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내내 아이들 진도를 따라잡지 못한 수학 카드를 벼락치기처럼 몇 단원 만들고, 과목 평가서 쓰고 나니, 이제 진짜 방학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가 싶어 근 일주일만에 웹진을 여는 순간, '아차 이번 주말에 신입학부모 1박2일 교육 있는데 발제해야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린다. 부담감으로 잠시 마음이 휘청 하는 걸 살짝 마음을 다잡아 다시 균형을 잡는다.
 
모든 외적 강제에서 자유롭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사실 나는 사춘기 시절에 사람이 삼시 세끼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생물학적 강제로 여기고 못 마땅해했다. 그래서 앞으로 인간은 알약 한 알로 식사를 대신하면 좋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곤 했다. 한 마디로 철이 안 들었던 것이다.
 
내외적 강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할 것인가는 아마도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생 가져가는 과제일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이 또한 인간종의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우리는 온갖 관계에서 오는 너무 많은 강제들에 둘러싸여 있다.

 
인간의 자유에 압박을 가하는 내외적 강제에는 필연적 강제와 인위적 강제가 있다.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필연적 강제를 한 개인이 순순히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을 흔히들 '철이 든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아이가 사춘기에 들어서서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면, 아동기와 달리 아이는 이 필연적 강제조차 도마 위에 올려놓곤 한다.   모든 것을 자기가 주체가 되어 다시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그 필연성이 과연 자신의 자유를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사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아무리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사춘기라고 해도 필연적 강제를 인정 못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춘기 이후로 삶을 부정하고 자살을 택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이들이 삶을 택하지 않는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이유는 99% 필연적 강제가 주는 부담 때문이 아니라 필연적 강제와 인위적 강제를 구분하지 못한 채 인위적 강제가 가하는 부담까지도 삶의 필연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소한도의 인위적 강제만을 사회 규범으로 가지고 있는 원시(?) 부족에 속한 청소년들은 사춘기를 별다른 반항 없이 잘 이겨낸다. 부모와 어른 세대가 요구하는 부담과 강제가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청소년의 눈에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가 이들은 이런 필연적 강제를 나름으로 잘 소화하고 자신들을 잘 키워준 부족 어른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필연적 강제가 동물적 차원에서의 생존의 문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순히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존하되 인간답게 생존해야 할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사회에서 부모가 아이를 키울 때, 부모는 아이를 독립적인 한 영혼으로 보고, 아이의 타고난 잠재력이 최대한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상적으로 말해서 인디언 부모들은 아이가 배고픔은 물론이고 애정에도 굶주리지 않게 최선을 다하는 건 물론이고, 아이의 신체와 정신과 영혼을 건강하게 발달시키도록 온갖 세심한 배려를 놓치지 않는다. 이는 생존적 필연성 이상이고, 사회적 규범으로 요구되는 이같은 외적 강제는 아이의 양육자에게는 필연적 강제 이상이다. 어쩌면 이 경우에는 인위적 강제란 말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디언 사회가 그 사회 구성원들에게 가하는 인위적 강제가 문명 사회의 그것과 다른 차이는  본말이 전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위적 강제, 혹은 부담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필연적 강제를 더 잘 실현하기 위한 부차적 방법일 뿐이란 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인디언 사회에서는 불필요한 강제나 부담이 최소화된다. 그리고 부차적 부담 혹은 강제를 그 구성원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지만, 이는 필연성과 연결된 부담 혹은 강제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것을 그 구성원들이 잘 알고 있다.

 

반면에 문명 사회는 사회가 복잡해진 만큼 얼키고 설켜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불분명해졌다. 아직 나름의 시각이 세워지지 않은 청소년들이 판단하기에는 더욱이나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아동과 청소년의 이 '무지'를 이용하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려고 하는 너무 많은 어른들이 있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아이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문명 사회가 가부장제 문화를 기반으로 해서 성립되면서부터 나타난 현상이지만, 문제는 계급사회가 없어지고 가부장제 문화가 거의 사라진 지금에도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인위적 강제가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공공연하지는 않지만,  훨씬 더 교묘하고 훨씬 더 다양한 형태로. 게다가 사람들은 이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유의 억압을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범위는 무한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한계적 존재이고 필멸의 존재이다. 따라서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게 자유보다 더 급한다. 자유의 주장이 이따금 '배 부른 자의 사치'라고 비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자연의 법칙이란 게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한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자유를 누릴 수는 없다.

 

둘째는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점 때문에 자유의 범위가 더욱더 축소된다는 점이다. 나의 자유와 남의 자유가 충돌할 때 어떤 식으로든 자유에 제한을 가하지 않으면 사회 자체가 무너지고 만다. 이럴 때 전근대사회는  계급사회의 규칙에 따라 자유를 제한했다면, 현대사회는 법에 따라 개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

 

셋째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욕구는 정신적 혹은 영적 욕구이기 때문에, 이 욕구의 정도는 그 사회구성원의 정신적 수준에 좌우된다는 점이고, 넷째는 자유란 기본적으로  집단이 아닌 개인적 차원의 문제란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는 인간을 성장시키는 강력한 동력이다. 문명 사회에서도 인간의 역사는 자유의 확대 과정이었다. 인간은 일차적인 욕구가 채워지고 나면, 그때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는 의지가 작용한다. 사실 자유에의 의지는 인간의 타고난 천성이다. 이 때문에 어느 정도 자립능력을 갖춘 사춘기가 되면, 자유에의 의지가 강하게 발현된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는 모든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저항하게 된다.

 

하지만 자유는 정신적 욕구이니만치, 제한과 강제의 필연성이 이해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무모하게 이 면에서 자유를 주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를 제한하는 요소 중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위적 강제이다. 말하자면 이 인위적 강제들이 인간의 본원적 권리인 자유를 제한할 만큼 타당성을 갖고 있느냐이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의 경우에 자유를 필요 이상으로 제한하게 되면, 그 결과가 심각하다. 왜냐하면 자유를 제한받으면 아이들은 자신의 타고난 리듬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의 타고난 잠재력을 꽃 피울 수도 없고, 한 개인으로서 자립할 수도 없다. 아이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자유를 제한하면 한편에서는 자신의 자유를 좌지우지하는 이에 대한 의존성이 강화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데 대한 반발심과 분노가 깊어진다. 이는 개인의 경우만이 아니라 집단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 민중의 자유를 억압한 프랑스 절대왕정의 폭력성과 전제성은 결국 프랑스 혁명을 불러와 구체제를 무너뜨렸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혁명세력 중 자유라는 양날의 칼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아는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혁명은 극좌적 편향으로 흘렀고, 이는 나폴레옹의 왕정복고라는 반혁명을 불러왔다. 프랑스가 진정으로 국민의 자유를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까지는 혁명 이후 적어도 100년의 시간은 필요했던 것 같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포함하면 몇 백년이 되겠지만...)

우리나라의 4.19혁명과 5.16구데타 또한 이 시각에서 설명할 수 있다.

 

요컨대 자유로워져 보지 않은 사람은, 혹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유라는 이 양날의 칼을 다루는 훈련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자유가 갖는 강력한 힘을 제대로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어른들 대다수는 자신을 옥죄는 여러 제한들을 부담스러워하고 벗어나려고 몸부림 치다가 막상 몇 시간이라도 자유 시간이 주어지면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이럴 때 외적 강제가 다시 주어지면, 한편에서는 부담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오히려 포기와 안심을 동시에 느낀다. 그러니까 평생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외적 우연과 강제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사는 꼴이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비록 성장과정에서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해도, 그래서 나이 들어서 하는 배움이 더디다 하더라도, 자유라는 이 양날의 칼을 잘 쓰는 것이 자신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는 길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열린 마음으로 그 배움을 꾸준히 한다면, 우리도 갈수록 철 들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우리의 2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들에게 자유라는 이 양날의 칼을 사용하는 법을 배울 기회를 최대한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최대한 주기 위해서는 조작과 개입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설령 아이가 부모의 도움을 원하더라도 그런 도움이 아이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는지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 아직 육체적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이에게 너무 과한 자유는 오히려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장기적으로 보아 회복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어떤 문제를 아이의 선택에 맡길 때, 그것이 과한 자유를 주는 것인지 아닌지는 아이가 그 선택의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가에 따라 판단하면 된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는 책에 보면 할아버지가 손자인 작은나무의 교육에 세심하게 신경 쓰는 모습을 여러 면에서 볼 수 있는데, 그 중 상반되는 두 개의 사례가 있다. 하나는 작은 나무가 새벽에 일어나 할아버지와 함께 산을 오를 수 있도록, 작은 나무가 '혼자 힘으로' 잠에서 깨도록 (하지만 실제로는 할아버지가 일부러 소리를 내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은 나무가 가진 돈을 다 털어 다 죽어가는 소를 사는 사기를 당하는데도, 할아버지가 이를 지켜보고만 있는 장면이다.

 

아마도 지금의 우리나라 부모에게 위의 두 경우 중 어떤 경우에 개입하고 어떤 경우에 아이더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하는지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의 경우와 반대되는 대답을 할 것이다. 즉 아이가 일찍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정도는 아이 혼자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이고, 반대로 어른의 간지에 놀아나 사기 당하는 건 아이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이니, 어른이 나서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고 판단할 것이다.

 

물론 어느 경우에나 통하는 정답은 없다. 왜냐하면 상황이라는 외적 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의 상태라는 주요 조건이 문제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 사례에서도 할아버지의 판단이 반드시 옳고 우리나라 대다수 부모들의 판단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위의 사례만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판단에서는 어른으로서 자신의 입장보다는 아이인 손자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하는 모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자유를 함부로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13. 1. 14. 금안당 




날짜

2013. 1. 14.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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