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거짓말을 한 첫번째 순간을 지금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마 국민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때는 1960년대라 부족한 교육시설 때문에 국민학교에 오전반 오후반이란 게 있었다. 주 단위로 바뀌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전반이던 어느 날,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내일은 오후에 학교에 오라고 하셨다. 다음날 오후 반치고는 일찌감치 학교에 갔다. 그런데 교실에 가니 아이들은 없는데 책상 위에 책도 펼쳐져 있고, 책가방도 다들 제 자리에 있다. 어리둥절해서 다시 건물 현관으로 나오니 운동장 저쪽에서 우리 반 아이들이 체육을 하고 있다!
아차! 내가 뭔가 잘못 들었던 것이다. 오후반 시간에 등교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3교시나 4교시의 준비물에 관한 이야기였을 수 있다. 선생님이나 아이들에게 들킬까봐 조심조심 교문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면 핀잔과 잔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틀림없이 다시 학교에 가서 남은 수업이라도 듣고 오라고 쫓아낼 게 분명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되면 내 멍청한 짓거리가 아이들과 선생님에게 다 드러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 거란 걸 알았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내 머리는 생전 처음으로 '전술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추고, 어떤 거짓을 첨가해야 그 상황이 가장 순탄하게 마무리될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잘못 들어서 결석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엄마의 잔소리는 거짓 눈물로, 다시 학교에 가라는 엄마의 조치는 아이들이 모두 야외수업(?)을 나가서 가봤자 소용이 없다는 거짓말로 무마했다. 그리고 나는 거짓 눈물을 흘릴 수 있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자신에게 놀라워했다.
한동안 엄마가 사실을 알게 될까봐 조마조마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의 염려나 불안과 달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거짓말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엄마도, 선생님도... 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는 거짓말의 세계라는 새로운 세계를 맛보았다. 조마조마함도 있고, 양심의 가책도 있어 전혀 좋은 경험은 아니었지만, 조심하기만 하면 '통하고', 잔소리와 부담처럼 피하고 싶은 상황을 완화시켜주는 효과도 있어 비상약처럼 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국민학교 시절에도 이따금 거짓말을 했다. 친구들에게보다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그러다가 중학교때 또 한번의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엄마가 학교에 왔다. 우연히 학교 건물 앞 계단 윗쪽에 친구들과 함께 서 있다가, 저 멀리 교문에 들어서는 엄마를 보았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나는 엄마를 못 본 척 등을 돌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도 저 멀리 멀찌감치 있던 나를 못 보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어느 부모나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다. 엄마는 나를 보았고, 왜 못 본척 했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정말 못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사소한 거짓말들과 달리 정말 가슴 찌릿한 양심의 가책을 강하게 오래도록 느꼈다. 그때 이후로 생각했다. '아, 정말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겠구나. 특히 남에게 상처를 주는 거짓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거구나.'라고
이런 굳은 결심을 했음에도 격동의 사춘기 호르몬은 내 말과 행동의 일관성과 진실성을 끊임없이 어지럽히곤 했다. 우리는 부모에게 많은 거짓말을 했고,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는 사춘기 자녀의 말과 행동의 진실성을 가릴 수 있을 만큼의 정보량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가 사춘기 자녀가 거짓말을 하면 그게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구분을 못한다. 그래서 거짓말이 통한다.
게다가 그런 거짓말을 하게 만든 사람이 부모 자신인 경우도 많다. 자식에게 무리한 요구와 기대를 하기 때문에 아이는 그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받을 질책이 두려워 거짓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때로는 방어적인 거짓말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사춘기 아이들은 초등학생들보다 거짓말로 인한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낀다. 또 초등학생들과 달리 쉽게 그것이 거짓말이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하는 거짓말은 이런 미성년자의 거짓말과는 또 차원이 다르다. <내 딸 서영이>라는 드라마에는 몇 가지 거짓말이 나온다. 가장 결정적인 거짓말은 아버지의 존재를 창피하다고 여겼던 서영이가 시댁과 남편에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영이의 고등학교 친구가 공부 잘하는 서영이에 대한 질투로 서영이에게 거짓말을 포함하여 못된 짓을 한 것이다.
사실 '못됐다'는 면에서는 서영이의 친구가 한 말과 행동이 더 나쁘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친구의 경우는 고의적 행위로 한 사람이 직접 피해를 봤지만, 서영이의 거짓말은 다른 사람을 특별히 피해 입히지 않는 방어적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명분도 있었던 서영이의 단순한 거짓말이 본래부터 의도적이고 공격적인 고등학교 친구의 거짓말보다 더 문제가 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서영이의 거짓말은 혈연을 부정하는 패륜적인 것이라서? 물론 그런 면도 있겠지만, 나는 그 차이가 성인의 거짓말과 미성년자의 거짓말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는 부모에게 성적표를 조작하거나 거짓말을 하여 안 보여줄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되어서 학력이나 학점을 조작하거나 거짓말을 한다면? 말하자면 성인과 미성년자는 그 사회적 책임 정도가 다른 것이다. 아이 때는 다른 사람 말에 속아서 자기도 거짓말에 동참했다고 하면 그 책임이 경감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자기가 거짓말을 하게 된 건 다른 사람말에 속았기 때문이라고 하면 그 책임이 경감될 수 있을까? 타블로 사건에서 아무리 타진요 회원들이 왓비컴즈의 말에 속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그래서 나는 <내딸 서영이>라는 이 드라마를 남편과 함께 보면서, 분명히 가상의 인물임에도, 내 경험에 비추어 '차라리 어렸을 때 거짓말을 해봤더라면 거짓말을 하는 게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지 알았을 텐데... 어렸을 때 거짓말 한 번 안 하고 너무 모범적으로 살면 저렇게 되는 거야'는 이상한 추론을 펼치곤 한다. ㅎㅎㅎ
2012. 11. 21.
'금안당 > 대안 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0) | 2012.12.06 |
---|---|
김지하 시인의 변신 혹은 변절에 대한 김동춘 교수의 소회 (0) | 2012.12.05 |
기사 열어보기 - 외로운 목소리, 최근 티벳 상황 - 알고 계십니까? (0) | 2012.11.27 |
안철수 예찬 (3) | 2012.11.24 |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건?? (0) | 2012.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