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의 에피소드를 다룬 만화영화 <검정 고무신>의 한 장면.


아이에게 "좋아서 괴롭히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 멀고느린구름



남자아이에게 치마가 들춰지는 아이스케키를 당한 여자아이가 울면서 교사를 찾아온다. 교사는 입가에 무척 자연스러운 미소를 떠올리며 짐짓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다, 니가 좋아서 괴롭히는 거야."


적어도 내가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초등학교 혹은 유치원 현장에서 쉽게 목격될 수 있는 장면이었다. 가정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위의 대사는 이웃집 아이에게 모종의 피해를 당하고 온 아이에게 많은 부모들이 종종 사용하는 위로(?)의 말일 것이다. 


남아에게 당하고 온 여아에게 주로 사용되는 말이지만, 반대의 경우에도 똑같이 문제가 되는 말이다. 이런 위로의 말은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장기적인 판단의 착란을 불러일으킨다. 


단순하게 말해 보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덤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허나 인간은 묵직한 스트레이트 펀치 한 방에 나가떨어질 수도 있지만, 가벼운 잽 여러 방에 서서히 충격을 쌓아가다 어느 순간 쓰러져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유독 '나쁜남자'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사랑을 받는다. 왜 그럴까. 드라마의 주 타겟인 여성 시청자들이 나쁜남자 캐릭터를 좋아해서 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여성들이 좋아하는 것이 어디 '진짜 나쁜남자'인가? 그렇지 않다. 여성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만 나쁜남자'다. 즉, 성격이 까칠하고 냉정한 면이 많지만 나에게는 의외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남성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 뿐이다.  


김기덕 감독의 동명 영화 <나쁜 남자>에서 나오는 여성을 성폭행하고, 여성의 인생을 말아 먹고, 포주 짓을 하고 그런 진짜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남성들(또 일부 여성들)은 이를 크게 오독한다. 최근 일어난 맥심이라는 남성잡지의 화보 논란 사건도 결국 이 오독으로부터 발생한 일이다. 


여성을 납치해 트렁크에 넣은 사진을 '나쁜 남자'라는 제목을 달아 표지로 쓴 남성잡지.


여성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는 이 통설의 시작점이 어디일까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바로 이 어린 소년의 '맘에 드는 소녀 괴롭히기'에 이른다.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남자아이를 귀엽게 바라보는 어른들의 온정적 시선, 그리고 이 시선을 받아들이고, 남자아이의 괴롭힘을 애정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숙명을 내면화하는 여자아이의 자세가 '나쁜 남자 프레임'을 오랜 세월에 걸쳐 구축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나쁜 남자'는 실제로는 나쁜 남자가 아니기에 다행이지만, 현실에서는 다른 여성에게 함부로 막 대하는 남성은 자기 연인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99%다. 어떻게 보면 '나쁜 남자 프레임'을 이용한 드라마나 영화는 우리 사회에 넘쳐 나는 '진짜 나쁜 남자'로 자라난 남성들을 구원해주기 위한 구제책에 가깝다. 여성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 이 사람이 나쁜 남자지만 나에게만은 잘 대해줄 1%의 나쁜 남자가 아닐까 - 나쁜 남자들에게 손을 내밀지만 십중팔구 99%의 진짜 나쁜 남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여성들은 곧 유아적 세계로 자신의 정신 수준을 조정하고 만다. 이 사람이 내가 좋아서 내게 나쁘게 하는 걸 거야... 하고 말이다. 


내가 한국 성인의 성관련 상담 통계를 매달 집계하던 2005~2006년 무렵에 배우자에게 정신적, 물리적 피해를 입으며 사는 여성들의 대부분이 위와 같이 말하는 것을 목도한 바 있다. 


"제가 좋아서 그러는 거에요." 


그 남편들에게 물으면 답은 이렇게 돌아온다. 


"아내가 좋으니까 때려서라도 정신 차리게 하려는 거죠."


어린 시절 아이들에게 심어놓은 잘못된 인식의 씨앗이 한 번도 교정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그대로 자라면 이처럼 무섭다. 


분명히 하자. 좋아하면 괴롭히지 않는다. 좋아하면 괴롭히지 않아야 한다. 내가 누군가를 괴롭힌다는 건, 그 사람이 끔찍하게 싫다고 말하는 거다. 그러니 좋아한다면 괴롭혀서는 안 된다. 좋아한다면 다정하게 대해야 하고, 좋아한다면 배려해야 하고, 좋아한다면 진실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유아나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을 상대로 '성희롱', '성폭행' 운운하며 막연한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 역시 좋은 효과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중학생 이상의 아이들이라면 명확하게 사회적, 법적 책임을 알려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그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선에서 단호하게 꾸짖고, 어떻게 해야 좋아하는 마음을 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지 자상하게 타이르는 편이 좋다. 경험에 따르면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성적인 전문 용어를 써서 공포감을 심어주면 이성 자체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혐오감이 싹틀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저기 또 아이스케키를 당한 여자아이가 울면서 다가오고 있다. 어떻게 할까?


"정말 속상한 일을 당했구나. 누구를 괴롭히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그 친구에게 가서 이건 정말 기분이 나쁜 일이라고, 네가 이런 장난을 계속하면 너를 정말 싫어하게 될 것 같다고 얘기하고 다시는 하지 말라고 하자."


* 좀 더 일반적인 남자아이의 현상을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괴롭히는 일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어떤 경우에는 더 악랄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 현상은 사춘기 이후 힘의 우위가 발생하면서 자연스럽게 사그라들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유년 시절에는 똑같이 여자아이에게도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2015. 11. 19. 멀고느린구름.


날짜

2015. 11. 2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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