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에 대한 단상
- 금안당
인간은 행복은 남들과 비교하려 들면서 불행은 비교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방법의 하나다.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에게 '엄마 좋아? 얼만큼 좋아?'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흔히 '하늘만큼 땅만큼 좋아!'라고 답한다. 어린 아이들은 비교란 걸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좋은 건 (완전히) 좋은 것이고, 싫은 건 (절대로) 싫은 것이고, 매운 건 (엄청나게) 매운 것이고, 멋진 건 (무지무지하게) 멋진 것이다. 어른이 보기에는 아이들의 이런 절대적 평가가 유치해보이면서도 신기하다. 그래서 아이가 그 정도를 가지고 '하늘만큼 땅만큼'이라고 대답할 줄 뻔히 알면서도 자꾸 물어본다. 아이들의 이런 대답에서 어른들은 이제 자신에게는 없는 천진난만함의 향수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이 아이의 이런 천진난만함에 감탄하고 행복해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아이가 비교란 걸 모르고 '극단적인' 표현을 쓰는 게 염려스러워진 어른은 이 '비교불가'의 천진함을 고쳐주는 게 좋겠다고 나서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더 오래 산 자신의 시각과 감정과 태도가 아이의 그것보다 더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아이의 천진난만함은 '잘못된 것', '틀린 것'이 되고, 부모(이 단계에서는 주로 엄마)는 아이의 '교정'에 착수한다.
이 때의 부모 유형은 두 가지이다. 한쪽은 아이가 느끼는 행복한 느낌을 남과 비교하게 만들어 방해하는 경우이다. 이런 부모는 아이가 순간의 절대적인 행복, 무한한 행복감을 느끼는 게 어리석다고 여긴다. 이런 유형의 부모는 아이가 "너무 너무 좋아"라고 말하면, "뭐가 그렇게 좋냐?", "뭐 그렇게 좋을 게 있다고?"라고 하면서 아이가 느끼는 황홀한 느낌에 찬물을 끼얹는다.
좋은 일이 생기면 그 행복한 느낌을 끝까지 가져가는 데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행복한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 이들은(달리 말하면 자신이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자존감이 낮은 이들은) 행복을 끝까지 가져가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방편으로 남들과 비교하는 방법을 써왔다. 이들은 새 옷이 생겨서 행복해하다가 "기껏 10만원짜리 옷 한 벌에 이렇게 반응하는 건 너무 없어보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몇 백만원짜리 옷도 덥석덥석 사는데......'라면서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비웃곤 해왔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혹은 감정)을 아이에게 요구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살 날이 창창한 아이가 올바른 시각을 갖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 의도가 어떠했든 엄마(혹은 아빠)가 하늘에 붕 뜬 것 같은 아이의 행복감에 찬물을 끼얹는 순간마다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에는 회색 물감이 흩뿌려진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면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선명한 오색 꽃들과 아름다운 무지개, 눈부신 햇살로 가득찼던 아이의 세상은 더 이상 그렇게 환하고 밝지 않다.
이런 부모의 또 하나의 문제는 아이가 느끼는 절대적 불행감에 대해서는 그 완화 방법의 하나로 '비교'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마 자신이 자신의 불행을 객관화하지 못했으니, 아이에게도 그 불행한 느낌을 객관화하는 걸 가르칠 방도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의 행복감에만 찬물을 끼얹고 불행감은 아무런 검증을 거치게 하지 않으니, 아이의 회색빛 세상은 더 회색빛으로 물들어간다. 그리고 행복감은 덜해지고 불행감은 더 짙어지고 더 예민해진다.
또 다른 유형의 부모는 수적으로는 소수인, 아이의 행복감은 비교하지 않고 아이의 불행감은 비교하게 만드는 경우이다. 이 유형의 부모는 아이가 행복해할 때는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지만, 아이가 오버해서 불행해하면, 다른 사람, 다른 경우의 불행과 비교하여 그 불행감을 덜어주려고 애쓴다. 아이에게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긍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갖게 하려는 좋은 의도이긴 하지만, 아이의 감정에 기준선을 설정하고 감정에 개입한다는 면에서는 첫번째 경우와 유사한 결과가 빚어지는 측면이 있다.
아이의 세상이 잿빛으로 바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아이는 부모에게서 자신의 감정 일부가 인정받지 못함으로써 감정 표현에 혼란을 겪게 되고, 감정이 무뎌지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 부모가 의도는 그렇지 않았지만 아이더러 부정적인 감정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아이는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 미묘한 죄의식을 느낀다. 이제 부모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자신의 행복감보다 부정적인 감정쪽에 주목하게 된 아이는 순수한 행복감을 덜 만끽한다. 아이가 도덕적으로 '올바른' 심성을 갖기를 원하는 부모, 나름의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부모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다.
나아가 이들은 "1, 2만원짜리 옷을 못 사입는 사람도 많은데, 사치스럽게 아이에게 10만원짜리 옷을 사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으니 일리 있는 생각이긴 하지만, 문제는 부모의 이런 제한적인 사고방식이 다른 영역들에서도 아이가 행복감을 느낄 기회를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위의 두 경우 모두 원죄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교하는 데 있다. 인간의 느낌은, 개개인의 느낌은, 각 개인의 개개 느낌은 어떤 것과도 비교가 불가능하다. 새끼를 잃은 어미 표범의 슬픔과 자식을 잃은 젊은 엄마의 슬픔을 비교할 수 없듯이, 고생 끝에 자기 집을 갖게 된 중년부부의 기쁨과 축구화를 선물 받은 아이의 기쁨을 비교할 수 없고, 어제의 내 슬픔과 오늘의 내 기쁨을 비교할 수 없다. 모든 느낌이 개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 비교할 수 있는 느낌이 있다. 같은 자극으로 야기되는 느낌은 갈수록 무뎌진다. 예를 들어 아주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처음으로 먹게 되었을 때, 황홀할 정도로 행복했던 사람은 다시 한번 그 느낌을 맛보기 위해 그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하지만 거의 99%의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은 똑같이 맛있지만, 처음만큼의 황홀한 느낌은 맛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먹을수록 행복감은 갈수록 떨어지고, 너무 심하면 역겹기까지 하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동일 자극에 대해 쾌감(행복감)이 떨어지는 이유는 한 번 일어난 감정을 우리 뇌가 기억을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식을 암기하는 경우와 달리, 강렬한 느낌은 단 한 번의 경험으로도 뇌에 분명하게 기억된다. 지식은 몇 번을 반복해서 입력해야(말하자면 암기해야) 뇌에 분명하게 새겨진다. 반면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느낌은 그 자체로 강렬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뇌에 기록되지만, 반복되는 경험이 오히려 그 느낌을 무디게 하는 것이다.
반복된 경험으로 야기된 느낌에 대해서는 '기대'라는 새로운 요소가 느낌을 평가할 기준자로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비교'는 절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하늘의 사건을 세속의 사건으로, 비유하면 천사의 추락을 불러오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자연적 생체리듬은 한 가지 자극에 중독되는 것을 방지하는 시스템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반복할수록 효용성이 떨어지는 판이니, 그 자극에서 갈수록 멀어지면 멀어졌지, 집착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중독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한편에서는 순수한 느낌에 대한 우리의 갈증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가 느낌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비교하는 버릇을 자신도 모르게 익혔기 때문이다.
비교하고 평가하는 순간, 비교가 불가능한 그 느낌은 더 이상 온전히 느껴지지 않는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자극에 의해 촉발된 맨 첫 느낌, 비교가 불가능하기에 비교 자체를 포기했던 그 느낌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우연'처럼 일어났지만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이 느낌을 다시 한 번 맛보길 갈망한다. 하지만 두 번째 느낌부터는 기대와 비교가 작용하기에 절대 맨 처음 느낌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갈증이 큰 나머지, 자꾸 같은 행위를 반복해본다. 그러다 보면 그 행위는 어느 듯 '습관'이 된다. 이것이 황홀한 행복감이 '중독'으로 발전하는 일반적인 코스이다.
뭔가에 중독된 사람은 자신이 일종의 '중독자'라는 사실에 창피해하거나 죄의식을 느낀다. 본인도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걸 아는 것이다. 하지만 중독을 그만두는 것이 애초 자신이 중독에까지 이르면서 얻고자 했던 것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니, 쉽게 중독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사실 중독자들은 중독자가 아닌 일반인들을 별반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인들은 삶을 무미건조하게 사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고 있다. (물론 그 중독이 자기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정도가 되면, 그 때는 일반인들을 부러워하지만.)
인간 사회의 문명화, 물질화가 진행되면서, 비교할 수 있는 인공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만 적용되던 계량법이 비교할 수 없는 자연적이고 유기체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에까지 확대 적용되는 경향이 일반화되고 있다. 물신화의 한 측면이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부모의 사랑을 놓고 형제가 다투면 부모는 자신의 마음을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표현했다. 하지만 지금 부모들은 "엄마 아빠는 너희를 똑같이 사랑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 말은 들은 둘째는 엄마가 형에게 5개의 사탕을 주면, 자기에게도 똑같은 수의 사탕을 주어야 "똑같이" 사랑한다는 엄마의 말이 사실이라고 여긴다.
또 예전에는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조차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사용가치를 고려했다. 요즘은 이왕이면 "1+1"(원 플러스 원)이다. 질보다 양, 즉 교환가치이다. 예전에는 사람 목숨을 값으로 매길 수 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에 목숨을 걸긴 했지만, 그 삼백석으로 아버지 심봉사가 눈을 뜬다는 믿음이 없었으면, 심청이는 선원들의 제안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목숨에도 공정가가 있다. 그래서 대형 사고가 나서 사상자가 많이 생기면, 제 3자들의 관심은 유가족의 상실감이 아니라 보험금의 액수에 돌려진다.
하지만 사상자와 친밀한 관계인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가족이 입은 상해는 결코 돈으로 보상되지 않는다.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아무리 가해자라도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는 법이니, 이왕 벌어진 일, 보상 외에 달리 무슨 방도가 있겠냐고 항의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물신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러니 여기에는 두 개의 가치관이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사람의 목숨값도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물신적 사고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나 생명, 자연과 관련된 영역은 돈으로는 절대 환산되지 않는, 다시 말해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독자적 가치를 갖는다는 휴머니즘적 사고방식이다. 전자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고, 후자는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이 둘을 절충한 것이 수정자본주의이고, 수정자본주의에 다시 전자의 경향을 강화하려고 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이다.
이렇게 멀리 나갈 것까지도 없이 이 가치관의 충돌은 대규모 집단을 이루고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시스템에 따라 살고 있는 현대인 개개인의 삶에서도 그대로 구현되고 있다. 남편들은 비록 회사에서는 실리에 따라 비인간적 거래를 하더라도, 자신의 가족만은 이런 바깥 세상의 계산과는 관계 없이 자신을 따뜻이 받아들여주는 스위트 홈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남편의 수입을 다른 남편들의 수입과 비교하고, 아이의 성적을 다른 아이들의 성적과 비교하는 아내는 남편의 이런 소망을 쉽게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반면에 아내는 수입과는 직접 관계가 없어도 자신이 가정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를 남편과 자식이 알아주길 바라지만, 경쟁에 시달리는 남편에게 이런 세심한 '인간적인' 배려는 남아 있지 않다. 아이는 아이대로 자신의 개성은 인정해주지 않고 무엇보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자신을 인정해줄 것 같은 부모에 대해 불만이 많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적어도 가정에서만은 자본주의적 가치가 아닌 휴머니즘적 가치가 통용되길 바라고, 자신에게만은 휴머니즘적 가치가 우선 적용되길 바란다. 하지만 이런 바램은 자연법칙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자연법칙은 '내가 남을 대접한 방식 그대로 남도 나를 대접한다'이기 때문이다. 내가 남편(혹은 아내)과 아이와 이웃과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 수치화하고 계량화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그렇게 대접했다면, 그들도 나를 그렇게 대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비인간적인 수치화, 계량화는 더 확대된다. 1970년대, 80년대만 해도 사람의 행동과 심리를 수치화해서 조작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 사회학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다지 옳은 이론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거부심리도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집단과 관련된 연구들에서는 수치를 제시하지 않으면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도 힘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가사노동이나 농업노동처럼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분야나 영역이 있으면 그 영역은 개선되어야 할 '전근대적' 영역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이제 엄마들도 아이들을 키울 때, 수치화하고 비교하는 것이 세련되고 똑똑한 교육법인 듯이 여기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 아이들을 키우고 훈육하다 보면, 숫자로 아이들을 규정하거나 비교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다. 내 아이가 남들 보기에는 그렇게 귀여워보이지 않고, 그렇게 똑똑해보이지 않고, 그렇게 건강해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부모들에게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란 걸 실감하는 것이다. 게다가 심하면 아이들의 강력한 반발도 있다. 아이들은 자신이 엄친아나 옆집 아이나 형제자매들과 비교당하면 깊은 상처를 입는다. 아이들이 울면서 부모에게 항의하면, 부모는 그제야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안다. 부모 자신도 그런 일로 상처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가장 인간적인 영역이어야 할 가정이 비인간화되어가는 걸 막을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가정 밖의 세상이 워낙 수치와 계량과 비교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 밖 세상의 수치화는 단순히 존재 양태를 수량화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 수치를 자기 이익에 맞게 조작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대표적인 예가 똑같은 업무, 똑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데도, 누구는 정규적이고, 누구는 비정규적이며, 또 누구는 파견근무자로 구분되는 문제이다. 내용적으로 업무는 똑같다. 아니, 때로는 비정규직과 파견근무자들이 노동량이 더 많거나 노동숙련도가 더 높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노동력에 대한 대우는 전혀 다르다. 계약서상 누가 고용주인가만 다를 뿐인데도 말이다. 비정규직과 파견직 노동자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 지독하게 "비인간적"이라고 느끼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내용적 질적 차이는 없는데, 형식적 차이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좌우되니 말이다. 이렇게 수치를 조작하는 단계에 이르면, 상황의 주도권을 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불리한 위치, 억울한 입장에 처할 수 있다.
사실 수치화, 비교, 형식화가 주가 되는 세상은 비인간적이다. 예전에 육아서 중에 아기에게 수유를 할 때 몇 시간 단위로 하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었다. 혹은 분유가 모유보다 영양면에서 더 뛰어나다거나 분유 수유나 모유 수유나 별 차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육아서들도 있었다. 혹은 갓난 아기때부터 따로 재우는 것이 아이의 독립심을 키우는 데 좋다고 이야기하는 육아서도 있었다. 사람을 기르는 문제인데도 지독히 비인간적인 방법들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육아서의 교리대로 잠깐이라도 따라본 경험이 있는 부모들은 알고 있다. 아기들이 이런 '비인간적' 대접에 얼마나 항의하는지, 이런 방법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부모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지, 그리고 이런 비인간적 방법을 계속 따르는 건 아동 학대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지금은 이런 기계적이고 노골적으로 비인간적인 육아법은 더 이상 주장되지 않는다. 하지만 육아의 차원에서도 더 복잡하고 더 은밀한 비인간적인 방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 예로 요즘은 깨끗한 게 무조건 좋은 거라는 잘못된 인식을 젊은 엄마들에게 불어넣으면서 유아용품들을 99% 살균 소독해주는 스프레이가 아기의 건강을 지켜주는 구세주이기나 한 듯이 광고되곤 한다. 가습기 세균을 99.99% 살균해주는 가습기 살균제가 세균만이 아니라 신생아들의 생명까지 앗아간 사건은 어느덧 잊힌 채로. 하지만 99% 살균실에 살던 아기가 실제 현실환경에서 오히려 면역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건 약간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나이 든 나는 왜 젊은 엄마들이 이런 종류의 광고에 혹하는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100%니, 99%니 하는 '확실한' 수치가 그들의 불안 심리를 덜어주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광고에는 99%, 98%, 95%, 90% 같은 수치들이 많이 등장하고, 정 안 되면 수치는 내세우지 않지만, 누구나 100% 효과를 볼 것 같은 이미지 광고를 한다. 하지만 수치는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소비자는 자신이 99% 안에야 들어갈 거라고 여겨서 그 물품을 구매하지만, 생산자는 그 소비자가 1%에 드는 바람에 효과를 못 본 거라고 하면 그만이다. 수치를 가지고 속고 속이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일상 생활 영역에까지 이렇게 수치화와 계량화와 비교 등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가장 인간적이어야 할 가족 관계는 물론이고 감정과 느낌의 영역에서도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무심결에 수량화하고, 비교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후손들에게 치명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공간 속에서 인간적인 영역이 점점 줄고 비인간적인 규칙과 환경에 우리 삶을 맡기게 될 텐데, 우리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답게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가 소탈하고 편안한 느낌을 느끼는 환경은 가족, 친구, 혹은 이해관계로 모이지 않은 모임이나 공동체 등 그리 많지 않다. 혹은 회사 등에서 행하는 자신의 업무가 단순히 돈벌이 수단을 넘어서 자기 실현의 의미를 가질 때도 인간적인 상황을 유지할 수 있지만, 회사의 규모가 큰 경우에는 아무래도 개인은 부속물이 되기 쉬우므로, 이렇게 되기가 어렵다. 게다가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이런 '인간적인 환경'들까지 갈수록 비인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 무방비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전통적 가치가 무너지면서 전통적 가치들만이 아니라, 그 기반이 되고 있던 인간적 삶의 방식까지도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삶의 방식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 문제가 공공연한 이혼 사유가 되고, 부모의 경제적 무능력이 불효의 명분이 되며, 돈 잘 버는 자식을 둔 것이 부모의 자랑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부모가 이런 '비인간적' 태도를 보이면, 자식도 닮기 마련이다. 어떤 부모들을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자식이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일찍부터 경쟁과 비교에 숙달되도록 교육할 필요가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의도적으로 이런 '비인간적' 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사실은 경쟁과 비교에 능숙한 '비인간적'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노동력으로 양성될 뿐이지, 대체가 불가능한, 창조력을 가진 한 인간으로는 키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체 가능한 노동력의 운명은 언제든 더 성능 좋은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기계의 운명만큼이나 비극적이다.
그러니 부모로서 아이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부모 스스로 자신의 가정과 자신의 자식을 수치화하거나 비교하지 말아야 하고, 그런 비인간적 기준들이 자신의 가정과 자식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방어해야 한다. 또 아이가 느끼는 느낌들에 개입하거나 그 느낌들을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가정과 아이를 둘러싼 환경만이라도 '인간적'으로 유지되고 운영되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얼마 전에 컴퓨터를 비롯한 첨단 IT 기업의 CEO들(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등)이 자기 자식들에게는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 IT 기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스스로 발명한 IT 기기의 유용성도 알지만, 그 해악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해악은 어린 아이들일수록 더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무 생각 없이 유아들에게 컴퓨터 게임을 제공하고, 초등학생들에게 스마트폰을 사준다. 그래놓고는 자제를 못하고 중독 상태가 된 아이들을 나무란다...... 부모의 무심함이 아이의 삶을 망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14.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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