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06년에 쓰여졌습니다.
경제라는 이름의 초고속 열차
멀고느린구름
토요일에는 도서관에 아침에 출근하기 때문에 자료실로 배달되는 조간 신문들을 정리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신문의 1면들을 슬쩍슬쩍 훑어보며 신문을 정리하는데, 눈에 쿡 박히는 기사가 있었다. 한국경제의 '10代 경제관 左편향 심각'이라는 기사이다. 1면에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 단순 설문조사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경제가 이 기사를 1면 제일 첫머리에 배치한 것은 해당 신문의 정치성향 탓일 것이다.
우선 기사의 제목부터 정치적 경향성을 띠고 있다. 경제관념을 굳이 좌우와 같은 정치적 개념으로 가르고 그것을 곧 한국의 교육이 좌편향되었으며, 이것은 곧 정부가 좌편향적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으로 이어버린다. 결국 빤히 보이는 우회적 수단으로 현 정부를 얼토당토 않게 좌파정권으로 단정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좌편향 '심각'이라고까지 말하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우리 10대들의 경제관념은 어떠한지 그들이 조사했다는 설문조사표를 통해 알아보자.
한국경제는 기업의 목표에 대하여 36.6%의 청소년이 '사회공헌'이라고 답한 것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낸다. 덧붙여 매우 유치하게 자사의 생글생글이라는 고교 경제논술 신문으로 공부한 학생은 90%가 기업의 목표는 '이윤창출'이라고 '정답'을 맞췄다며 자랑한다. 한국경제는 몇몇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하여 '이윤창출'이 정답이며 다른 답안은 매우 위험한 좌파적(넷떼즌의 표현으로는 '빨갱이 같은') 오답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자신하는 것처럼 과연 그런 질문에 정답이 존재하는 것일까. 기업의 목표가 '사회공헌'이라고 답한 청소년들은 불온한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한 악의 씨일까. '사회공헌' 이라는 답을 말한 학생들에게서 더 따뜻한 미래를 감지하는 나 역시 위험한 좌파 빨갱이인 것일까.
한국사회는 해방 이래 아무런 철학없이 '경제'라는 환영에 이끌려 반 세기를 달려왔다. 우리는 왜 늘 발전을 해야하는가. 그것도 왜 꼭 '경제발전'이어야만 하는가. 그것이 경제가 아니라 문화의 발전이나 정신의 발전, 철학의 발전, 삶의 질의 발전이어서는 안 되는가.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뚜렷한 청사진도 없이 경제라는 초고속 열차에 끊임없이 모든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그것은 비단 대한민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전세계가 경제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삶의 본질을 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과연 돈으로 사는 존재인가. 인간은 과연 경제가 없으면 그 순간 모두 멸망할 것인가?
물론 과거에도 경제는 있었고, 그에 의해 우리들은 삶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밭을 경작하거나, 사냥을 하고, 옷을 짓고 그런 행위들을 통해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교환하거나 팔거나 선물하는 일을 통해 서로의 부족한 점들을 보완했다. 원시적인 경제활동의 본질은 부족한 것의 상호보완에 있었다. 사람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경제활동을 하기보다 서로에게 부족한 부를 나누기 위해 경제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경제활동은 궁극적으로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는 핵심이 되었다.
허나 제국과 자본주의의 태동 이후 경제는 급속하게 그 본 속성을 잃고 '부의 축적'이라는 속성을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경제의 기사문을 출연시킨 것이다. 한국경제 기사에 따르자면 모든 기업은 오로지 '이윤창출'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경제의 본질 역시 '이윤창출'이며, 오직 그 경제에만 전력투자하고 있는 대한민국과 전지구 역시 오직 '이윤창출'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자면 우리 인간의 생애는 결국 '이윤창출'로 귀결된다. 우리는 태어나서 이 지구의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쌓아올려져가는 돈의 바벨탑에 몇 푼의 돈을 더 얹혀 놓는 것을 지상목표로 부여 받은 것이다. 이 지구의 모든 종교는 솔직하게 오늘날의 현실을 인정하고 신의 이름을 야훼나 와칸탕카, 시바, 상제 등이 아니라 '돈'으로 바꾸어야 한다.
현재 명실상부한 지구의 신은 '돈'이며 우리는 모두 '경제교'의 신자이며 '경제성장'보다 '자연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57.5%의 청소년들은 신의 이름으로 응징함이 옳고, 위대한 경제교의 교회인 기업의 목표를 감히 '사회공헌'이라고 지껄이는 36.6%의 '악의 씨'들은 이단자로 지정해 화형을 시키거나 해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또한 경제교의 가장 핵심적 교리인 '시장원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신실한 신앙심을 보이지 않는 자들은 속히 발본색원하여 역시 신의 이름으로 처단할지어다.
인류는 크게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현재 인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은 신이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는 우회적 표현일 따름이다.
내가 이런 글을 쓴 것을 보고 뉴라이트 운동본부 등에서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처벌할지도 모르겠다. 대단히 옳은 분들에 의해 나는 좌파, 빨갱이, 이단자, 조금 더 심하면 간첩 등등의 이름표를 줄줄이 달게 될 것이고 지구에서의 생을 끝내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나 내가 그렇게 되어도 이 지구에는 이 지구인의 오늘날 삶에 이의를 제기하는 외계인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중세의 마녀사냥과 근대의 매카시즘을 다시 끄집어 내어도 그 외계인들의 입을 다 막을 수는 없을 텐데.
한 때, 1999년 노스트다무스의 예언의 날과 비슷한 시기에 UFO를 타고 외계인들이 지구에 와서 지구인들의 잘못된 삶을 바로잡아 주고 지구인들을 낙원으로 안내할 것이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UFO는 오지 않았다. 낙원과 희망을 바랐던 몇몇 지구인들이 울었다. 아, 그런데 UFO는 정말 오지 않은 것일까. 나는 그리 여긴다. UFO가 반드시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물리적 형태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UFO는 어쩌면 투명하고 투명한 빛, 한없는 희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1999년의 그날 UFO는 실제로 지구인들의 마음 속에 내린 것은 아닐까. UFO를 마음의 활주로에 착륙시킨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외계인이 되어 지구인의 마음을 변화시킬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우리는 이미 낙원으로 가는 발걸음을 시작하였는지도 몰라. 여기 지구인이 아닌 한 외계인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장경제를 믿지 않아.
나는 사람의 체온을 믿어.
기업의 목표는 이윤창출이 아니야.
기업이 목표는 사랑이야.
인간은 경쟁하고 돈탑을 높이 쌓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야.
인간은 포용하고 높인 쌓인 욕망의 탑을 무너뜨리기 위해 태어난 거야.
2006.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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