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물론 '있겠지만' 

- 멀고느린구름 



어릴 적 어른들에게 자주 듣던 관용문이 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딨겠니. 이 관용문은 주로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호출되곤 했다. 


철희와 영수는 남매지간이다. 철희는 똑똑하고 성실한 데다가 효심까지 깊다. 그러나 여자아이라서 아버지는 대를 잇기 위해 8년 터울의 영수를 끝끝내 생산해냈다. 영수는 철희가 살아생전 다녀보지 못한 태권도 학원, 피아노 학원 등등을 다니고, 먹고 싶은 것을 말하기만 하면 바로 앞에 소환시키는 마법을 쓸 수 있다. 철희는 자신이 차별 받는다고 느껴, 부모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바로 그때 이 관용문이 등장한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딨겠니. 


물론 위 이야기의 등장인물은 형제 지간이 될 수도 있고, 자매지간이 될 수도 있으며 위 아래가 뒤바뀔 수도 있다. 내 어릴 적을 회고해보자면 나는 장남이 아닌 차남이기에 형에 비해 만족할만한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물론, 형은 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몇 달 전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공항철도의 열차 안에서 재미난 상황을 목격한 일이 있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푸짐한 체격의 남자가 장녀와 차남을 데리고 열차에 앉아 있다. 앉아 있는 순서는 아빠-장녀-차남(막내로 추정)의 순이다. 장녀의 시선은 마치 똑바로 앞을 볼 수 없는 아이처럼 아빠를 향해 고정되어 있고, 아빠는 피곤에 쩔어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막내는 아빠를 보고 싶지만 누나에게 가려져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재밌는 것은 이 장녀의 행동이었다. 장녀는 시종일관 쉬지 않고 아빠에게 질문을 던졌다. 열차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질문할 기세였다. 가령 저기 지나가는 자동차의 기종은 무엇이고, 그 차를 생산한 기업의 주가는 요즘 얼마인지까지 물어볼 태세였다. 아빠는 한 번은 진지하게, 한 번은 대충대충이라는 리듬감으로 장녀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을 해줬다. 나는 마음 속으로 아빠의 인내심에 진정한 박수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곧 감지되었다. 누나의 옆에 앉은 막내가 뻐끔뻐끔 입을 열어 아빠에게 뭔가를 말을 걸려고 할 때마다, 누나는 아주 재치있는 순발력으로 동생의 말을 잘라먹으며 아빠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막내의 대화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아이는 점점 울상이 되더니 나중에는 완전히 포기해버린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놀이에 몰두했다. 누나는 동생의 모습을 흘끗 살펴보고 득의양양해져 더욱 더 질문공세의 기세를 높여갔다. 열차가 내릴 곳에 도착하여 그 이후의 상황은 알 수 없다. 


나는 그 두 남매의 미래를 한 번 그려본다. 어쩌면 이런 가정도 해볼 수 있다. 실제로 집안에서는 남자인 막내아이가 남자라는 이유로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을 수 있다. 그에 대한 강렬한 반발심으로 밖에서만은 절대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누나가 처절하게 노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이러나 저러나 남매의 향후 인생살이가 고달프긴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는 그 가족관계에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결국 부모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조금만 더 주의깊게 아이들의 태도를 살피고, 공정한 위치에 서려고 노력했다면 막내의 애처로운 신호도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고, 장녀가 의도를 가지고 계속 질문공세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항철도의 아버지는 그런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기울일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결코 부모가 모든 자식에게 공평한 애정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부모는 스스로 더 마음이 가는 자식과 그렇지 않은 자식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더이상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는 식의 조선 시대적 이야기를 반복하며 면피만 하려고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더 정이 가는 유형의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조용한 성품의 부모는 느닷없이 소란스런 아이가 자식으로 떡하니 태어나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온갖 고생을 하다가 둘째가 태어났는데 부모를 똑 닮아서 조용하고 조신하기 그지 없다면, 자연히 마음이 자신을 닮은 아이에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사람을 세뇌하지 않고서야 원래 가지고 있는 취향과 전혀 다른 취향을 심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여러 자식 중에 더 편안하고, 마음이 자연스레 이끌리는 자식이 있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 부모로서의 의무는 자신의 선호와 분리하여 공평하게 행해져야 한다. 가령, 교육의 기회라던가, 의식주 등의 복지, 가족 공동체 내에서의 권한 등은 동등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한 국가내에서 대통령이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법 질서나 사회적 합의를 넘어선 특혜를 더 주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가족 내에서 이런 공정성이 실현될 수 있다는 기준 하에서 나는 부모가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본인의 선호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편이 아이의 자연스런 성장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부모에게서 명확한 사유를 들어보지 못한 채, 실질적인 차별 대우를 받는 아이들은 속으로 자신이 무언가 부모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이 경우 경로는 두 가지다. 어차피 사랑 못 받는 바에 더욱 더 비뚤어질 테다! 코스가 하나고, 아 나의 잘못을 고치고 아주 아주 착한 아이가 되어서 부모님의 사랑을 회복해야지! 코스가 또 하나다. 어느 쪽의 길로 가든 그 아이가 자연스런 그 아이 본연의 모습대로 자라날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만다. 


전자의 길을 선택한 아이는 부모님을 원망하며, 자신이 선택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이 모두 부모에게 있다고 책임을 부모에게 모두 떠넘기며 증오와 반항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만다. 후자의 길을 택한 아이는 가면을 쓰고, 부모의 취향에 맞는 사람으로서 연기를 하며 살아가게 된다. 탁월한 연기력과 부수적인 학업능력 등을 선보일 수 있지만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모순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자신의 연기가 성공하면 성공할 수록, 그리고 그 모습을 부모가 더욱 사랑하면 사랑할 수록, 진짜 원래의 자신은 '절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였구나! 하는 확신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전자의 문제는 뚜렷한 현상으로 나타지만, 후자의 현상은 내면으로 곪아들어가 아주 한참에 후에 돌이킬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야 그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 더욱 위험하다. 


한 가지 분명히 염두해두어야 할 점이 있다. 부모가 아이의 어떤 성향에 대해서 선호를 드러낸다는 것은, 부모가 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방식이 되어야 한다. 


"아빠는 사실, 성격이 좀 말이 없고 조용한 타입이잖아? 그래서 아빠랑 성격이 비슷한 네 동생이 조금 더 대화하고 놀기가 편해. 이건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런 일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야. 다만 아직은 좀 어색하고 이해해야 할 면이 더 많은 거지. 잘 모르는 아이와 친구가 됐을 때 어때? 약간 서먹하고 조심스럽지? 아빠도 너에게는 조금 그런 기분이 들어. 그렇지만 네가 태어나서 아빠가 명랑한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서 기쁜단다. 아빠도 너를 이해하고 함께 잘 놀 수 있도록 노력할게, 너도 아빠를 조금 이해해주면 좋겠다.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도록 잘해보자."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런 이야기를 하면 아이가 어떻게 이해하겠느냐는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은 언어로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읽는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 마음은 충분히 아이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다. 이렇게 해두면 아이는 자신의 타고난 성향을 부모로부터 공인받게 되고 그 범위 내에서 적절한 애정공세를 펼칠 수 있다. 물론, 앞서 이야기했듯이 다른 대우 조건이 공정했을 경우의 이야기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물론 있다. 있는 것을 없는 셈치고 덮어버리면 문제가 더욱 악화된다. 세상의 부모가 모두 천 년에 한 번 나올 성인도 아닐진데 어떻게 모두를 완벽히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다만 모두 그 성인의 사랑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애쓸 뿐이다. 참으로 애쓰는 모습은 결코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아름답고 진실한 것이다. 


2014. 12. 9. 


날짜

2014. 12. 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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