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와 창조교육 

- 멀고느린구름 




  작년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라고 하는 새로운 경제 발전 모델을 제시했다. 정치권에서는 공약으로 내건 '경제민주화'는 어디로 사라졌냐며 공방이 있었지만, '창조경제'라고 하는 방향성마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창조경제라는 지향은 시의성도 있고 바람직하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저기로 갑시다! 라고 제안한 것은 좋지만 어떻게 그곳으로 갈 것이냐 하는 문제다. 정부는 벤처기업의 육성이라든지, 창조경제 사례에 해당하는 기업들을 지원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현실적으로 정부 입장에서 제안 가능한 것들이겠으나 다소 창조경제라는 타이틀에는 맞지 않게 진부해보이는 정책들이다. 


  '창조경제'라고 하면 대체로 종래의 하드웨어 산업에서 소프트웨어 중심 사업으로, 튼튼하고 쓰기 좋은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넘어서서 철학을 갖춘 디자인과 결합하여 삶의 질 자체를 향상시킬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도록 장려하자는 것일 터이다. 대중이 알기 쉽게 투박하게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애플 따라잡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말이 쉽지 이것이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다. 이름을 가져다 붙여놓기는 했지만 '창조'라는 게 돈 많이 주고, 박수쳐준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경제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경제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육'의 문제다. 창조는 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것이다. 돈은 거들 뿐. 스티브 잡스를 빼버린 애플을 상상할 수 없다. 마크 주커버그를 뺀 페이스북 역시 상상할 수 없다. 구글에는 수많은 창조적 인재들이 근무하고 있고, 구글은 그들의 창조성을 150% 끌어내기 위한 기업환경을 조성하려 애쓴다. 


  유럽이나 미국 등의 선진국들이 인재를 활용하는 방식은 이미 수 년 전부터 큰 변혁을 이루어왔다.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정석을 따르는 선도적 기업은 이제 많지 않다. 기업가들은 더 이상 사람을 직장에 붙잡아두는 것으로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며, 오히려 직원들에게 더 많은 여유와 복지, 문화적인 헤택,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줄 때 창조가 일어나고 능률이 오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진 기업들은 사람에게서 노동력을 뽑아내기보다 자연스럽게 사람의 능력이 뿜어져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여러가지 방안들을 고안해내고 있다. 이런 것이야말로 '창조경제'의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창조경제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경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사정은 다르다. 왜냐? 저쪽은 그렇게 여유를 주면 사람들이 '알아서' 즐겁게 시간을 쓰고, 문화를 향유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내게 마련이다. 하지만 똑같이 우리나라의 직장인들에게 당장 그런 여유를 준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도 당장 어디를 가야할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방황하다가, 토익 학원이나 제2외국어 학원 수강증을 들고 나타나지 않을까. 이 차이는 바로 '교육'에서 온다. 우리가 우리의 청년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으면 진정한 '창조경제'는 근원적인 벽에 부딪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부에서 나서서 자, 이제부터 그럼 우리도 창조교육을 합시다! 라고 선포하면 되는 걸까. 아서라. 전국의 영어학원 옆에 창조학원이 더 생겨날 뿐이다. '창조'를 가르친다는 것부터 발상이 잘못되었다. 


창조는 가르쳐질 수 없다. 


아니, 이게 무슨 패배주의적 발상이냐 라며 키보드에 손가락을 갖다댈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창조는 가르쳐줄 수 없다. 말을 바꿔서 못을 쾅쾅 박자면, 창의성은 가르칠 수 없다. 모니터 창을 닫아버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교육(敎育)'이라는 말의 조합을 생각해보자. 교육은 '가르치고 길러내는 일'이다. 앞서 나는 창조를 가르칠 수 없지, 길러낼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이 선생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전수해주는 일이라면, 길러내는 일은 선생 스스로도 가지지 않은 아이의 잠재성을 발견하고 발현하도록 이끌어주는 일이다. 아이의 창조성을 발현시키는 것은 역시 후자의 일이다. 즉, 길러내야 할 일이다. 


  길러내는 일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세 가지다. 첫째는 바라보는 일이다. 두 번째는 기다리는 일이다. 세 번째는 웃어주는 일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가 모종의 일이 벌이려고 할 때, 그것을 한 발짝 떨어져서 그 안전성이라든지, 경제적인 측면이라든지 하는 부분들을 함께 고민하고 지원해줄 필요는 있겠으나 하고자 하는 일 그 자체에 대해서 미리 판단하며 가부를 따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켜봐주고 있되 개입하지 않는 것. 이게 결코 만만치는 않은 일이다. 도에 이르러야 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시간의 측면이다. 단기간에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첫 번째 조항과 더불어 항상 한 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되 결과에 조급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다는 티를 지나치게 내서도 곤란하다. "너의 인생이니 네가 잘하겠지, 뭐 네가 책임질 일이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해봐~" 같은 쿨한 태도가 필요하다. 


세 번째 요소는 아주 중요하다. 아주 작은 창조라고 해도 아이가 창의성을 발휘한 부분을 짚어내고 그 부분에 대해 유쾌하게 웃어주는 일이 필요하다. 대단한 칭찬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감동을 받은 것처럼 농담에 반응하는 것처럼 "오, 이런 것도 재밌네~" 라는 식의 반응이 아이의 창의성을 춤추게 만든다. 


  지난 한 해, 대안학교인 파주자유학교의 수업에서 중등과정 아이들과 함께 각자의 '책'을 집필하는 창조적인 수업을 진행했었다. 그와 함께 중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는 국어 수업 시간을 통해 '좋은 글을 쓰는 법'에 대한 수업도 병행했다. 책 쓰기 수업에서는 대전제만 제공하고 아무 것도 개입하지 않았다. 간간히 내가 글을 쓰면서 느꼈던 것들을 재미난 에피소드처럼 소개하거나, 개별적으로 글이 진행되어가는 방향에 대한 힌트들을 조금씩 주었을 뿐이다. 퇴고에도 별로 개입하지 않았다. 반면, 국어 수업 시간에는 하드 트레이닝을 시도했었다. 매 시간 주제를 정해놓고 글을 쓰게 했고, 아이들이 작성한 글은 칠판에 옮겨 내가 직접 이것저것 고치면 더 좋아질 부분들에 대해 퇴고를 해주었다. 어느 쪽이 더 좋은 글을 썼을까? 아, 질문이 잘못되었다. 어느 쪽이 더 창조적인 글을 썼을까? 


  눈치 빠른 독자들께서는 이미 답을 아실 거다. 국어 수업시간에 하드 트레이닝을 한 아이들은 기존의 어른들이 보기에 좋은 준수한 글을 써냈다. 하지만 어딘가 틀에 박힌 글들이 양산되어 아이들 각각의 빛이 바래지고 말았다. 그러나 '책 쓰기' 수업을 통해 나온 결과물들은 저마다의 빛으로 빛났고, 아직 초보에 지나지 않는 아이들의 글에서 문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은 이 아이가 이렇게 뛰어난 생각과 문장을 가진 아이였는가 싶게 놀라운 글을 써냈다. 단연 후자 쪽이 창조적인 글쓰기였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창조교육이 자리잡는 것은 아직 요원한 일이다. 주류 교육은 앞서 이야기한 세 교육 요소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고, 당장 교육의 주체가 될 어른들부터 마음의 여유를 상실하고 있는 까닭이다. 허나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한탄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창조경제'라고 하는 화두를 기쁘게 받아들고, 한 발 더 깊게 나아가 '창조교육'의 싹을 움틔워야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교육이 우리 땅에 움트는 날,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의 숨도 트일 수 있지 않겠나. 



2014. 1. 27.   




날짜

2014. 1. 27.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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