭의 내장기관이 한 번에 뽑아져 나온다. 이 방식으로 통닭 생산공정이 간소화되면서 제품가격절하와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상상을 해보자. 컨베어 벨트 위에서 꼬꼬닭들이 영문도 모른 채 마취 없이 머리가 쑥 잡아당겨져서 죽는 모습들을... 그 모든 일이 차가운 기계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간은 버튼을 누를 뿐이다. 이제 죄를 짊어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꼬꼬닭의 목숨에 책임지지 않는다. 비겁하고 비열한 인간들. 더구나 이렇게 죽는 대부분의 꼬꼬닭들은 사실은 닭이 아니라 병아리들이다. 소위 영계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습성에 맞추어 통닭 회사들은 어린 병아리에게 성장 호르몬과 영양제를 먹여서 한 달만에 겉모습만 닭으로 만든 뒤 파는 것이다. 꼬꼬닭이 낳은 어린 병아리는 태어나자마자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상자 속에 갇혀서 먹이를 줄 때만 조그만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 수 있다. 나는 닭을 먹고 있는 인간이라면 반드시 이 장면을 상상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먹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지, 그 생명이 어떠한 삶을 살고 당신 앞에 놓여 있는지를 상상해야 한다.
과거 대평원의 거북섬 원주민(=인디언)들은 사냥을 할 때 가장 어리고 병든 동물만을 잡았다. 그리고 그 동물을 죽이기 전에는 반드시 그 동물을 향해 사과의 말과 감사의 표시를 전하고,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용서를 구한 뒤에야 동물을 잡았다. 그리고 잡아먹은 동물을 성스럽게 여기고 제를 올렸다. 또한 그 동물의 신체 모두를 빠짐없이 사용했다. 어느 것 하나 버리는 것이 없었다. 몇 백년 전의 거북섬 원주민과 지금 현대의 문명인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멀까. 대평원의 거북섬 원주민들은 환경 탓에 육식을 위주로 할 수밖에 없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의 문명인 채식주의자보다 더 아름답다.
동물을 잡아먹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로지 인간의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물의 삶을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학살하는 것, 동물의 목숨에 대해 인류 중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것은 결코 틀렸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나만의 원칙을 고수하며 어설픈 채식주의를 이어갈 것이다. 꼭 여기서 논의된 이유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이유에서 채식주의를 선택하고, 채식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계속 늘어나서 우리 지구의 동물친구들도 행복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닭상자에서 목이 뽑혀 나가고, 좁은 돼지 우리에서 인공사료를 먹으며 음식으로 키워지고, 태어날 때부터 소고기로 취급 되고, 매일매일 임신을 하고 송아지를 낳으며 우유를 착취 당하고, 양식장의 썩은 물에서 아가미를 떨고 있을 모든 동물 이웃들에게 미안하다. 미안하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 부디 우리 이웃들이 평화를 찾을 날이 빨리 오기를 빈다. 아호.
추신: 농약으로 고생하고 있을 우리 채소, 열매, 나무 등 친구들에게도 사죄의 말을 전한다. 죄송합니다.
2006. 7.1.
'멀고느린구름 > 오늘의 정치, 내일의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사 링크 - 먼 산 / 김규항 (0) | 2014.02.20 |
---|---|
정도전과 민주주의 (1) (4) | 2014.02.19 |
창조경제와 창조교육 (0) | 2014.01.27 |
홍준표 헌책방 해프닝에서 대발견! 경제적인 분노와 울트라 매니아 (0) | 2013.12.23 |
내겐 너무 어려운 자녀교육, 부모 노릇 참 힘들다(교육 상담 코너를 열며) (0) | 2013.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