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얼마나 기다려야 좋을까 

- 멀고느린구름 



우리나라의 공교육과 대안교육의 한 갈래인 자유학교 계열의 자유교육 간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역시 '기다림의 여유'가 아닐까 싶다. 요새의 공교육 속에 기다림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교사도 아이도 부모도 모두 즉각적인 결과를 바라고, 꾸준한 과정 속에서 미묘한 변화하는 모습들을 진득하게 지켜보는 기다림의 여유가 없다. 따라서 곧바로 성과를 낼 수 있는 아이들에게만 '천재, 영재, 인재'의 수식어가 돌아간다. 아직, 제 길을 찾지 못했거나, 배움에 미처 흥미를 못 느끼고 있거나, 성장이 느린 아이들은 마치 교육의 부속물처럼 되고 만다. 사실은 오히려 그런 아이들이야 말로 가장 적극적인 교육의 혜택을 받아야 할 아이들인데도 말이다. 교사가 살짝 도와주는 것만으로 스스로 추진력을 갖고 쭉 뻗어나갈 수 있는 아이라면 사실 교육이 할 역할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공교육은 그런 아이들에게 전력투구를 하고 아이가 타고난 힘으로 이룩한 결과들을 두고 마치 공교육이 대단한 도움을 준 것처럼 광고하고 있다. 


공교육에 당장 기다림의 철학이 필요하다면 자유교육애는 다른 고민거리가 있다. 바로 그 기다림의 길이에 대한 고민이다. 대체 기다린다면 얼마나 기다려야 좋을까. 닐이 설립한 영국의 서머힐이나 요즘 화제가 되는 덴마크의 자유교육 같은 경우는 좀 더 무한정한 기다림을 강조하고, 이웃 일본이나 국내의 자유교육은 대체로 기다림에 기한이 있다. 이는 유럽사회가 입시문제에서 자유로운 것에 반해 일본과 우리나라는 입시문제가 늘 당면과제로 있기 때문에 생긴 차이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100%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양자 사이에는 자유교육에 대한 해석의 차이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유럽 사회는 '자유'라고 하는 것을 인간의 숭고한 본연의 가치로 인식하고, 절대적으로 존중하거나 추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에 비해 아무래도 유가적 교육관 속에서 수 천년을 보내온 동양에서는 '자유'를 상대적 가치로 인식한다. 즉, 유럽의 자유학교가 아이들이 자유로운 것 그 자체를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는 반면, 동양에서는 아이들이 자유 속에서 자신만의 규율을 발견하여 이른바 '자율성'을 함양할 수 있다는 점을 교육의 포인트로 삼는다. 불교가 무아론(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그에 이르는 방법으로 제3의 의식을 내 속에 만들어내는 것처럼, 일본이나 국내의 자유교육도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 속박(규율)을 만들어 내도록 인도한다. 


이렇게 보자면 '얼마나 기다려야 좋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동양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 속에 아이 스스로 자신만의 규율을 세울 때까지. - 서양식으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자기가 뭔가를 하고 싶어질 때까지.'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면 왠지 조금 불안하고 애매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역시 내가 동양인이라서 그럴까? -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나서 "자, 여러분 이제 모두 다 잘 아시겠죠? 그럼 지금부터 아이 스스로 내적인 규율을 세울 때까지 자유를 부여해줍시다!" 라고 하면 90% 이상의 교사 및 부모들이 그러니까 대체 그때가 언제입니까? 라고 반문하고 말 것이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되고 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공교육은 그럴 바에는 억지로 우리가 세뇌를 통해서 그 마음 속에 표본 규율을 쾅쾅 때려박아 주는 겁니다하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도 교육과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 조금 더 진일보한 이해의 단계에 와 있으니, 그런 식으로는 21세기를 살아갈 아이를 길러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마음 속에 스스로 자신만의 규율을 세울 수 있는 시기는 아이마다 다르다. 그것은 아이가 타고난 성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아이가 처한 환경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아이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도자의 문제일 수도 있다. 복합적인 원인이 있기 때문에 아이의 성장이 영 정체 되어 있다고 여겨지면 그 핵심 원인을 빨리 발견하는 것이 가장 우선 과제일 것이다. 


이상적으로 말하자면야 몇 년이 걸리든 아이 스스로 자신의 규율을 세우고, 그 원동력으로 자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끔 기다려보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렇게 무한정한 기다림을 허용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아이가 서른 살이 되어서야 겨우 제 자신의 규율을 세우고, 진로를 정하고, 대학 시험을 준비하고자 한다면 그때까지는 부모가 모든 경제적인 뒷받침을 하는 것은 물론, 갖은 진상을 부리는 것을 인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뒤늦게 도가 트는 아이가 정한 길이 또 꼭 자신에게 알맞은 해답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것 참 곤란한 일이다. 용한 점장이라도 있어서 아이가 도를 깨우칠 시기라도 콕콕 집어 알려준다면 참 좋을 테지만 그런 점장이가 있다는 건 들어본 일이 없다. 


나는 작년 한 해 중학생 시기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한 바 있다. 재작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아무런 주제를 주지 않고 마음대로 자기가 쓰고 싶은 주제의 책을 집필해보는 수업을 해봤다가 1학기에 대실패한 이후(글을 완성한 아이가 전체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스타일을 바꿔 롤플레잉 형태의 게임으로 진행했더니 1학기에는 전혀 성과를 보이지 않았던 아이들이 쑥 올라왔다. 하지만 두 가지 스타일 모두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해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형태는 전혀 아니었다. 


1학기가 지나고 사실 나는 방학내내 고민에 휩싸였다. 자유롭게 글을 쓰라고 했더니 2명을 빼고는 아무도 글을 쓰지 않다보니, 차라리 내가 개입을 좀 더 많이 해서 글쓰기 방법론도 좀 가르치고, 강제 주제나 하루 과제 등을 정해서 써보게 하는 게 어떨까 싶은 유혹이 찾아온 것이었다. 실제 아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협박도 했었다. 너희가 글을 쓰지 않으니 2학기부터는 강의를 해야겠어!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2학기가 되어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좀 더 기다리는 방식을 택했다. 단,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수업의 분위기를 트렌디하게 전환하는 정도의 치장만 가했다. 결과는 대박. 1학기에 공책 반 장 이상을 써내지 못하던 아이가 수 십 페이지의 글을 써내기 시작했다. 기다림과 좀 더 '안락한 자유'를 제공한 덕분이었다.  


여기까지 말하면 '자유교육'의 승리라고 평할 수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이다. 여전히 글을 한 편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더 기다려야 할까? 더 기다리면 곧 이 아이들도 쓰기 시작할 겁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만한 데이터를 나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 물론, 이론서에 나온 데이터라면 여러가지로 선보일 수 있지만. -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어디까지 아이의 마음 속에 개입하고, 무언가를 심어줄 수 있을까? 더욱 관심을 가지고, 애정으로 지켜보면서 기다려주면 정말 아이는 자연성을 회복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것일까. 그 회복의 시점은 대체 언제일까? 아무리 대단한 교육 이론가라고 해도 아이마다 다른 그 시점을 정확하게 측정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고리타분하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나는 다시 공자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다. 공자는 '때에 맞추어 하는 배움'을 중요하게 여겼다. 군자는 곧 '때를 아는 이'다. 좋은 교사는 가르침의 때를 아는 이고, 좋은 제자는 배워야할 때를 아는 이일 것이다. 이 '좋은 때'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결국, 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 있지 않을까 싶다. 교사가 참으로 마음을 다해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 또한 그 교사에 대해 신뢰를 갖고 마음을 열며 지낼 때, 어느 순간 아이가 미세하게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변화는 어느 봄날 귓볼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과 같은 것이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그 순간이 오면 교사도 아이도 한 단계를 넘어서서 함께 성장할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것 같다. 그 기회를 잘 활용하면 서로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숙한 교사로서 나는 그런 순간을 단지 몇 차례 감각해봤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변화의 순간을 좀 더 빨리 오게 하도록 하는 방법은 없을까. 당연히 나 역시 그런 궁금증을 품어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잘 모르겠다'다. 그리고 잘 모르겠다면 애초에 그런 식의 촉진법은 시도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애초에 '기다림의 여유'라고 이름 붙인 교육의 방법론과도 취지가 어긋나는 것은 물론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얼마나 기다려야 좋을까"라고 다시 묻는다면 역시 결론은 싱겁다. 모르겠다. 글쎄, 이런 대답이면 어떨까. "얼마나 기다려야 좋을까"라고 하는 물음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고, 아이를 신뢰하며 지켜보는 그 교육적 열의 속에 답이 있지 않겠느냐고. "쟤는 해봤지만 안 돼.", "얘는 이만하면 됐지." 하는 단정을 최대한 유보하고 끈질기게 "얼마나 기다려야 좋을까" 라고 묻는 교사야 말로 끝내는 알맞은 답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2015. 1. 12.



날짜

2015. 1. 12.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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