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불러보는 사람

- 푸른지네(파주자유학교 교사)



진안으로 거주지를 옮긴 지 두 달 되었고, 봄 들살이를 다녀왔다. 이번 들살이는 제법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운전을 안 해서 그런지 전혀 피곤하지 않고 정신도 거울처럼 맑다. 규칙적인 생활과 꾸준한 금주가 내 몸의 활력을 되살려 놓았다. 집에 있을 때보다 밥을 두 배쯤 먹는데 허리는 삼십대로 돌아갔다. 새로 산 옷은 없지만 입을 수 있는 바지가 많아졌다. 

들살이를 가기 전 진안을 떠날 때, 아이들과 함께 심은 감자가 그새 싹을 틔워 뾰족뾰족 땅거죽을 뚫고 나오는 모양을 보고 왔다. 싹이 하나같이 시커멓고 두터웠다. 사람으로 치면 가슴팍이 두꺼운 사내, 민규나 무진이와 견줄 만하다. 

우리 아이들은 일을 잘한다.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벽화 그리는 일에 손을 보탰는데, 인사성 밝은 아이들이 일도 열심인 것을 보고 주민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남은 페인트로 주방으로 쓰는 컨테이너와 밴드실 벽을 예쁘게 칠하고 그림도 그려 넣었다. 진안에 오기 전에는 몰랐는데, 진안군에서 ‘파주자유학교’는 꽤 이름난 학교가 되어 있었다. 한번은 우리 아이들이 종종 가는 중국집 안천각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 자리에 앉게 되어 수인사를 하였다. 어느 학교 학생들이냐 묻는 질문에 대강 설명을 해주었더니 ‘아, 봉곡에 있는 그 학교.’ 하면서 아는 체하는 것이었다. 연배가 지긋해 뵈는 그 일행은 우리 아이들이 착해 보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칭찬은 인사치레를 넘는 수준이었다. 

착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착함을 타고났기 때문에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이 서툴거나 실수할망정 예뻐 보이는 까닭은 착하기 때문이다. 어른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착함’ 혹은 ‘선함’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공자의 말을 근거로 삼는다. 사무사(思無邪)야말로 착함의 본질이다. 보는 곳과 가는 곳의 방향이 일치하는 지점, 즉 솔직함에서 착함은 시작된다. 

아이들은 솔직하다. 속에 있는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다. 한 아이가 푸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6-7학년 동생들을 편애하는 것 같다고. 상담을 받은 반달이 제안하였다. 일주일 더 지켜본 다음에 다시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고. 일주일 후에 그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것 같다고. 그러나 그 아이는 잘못 보지 않았다. 6학년, 7학년 아이들은 내게 늦둥이 자식처럼 보인다. 새벽 두 시에 무서운 꿈을 꾸었다고 울면서 들어와 내 얕은 잠을 깨운 어린아이를 나는 꼬옥 껴안아 줄 수밖에 없다. 만약 8학년이나 9학년이 그랬다면 웃고 말았을 것이다. 편애라면 편애다. 

마당에 느티나무를 심고 트램펄린을 설치하였다. 열 살쯤 먹은 느티나무는 막 새잎을 피웠다. 이삼 년 지나면 마당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것이다. 그동안 마당은 주로 남학생들이 축구나 야구를 하는 공간이었는데 트램펄린이 들어오고부터 여학생들도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웃에 사는 꼬마들도 종종 놀러 와서 아이들과 함께 논다. 시연이와 예원이는 두 살 먹은 이웃집 아가씨 고원이를 엄청 예뻐하고 태홍이는 인아 친구인 지우에게 매우 친절하다. 무릇 사내라면 여자에게 다정다감해야 한다. 경험에게 물어보면 태홍이는 멋진 사내가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여기 또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때때로 “푸지~” 하고 나를 부른다. “왜?” 하고 물으면 “그냥 불러봤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루에 한 번쯤은 나는 '그냥 불러보는 사람’이 된다. 나는 그 멘트가 아주 마음에 든다. 그냥 불러보는 사람, 그 말에 얼마나 풍부한 뉘앙스가 숨어 있는가. 나도 종종 그렇게 아이들을 부르고 싶다. “무진.” “왜?” “그냥 불러봤어.” 





들살이는 환상적이었다. 출발지에 돌아오기까지 닷새 내내 행복한 꿈을 꾸었다.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떠들다가 이윽고 코골고 이를 갈며 잘 때까지 나는 그날 하루의 행복을 음미하며 기분 좋게 잠들었다. 이런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한 해의 행복만으로도 그간의 모든 괴로움과 앞으로 겪을 모든 불행을 상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내년에 뜻밖의 불치병에 걸려 고통 속에 죽어간다 하여도 나는 2015년에 받은 행복감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여길 것이다. 

원근이가 말했다. 진안에 온 후 푸지의 표정이 밝아졌다고. 내 생각에 그 표정은 보상 받는 자의 표정임에 틀림없다. 상을 주는 사람이 누구냐고? 우문(愚問)이다. 상을 주는 사람은 원근이를 포함한 우리 모두다. 검고 두꺼운 감자 싹은 누구에 대한 상인가? 우리 모두에게 주는 상이다. 열다섯 명의 아이들과 소나무와 반달,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주는 상. 

들살이를 알차게 기획한 우리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계획과 집행, 그 과정에서 만나는 무수한 의사결정의 순간들, 정말 잘해냈다. 어른들은 안다. 인생의 경쟁력은 결국 계획하고 실행하는 능력임을. 역할을 나누어 그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해낸 우리 아이들이 진실로 자랑스럽다. 솔직히 말하자. 어른들도 제대로 못한다. 그런데 우리 애들 정말 잘했다. 멋지지 않은가. 


사진을 꽤 찍었는데 홈피에 올라가지 않는다. 나중에 건우가 올려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으면 추억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팝꽃이 피면 여름이다. 그 여름이 기다려진다. 아무쪼록 모두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계절이 되기를... 


2015. 5. 2. 



날짜

2015. 5. 1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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