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열어보기, <도올의 교육입국론>
- 멀고느린구름
대학 초년생 시절 만난 절친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도올 선생은 이후 내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스승이 되었다. 방학 때면 학교 게시판에 도올서원 제생을 모집한다는 포스터가 붙어 있고는 했었다. 꼭 등록해야지 하고 속으로만 다짐하다가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2001년인가를 끝으로 공식적인 도올서원은 문을 닫았다.
선생의 수업을 직접 듣고 싶은 마음에 방법을 찾다가 EBS에서 하는 불교 강의에 제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곧바로 지원해 약 4개월 가량의 한 학기 수업을 듣고 도올서원 졸업장을 받았다. - 이사하는 와중에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 한 학기 수업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중앙대학교에서 한 학기만 특별히 개설된 논어 특강을 꼬박꼬박 찾아가 수료하기도 했다. 스승 덕분에 동서양 철학에 심취하게 되어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도 복수전공으로 철학과 수업을 들으며 여러 고전들을 탐독하게 되었으니 도올 선생이 내게 끼친 정신적인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의 교육에 대한 사상은 강의 속에 녹아든 채로 여러차례 발표된 바 있지만 이렇게 '교육론'이라는 직함을 갖고 세상에 발표되는 것은 내 기억으로는 처음이지 않나 싶다.
선생은 교육을 보수와 진보로 일별할 수 없다고 먼저 전제한다. 그러나 세간의 분별을 무시할 수 없기에 굳이 나누자면 보수의 기저에는 '국가주의'와 '선악이분법'이 존재하고, 진보의 기저에는 '자유주의'와 '칸트의 자율적 도덕론'이 있다고 보고 있다.
교육이라는 것은 크게 보자면 국가가 '시민'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실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국가 제도가 어떤 시민을 양성하고자 하는가는 곧 그 나라의 교육을 통해서 드러난다.
서양 철학의 시원 플라톤의 <국가론>에서도 플라톤의 교육론이 드러나고 있다. 플라톤이 양성하고자 한 시민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전사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국가기관에 의해 철저하게 길러지고, 결혼과 자녀를 낳는 것은 물론 일상적인 삶의 선택에 있어서도 모두 국가의 완벽한 간섭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봤다. 동양 철학의 시원 공자가 <논어>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시민관은 사람의 마음과 대자연의 이치에 감응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 '군자'였다.
사실, 교육이라는 것은 원래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교사는 국가에 의해 길러지지 않았고, 그 스스로 우뚝 선 것이다. 제자들은 특정 교사의 명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모여들게 되는 것이었다. 교사의 역할은 그 자신의 사상을 전하는 것이지 국가의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전체 대중을 향해 시행하는 근대교육의 역사는 이제 겨우 100여년 남짓에 불과하다. 서양의 근대교육이라고 해서 우리보다 더 프로페셔널하다고 여길 것도 없는 것이다. 독일 히틀러의 대중교육이나 근대 일본제국의 황국신민교육을 살펴보면 오히려 근대교육이 얼마나 인류사에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만이 명백히 드러날 뿐이다.
현재 우리 교육계를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적 교육론'의 뿌리가 황국신민교육에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그 교육론의 뿌리가 퇴계나 율곡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 분들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통탄하실 일이다.
그러나 '국가주의적 교육론'을 배제한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가 진보의 '자유주의적 교육론'을 답습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도올 선생은 의문을 제기한다. 존 듀이의 '자유교육론'은 미국의 사례를 통해 그 인성의 함양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음이 증명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내재적 규율이 없는 무한정 자유의 허용은 인간을 극심한 개인주의로 이끌고, 서로 연대하는 협력성의 결여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도올 선생은 자유가 아닌 '자율'을 교육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초기 국내 대안학교의 무한정한 자유의 추구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경험했음을 소개하고 있다.
나 역시 영국 서머힐의 창시자 닐의 '자유교육론'을 바탕 철학으로 둔 '자유학교 유형'의 대안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자유와 규율 사이의 줄타기를 경험한 바 있다. '자유주의'의 기본 전제는 아이를 이미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면서 어른과 아이 사이의 상호존중과 협력을 통한 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유교육에서 교사는 어떤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아이를 훈육하는 자가 아니라, 아이가 찾아낸 자신 스스로의 목적을 추구해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자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대한 오류가 있었다. 도올 선생 역시 지적하고 있는 바, 아이가 분명 어른과 같이 독립된 인격체이기는 하나 완성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아이의 생각은 분명 존중되어야 하지만 아무래도 많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어른들의 판단보다는 미숙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무한정한 수업 선택의 권한을 주었을 때, 결국 아이는 언젠가 스스로의 길을 찾아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의 경우는 수 년이 지나도록 자신이 해야할 것을 찾지 못하기도 하고, 교사가 판단하기에 전혀 무의미한 것에 허송세월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그저 '자유'니까 하고 지켜보는 것이 옳을 것인가. 이 문제로 교사들은 늘 고민하고 토론하곤 했었다.
나로 치자면 극렬한 자유주의자였기에, 늘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두어야 하고, 아이들의 선택에 전적으로 맡겨야 된다고 주장하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에 상당한 위험성과 모종의 개인주의가 내재되어 있었음을 자각한다. 교사는 아이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그 자유성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것이 옳으나 다만 아이의 가슴 속에 내재적 규율을 심어줄 의무 또한 있지 않나 싶다. 아이의 사고에 자유를 부여하는 일과 삶의 습성에 있어서 일정한 자기 나름의 규율과 제약을 갖도록 충고하는 일은 모순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이 어떠한 질문도 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자신과 다른 관점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냈다. 꼭 자신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만 죽는 순간까지 학문에 힘쓰고, 자신이 말한 바를 지키며, '인(仁)'을 실천하는 모습, 그 엄격한 내재적 규율을 통해 본을 보였다.
선생이 아이들에게 '자율'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생각에 지지를 보낸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을 종합해보면 도올 선생이 교육입국을 통해 기르고 싶은 '시민'의 상이 어느 정도 잡힌다. 그것은 '자율'을 바탕으로 서로 '협력(연대)'하는 시민이다.
'공부(工夫)'라는 말은 주자가 즐겨 사용한 말로써 오늘날 한민족에게 '배움'의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 원의는 단순히 책을 열심히 읽는다는 의미뿐 아니라 무언가 자기 자신을 열심히 단련하여 이룬다고 하는 의미가 있다. 즉, 멋지게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공부요, 피겨스케이팅을 아름답게 타는 것도 공부다. 노래를 잘 부르려고 힘쓰는 것도 공부고, 요리를 맛있게 하는 것도 공부다.
국가가 정한 국영수의 공부가 아니라 개개인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향해 자율적으로 최선을 다해 자신을 단련해 가는 공부, 그리고 그러한 공부가 이루어낸 경지에 대해 우위를 두지 않고 공평하게 감탄하는 사회를 도올 선생은 그리고 있다. 아마도 그런 공부가 공정한 댓가를 받는 사회가 요새 말로 '창의적인 인재 양성'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아닐까.
선생과 내가 다소 이견이 있는 부분은 교사상과 관련해 체벌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분과, 학생은 교육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말한 부분이다. 이것은 이견이라기보다 도올 선생의 평소 사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이 책만 읽고서 오해를 할까봐 구태여 소개를 한다.
도올 선생이 말하는 '체벌'은 심각한 폭력의 수준에 이르러 있는 무차별적인 행위를 이르는 것이 아니다. 학생과 교사가 상호 인정하고 합의한 수준에서의 엄정한 신체적 벌칙을 말하는 것이다. 가령 옛 서당에서의 회초리 정도를 이르는 말이다. 이는 실제 교육 현장에서 무분별하게 학생의 따귀를 때린다던가, 욕설을 내뱉는 교사들의 정도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데서 나온 판단이 아닐까 싶다. 도올 선생이 일례를 든 운동장 돌기나 반성문 쓰기와 같은 정도의 벌칙은 신체에 직접 가해지는 체벌을 엄격하게 제한한 바탕에서 허용되어도 무방할 것이라고 본다.
학생을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고 본 것에 대해 학생이 학교라는 공동체에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은 '실질적인 교육 행위'의 주체이냐 아니냐를 한정해서 말한 것이지, 교육행정의 전반적인 측면까지 광범위하게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즉, 학생이 수업의 세밀한 커리큘럼이나 교사가 가르치려고 하는 교육의 핵심까지 민주주의라고 해서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육하는 행위(강의와 같은)는 철저하게 교사의 영역이고, 그 차원에서 학생은 피교육자일 수밖에 없음을 한정해두는 말인 것이다.
이 책의 부제는 '혁신교육감시대를 위한 교육입국론'이다. 도올 선생은 이 책이 일반 대중들보다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당선된 교육감들을 위해 쓰여졌다는 것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문고판 사이즈 110 페이지에 글자 포인트 12 정도로 쓰여진 이 책은 일반 대중들이 읽기에도 큰 무리가 없다. 교육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이라면 꼭 한 번씩 일독해보시기를 권한다.
2014.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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