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처난 무릎, 운디드니 - ![]() 켄트 너번 지음, 정지인 옮김/시학사 |
21세기의 문명인은 어떻게 거북섬 원주민(인디언)을 죽이는가
"백인에게는 딱 두 종류의 인디언만이 존재하네. 술 취한 건달과 현명한 인디언이지. 옛날에 우리는 야만인으로 여겨졌지만 이제 그런 사람은 다 사라지고 없네. 이제는 술꾼과 현명한 인디언뿐일세. 나는 백인이 우리를 술꾼으로 여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네. 그러면 최소한 우리를 인간으로 보는 것이니 말일세. 자기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눈에 보이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니까.
그러다 술꾼이 아닌 인디언을 만나면 그들은 어떻게든 그 상황을 처리해야만 하네. 모든 인디언을 현자로만 보는 사람은 인디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네. 단지 인디언의 생각에만 관심이 있지. 그건 우리에게서 인간성을 박탈하고 인디언을 백인의 필요에만 부응하는 환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일세.
인디언처럼 되는 방법을 알고 싶나? 대지와 가깝게 생활하게. 몇 가지 소유물을 없애버리고 서로 도우며 살게. 조물주에게 말을 건네고 가능하면 더 조용히 살아야 하네. 땅 위에 쉴 새 없이 무언가를 건설하는 대신 땅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일세.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누군가를 그들이 아닌 다른 존재로 만들려 하지 말게. 됐네. 이제 할 말은 다 끝났네." -228p-
난 운디드니가 무었을 뜻하는지 몰랐다. 그냥 미국에 의해 라코타 부족 수 백 명이 학살을 당한 슬픔의 땅이라고 기억했다. 그러던 중 영풍문고에서 우연히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상처난 무릎. 아하, 그렇구나. 그런 뜻이었구나! 표지에 있는 그윽한 눈빛의 거북섬 원주민 할아버지도 인상적이었다. 400페이지가 넘는 책이라 다소 고생하겠구나 싶었지만 흔쾌히 책을 구입했다.
이야기는 이 책의 저자인 켄트 너번이 거북섬 원주민 댄 노인의 편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켄트가 쓴 인디언 관련 책들을 본 댄 노인이 자신의 자서전을 써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켄트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댄 노인의 마을을 찾아간다. 댄 노인이 사는 인디언 보호구역은 퇴락한 할렘거리 보다 못한 곳이다. 온갖 고철들이 나뒹굴고, 낡아서 쓰러져 가는 집들이 서있는 황량한 곳이다. 그곳에서 자신들의 땅으로부터 쫓겨난 거북섬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켄트는 댄 노인과 댄 노인의 손녀 위노나, 그리고 대머리 인디언인 그로버 등과 만난다.
처음 댄 노인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자기 부족의 역사와 가르침들을 메모해두었던 종이조각들을 켄트에게 건네며 자서전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곧 그것이 의미 없는 일일임을 깨닫고 평생에 걸쳐 쓴 그 메모들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 자서전을 쓰는 것을 포기한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댄 노인은 메모들을 짜집기해서 자서전을 쓰는 대신 켄트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에는 그로버도 함께이다. 댄 노인과 켄트, 그로버는 여행 중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거북섬 원주민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상처받은 무릎, 운디드니에 도착한 댄 노인 일행은 무관심 속에 방치된 라코타 부족민들의 공동묘지를 방문하고 다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돌아온다.
이상이 이 기나긴 책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대단한 플롯도 없고, 감동적인 러브스토리나, 충격적인 살인사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두꺼운 책에서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댄 노인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현대 백인의 모습,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옛날의 백인들이 무기를 들고 거북섬 원주민들을 직접적으로 학살했다면, 20세기 후반부터 지금 21세기의 문명인들은 책을 들고 거북섬 원주민들을 간접적으로 학살하고 있다. 시중에 나오는 책들을 보면 대부분 죽은 인디언에 관한 책들이다. 그 제목도 최후의 인디언이니, 인디언 멸망사니, 사라진 인디언이니 하는 식이다. 그 제목들만 보면 마치 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거북섬 원주민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뭔가 신비로운 척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런 죽은 인디언들에 관한 책을 읽고 난 뒤, 길거리에서 파는 깃털 장식이나, 원주민 풍의 목걸이 등을 구입할 것이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인디언이 된 것처럼 여기고, 인디언의 행동방식(자기가 그렇게 믿는)을 따라할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닐지도 모른다. 자신은 인디언을 사랑하며, 인디언처럼 살고 싶다고. 그는 인디언을 단 한 번도 만나본적도 없으면서 마치 인디언들과 한 생을 살아낸 것 같은 착각에 빠질지도 모른다. 여기저기에 인디언! 인디언! 하면서 소란을 피우고 다니겠지.
오, 이런. 진짜 거북섬 원주민들은 ‘인디언’이라는 말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도 모르면서 인디언을 사랑한다니.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이거나, 정말 예의가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말 절친한 일본인 친구에게 ‘쪽바리’라고 부르는 미치광이일 것이다. 존경하는 중국의 공자님에게는 “오 위대한 뙤놈이시여!” 라고 소리칠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하면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모두 그렇게 부르니까, 그게 더 익숙하니까란 변명을 할 것이다.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다고 본다. 인디언이라고 써야지만 책이 팔린다고.
과거의 백인들과 백인들과 똑같아 지고 싶어 한 한국인들은 서부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바바바바!’ 소리를 내는 거북섬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그들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실은 해안지방에서 고기를 낚으며 사는 부족의 옷을 입은 사람이 대평원에서 말을 타고 뛰어다녀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모든 인디언은 똑같이 문명의 축복을 거부한 야만적인 원시인이었을 뿐이니까.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문명인들의 잘못으로 지구가 병들게 되자 그들은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지구의 역사에서 자신들처럼 지구를 괴롭힌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야 새롭게 지구를 지키고 치료하려는 일을 하려는 자신들에게도 명분이 주어질 테니까. 그래서 그들은 죽은 인디언들을 되살려내기 시작했고, 그들에게서 야만인의 누명을 벗기고, 현자와 지구 지킴이로서의 명예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영화도, 어느 책도 거북섬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단한 현자들이었으며, 지구를 지켜낸 성스러운 사람들이었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그런 고백서들을 읽으며 문명인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고, 그리고 죽은 인디언의 용기와 현명함에 감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북섬 원주민을 놀림감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점점 사라지고, 이제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어? 그런데 왜 거북섬 원주민들은 아직도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살고 있는 것일까. 60년대에 죽은 인디언에게 감명 받아 커다랗게 일어났던 히피운동은 대체 무엇을 이룩하고 사라져간 것일까. 왜 거북섬 원주민들은 아직도 그 거대한 감옥에 갇혀 배고파하고 있는 것일까. 왜 아직도 거북섬 원주민 젊은이들은 미래를 잃고 술과 마약에 찌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 거북섬 원주민을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세계 방방 곳곳에 그렇게도 많은데 말이다.
예전에 거북섬 원주민의 알콜중독이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때 문명인들은 죽었다고 생각한 인디언들이 알콜중독자가 되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어도 그들은 살아있는 거북섬 원주민에게 관심을 가졌으며, 그들을 알콜중독에서 구제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들을 마련했다. 그때는 아직 모든 거북섬 원주민이 현자의 지위를 가지기 이전이었는데도 말이다.
거북섬 원주민을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는 체로키족이 부족자치를 위해 카지노를 운영한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물론, 카지노를 운영하는 인디언을 흉내 내고 싶지도 않겠지.
그대는 나바호족이나 아파치족 원주민이 주유소를 운영하거나 버스운전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나바호족이나 아파치족이 전통의 복장을 하고 그랜드 캐넌에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더욱 행복할 것이다.
라코타족의 여성이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며 미국에서 방송되는 드라마를 보며 웃고 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고. 이뤄쿼이족의 여성이 변호사가 되어 법정에 서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녀는 진짜 인디언이 아니야! 라고 소리칠지도 모르겠다.
또 그대는 머리를 길게 기르지 않거나, 까만 머리가 아니거나, 붉은 피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거북섬 원주민을 향해 감히 호통을 칠지도 모른다. “저들은 변절자야!”라고. 그대는 모르는 것이다. 거북섬 원주민은 원래부터 황인, 백인, 흑인, 홍인이 모두 섞여서 함께 어우러져 살았다는 것을. 왜냐하면 당신이 책에서 읽은 죽은 인디언은 모두 까맣고 긴 머리에, 붉은빛(흑백사진을 보았겠지만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책에서 거북섬 원주민들은 얼굴이 붉다고 하니까.)이 감도는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니까.
어쩌면 그대는 인디언을 사랑하는 마음에 미국으로 날아가서 인디언 보호구역에 들어가 사진촬영을 해대며 원주민 노인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하겠지. 만약 그 노인이 당신이 건넨 손을 후려치고 땅바닥에 침을 뱉으며 가버리거나, 보호구역 거리의 원주민들이 당신과 똑같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캔 맥주 따위를 마시며 그대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역시 ‘진짜 인디언은 다 죽은 거야’ 라고.
그대는 문명인이 만들어놓은 죽은 인디언만을 사랑한 것이다.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는 사랑을 아느냐고? 그대는 그대가 원하는 모습만을 보여주어야지 비로소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리라.
세월이 흐르고 흘렀지만 거북섬(아메리카 대륙)에 스며든 원주민의 피는 아직 채 마르지 않았다. 문명인들은 대부분 살아있는 거북섬 원주민을 잊었지만 어머니 대지만은 그들을 여전히 기억할 것이다. 죽은 인디언을 사랑하는 문명인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는 어머니 대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을 여전히 기억할 것이다. 그들이 까만 머리를 길게 길러 땋고 있지 않아도, 그들이 붉은빛이 도는 피부를 하고 있지 않아도, 그들이 대머리이거나, 흑인이거나 백인이어도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진짜 인디언이란 무엇인가? 진짜 거북섬 원주민이란 무엇인가? 그 답을 아는 건 그대와 내가 아니다. 그 답을 아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거북섬 원주민들뿐이다. 그 질문은 그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질문이 있는 것이다. 진짜 한국인이란 무엇인가? 진짜 몽골리안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이다. 우리는 감히 살아있는 거북섬 원주민들에게 ‘진짜’를 논할 자격이 없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대도 과거의 백인들처럼 또 다른 학살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 스스로 그들이 해답을 찾기를 기다려주어야 하며, 살아있는 그들이 내린 해답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사들처럼 그들의 종교를 바꿀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저 같은 지구인으로서, 백인과 닮아가며 그들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어리석은 문명인으로서,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거북섬 원주민을 사랑하기 위해 그대가 인디언이 될 필요는 없다. 그대에게 사랑받기 위해 거북섬 원주민이 그대가 원하는 인디언이 될 필요도 없다. 그대는 그대로서, 거북섬 원주민은 거북섬 원주민으로서 자기의 모습으로 서로 마음을 나누면 족하다. 그것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거북섬 원주민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2006. 4.2. 멀고느린구름
“이 점만은 분명히 이해해야 하네. 우리는 여전히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말일세. 그건 우리가 미국이나 미국인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옹호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뜻이네. 우리에게 그건 전쟁과도 같은 일이네. 우리가 우리 존재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몰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네. 우리는 잘못된 생각과 가짜 인디언 그리고 우리를 백인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이 우리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선의의 백인들에 의해 파멸되고 말 것이네.”
-80p-
“이걸 생각해 보게. 백인이 자기는 일부는 흑인이고 일부는 멕시코인이라고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나? 물론 없을 걸세. 하지만 자기가 일부는 인디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천에 깔려 있네. 대개 그들은 자기 할머니나 증조 할머니가 인디언이라고 말하지. 자기 할아버지가 인디언이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네. 자신의 배경에 인디언 남자가 속하는 건 원치 않는 걸세. 인디언 할아버지라면 어쩌면 도끼 같은 걸 휘둘렀을지도 모르니까.
그들이 원하는 건 자신의 가족에게 현명한 지혜를 가르쳐준 늙은 인디언 여인일 뿐일세. 그리고 그 할머니들은 포타와타미족이나 키라카우아족 혹은 틀린기트족은 결코 아니어야 하네. 주로 체로키족이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 체로키족은 무언가 낭만적인 부족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자기 집안에 체로키족의 할머니가 있었다고 말하는 백인을 나는 한 백 명쯤은 만나보았네.
그런데 말일세,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었네! 그들은 그 말이 사실이기를 너무나 강렬하게 바란 나머지 스스로 믿게 된 거라네. 대부분은 그 정도에서 그만두지.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 그들은 머리카락을 길러 땋고 주술의식도 찾아다니지. 어쩌면 사기꾼 주술사의 강연회도 들으러 다니겠지. 그러면 곧 새로운 인디언이 탄생한다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인디언 철학을 떠벌리면서 인디언의 의미를 더욱 왜곡시키고 다니게 되겠지.
너번, 내 이것만은 분명히 말해두네만 인디언으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네. 오랜 세월 동안 미국은 우리를 파괴하려고만 했어.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사람들이 끼고 싶어 하는 유일한 집단이 되었네. 자네는 외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나?”
-81p-
“나는 빡빡머리 인디언이니까. 나하고는 얘기하고 싶어 하지도 않지.”
노인이 다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들은 내 말총머리를 보고 자기들의 영혼의 형제쯤 된다고 생각하지. 짧은 머리를 한 그로버는 그냥 보통 중년남자로만 보고 말일세.”
-143p-
“심지어 독수리 깃털을 걸치고 오는 사람도 있지요. 독수리 깃털은 전쟁에 이겨서 손에 넣거나 참전용사에게 받은 것이 아닐 때에는 결코 걸쳐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모방자들 중에는 독수리 깃털을 제로니모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자들이 있어요.”
“빌어먹을, 나는 박제한 독수리 머리를 허리춤에 매단 사람도 본적이 있네. 독수리 머리를 통째로 말일세!”
-145p-
'멀고느린구름 > 인디언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디언 하트'를 기다리며 (0) | 2014.06.23 |
---|---|
아메리카원주민, 수우(Sioux)족의 가르침 (0) | 2013.04.30 |
아메리카원주민의 자녀 교육 (0) | 2013.01.10 |
오이예사 - 교회로 간 인디언 (0) | 2012.12.29 |
오이예사 - 인디언 숲으로 가다 (0) | 2012.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