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윤슬, 그리고 밤
- 노을(파주자유학교 교사)
새학기가 2주가 지나도록 아직 글도 올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경력교사의 느긋함인지 단순히 개인의 게으름인지 잘 모르겠다. 담임이 바뀌었으니 곧있을 학년모임에서 인사를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이 이야기로서 나를 소개하는 자리로 삼기로 했다.
주말에 주변산에 올랐다.
초입에서 몇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눈에 띈다. 반들반들 예쁜 도토리~~
그날 우리는 관찰나들이로 검단산에 올랐었다.
비 예보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화창했고
이른아침의 상쾌한 공기와 나뭇잎들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얼마나 평화롭던지.
밤새 내린 비로 숲길에서는 나무와 땅의 향기가 그득했다.
그길에서 우리는 도토리를 주우며 걸어나갔다.
아이들손에 쥐어진 도토리들은 참 커보였다.
줍는 모습들도 제각각 다 달랐다.
큰것만 골라줍는 아이,
파랗고 작은 것만 줍는 아이,
안가리고 많이 줍는 아이,
주워서 남주는 아이,
줍다말고 자기가 모은걸 감상하는 아이 등등.
그리고 돌아가면 도토리로 하고 싶은것들도 다양했다.
도토리 묵을 해달래야지,
공기놀이 하면 어떨까,
구슬치기도 재미있겠다.
우린 이걸로 교실을 꾸미자!
그래서 0학년아이들은 교실을 꾸미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0학년들이 모은 도토리로 장식하기에는 약간 작고 색이 짙었다.
거기에 각자 얼굴을 그리고 게시판에 걸어놓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산행에서 탐스럽고 고운 도토리들이 여럿 눈에 띄어서 모았다.
하나 하나 주울때 마다 녀석들의 도토리같은 머리를 만지는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이젠 가을이 깊어지는것 같다.
길섶으로 한들한들 코스모스도 보이고 햇살을 머금은 갈대도 제법 많아졌으니까.
정상부근에서 잠시 쉬는데 시원한 산들바람 한점으로 땀이 거의 다 마른다.
멀리 한강의 물결이 햇빛에 반짝인다. 우리반 아이들의 눈동자 처럼~~
나와 처음 만난 월요일 첫시간.
마주 앉으려고 하는데 자리가 정해지지 않아서 우왕좌왕한다.
그래서 자리를 정하고, 그김에 반이름도 정했다.
푸른 구름반. 무려 20개에 달하는 아이디어중에서 투표로 결정되었다.
지금은 놀이방이라는 교실명자리에 푸른구름반이라는 문패가 붙어있다.
그리고 나서야 아이들과 마주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반짝이는 눈동자들..
순서상관없이 제각각 하고싶은 말들 하던 종알거림들..
참 귀엽고 재미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닫는 모둠시간.
노을 : 내일은 담임재량시간인데 우리 교실좀 함께 꾸미고 시간 남으면 음.. 우리집 나들이 갈까?
아이들 : 꾸미기는 좋은데 놀러는 우리집으로 가자, 응?
노을 : (헐..)
중고등 아이들은 기회만 되면 교사집에 놀러가서 뜯어먹으려고 호시탐탐하는데
이 아이들은 자기집에 못데려가서 안달이네.
흠. 결국 우리집에 와서 과일먹으며 놀았지만 담엔 자기들 집에 가자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아이들의 모습이 물비늘에 녹아들어가고, 산을 돌아 내려오는 길.
예전에 밤따러 오느라 눈에 익은 구역에 들어가니 과연 밤송이들이 즐비하다.
새벽에 부지런한 분들이 밤을 다 주워가신것 같다. 텅빈 밤껍질들~~
아주 오래전. 아들이 3학년때. 그때도 유승에 살았었다. 교사숙소에서 함께.
어느날 밤을 주으러 민규와 함께 일찍 산에 갔는데 껍질만 널려있고 밤톨은 몇개 줍지 못했다.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돌아오는길에 산을 위해서 쓰레기들을 주웠다.
그런데 얼마가다가 밤나무 큰가지부분이 벼락에 통째로 떨어져 있는걸 발견했다.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산을 위해서 좋은 일을 했기에 우리가 보답을 받은거라며.
알이 굵은 밤들을 무척 많이 주워 왔었다.
얼마나 신기하던지..
길을 걷다가 다시 누가 버린 쵸콜렛껍질을 주웠다.
물론 이번에는 밤이 나타나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신 가슴이 따뜻했다.
그리고 이제 조금씩 알아간다.
내가 돌보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며 의무감을 가졌지만
실제로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힘은 아이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구김살 없는 밝은 순수함의 힘.
오늘도 산행의 구석구석에서 자연을 닮은 아이들의 모습이
나를 따뜻하게 하고 발걸음에 힘을 주지 않았던가.
내가 아이들에게 뭔가를 해준다고 착각하지 말자.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니까.
다만 나의 불안과 관념을 경계하고 아이들의 힘과 함께 공명할 일이다.
201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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