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자유에 대한 단상 

- 금안당 



15년도 더 전에 업무 겸 관광 겸 해서 프랑스와 독일에 잠깐씩 다녀온 적이 있다. 두 나라가 참 많이 달랐다.

 

호텔 방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는 아침 풍경부터 달랐다. 프랑스는 아침 8시가 다 되어도 거리가 한산했다. 다니는 차도 드문드문으로만 있었다. 도시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9시가 되어가자, 갑자기 거리가 허급지급 출근하는 직장인들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의 물결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자, 거리는 다시 새롭게 아침을 시작하는 듯 천천히 조금씩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프랑스 파리의 풍경

 

독일에서 창 밖을 내려다본 시간은 아침 7시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도로가 이미 출근하는 승용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다들 전조등을 켠 채로. 그런데 부산스런 느낌 없이 조용했다. 붐빈다는 느낌보다는 질서정연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서두른다는 느낌도 없었다. 더불어 빵가게와 노점 시장에 아침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도 거리를 오갔다. 프랑스와 달리 독일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시간도 두 나라가 참 많이 달랐다. 독일은 오후 4, 5시가 지나면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 듯했다. 저녁이 되면 퇴근하는 사람들 빼고는 거리를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잠시 후면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반면에 프랑스는 밤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실 수 있는 술집과 카페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관광객들만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도 집에 들어가기 전에 음식점이든 술집이든 잘 들르는 것 같았다. 특히나 빠리의 가게들은 실내외가 거의 구별이 되지 않았기에 상가 거리 전체가 밤 늦게까지 활기에 넘쳤다. 그걸 보고 있던 외국인인 나는 '프랑스 사람들이 이렇게 늦게까지 노니,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가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독일보다는 훨씬 숨통이 트이고, 관광객다운 흥겨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홍세화씨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에서도 나왔던 얘기 같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신호등을 무시하기 일쑤다. 빨간 불이든 파란 불이든 개의치 않고 건널 만하면 그냥 건너간다. 차는 보행자에 맞추어 알아서 멈춰주거나 서행한다. 내가 갔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빨간 불에 길을 건너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국민학교 사회 교과서는 어린아이들에게 신호등의 규칙에 대해 입이 닳도록 가르치고 있었고, 심지어 아무도 다니지 않는 한 밤중이나 이른 새벽 시간에 빨간 불에서 멈춰서는 운전사를 찾아내 칭찬하는 리얼프로그램까지 있었던 터라, 프랑스 사람들의 이런 행동은 한국인,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에게 묘한 해방감을 맛보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랑 같이 갔던 여직원 중 한 명은 '시험 삼아' 횡단보도를 몇 번이나 건너보면서 재미있어 했다.  

 

길거리에 담배꽁초 등 쓰레기를 버리는 문제도 그랬다. 우리나라에서도 쓰레기봉투제가 없던 시절이라 길거리에 휴지나 담배꽁초 등 간단한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하면, 길거리 화단 끄트머리에 담배꽁초를 버리듯이 쓰레기를 거리의 어디 구석진 곳에 몰래 버렸다. 그러면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도리어 쓰레기를 길바닥에 버리라고 권장하는 게 아닌가! 가이드 말에 따르면, 사람들이 거리를 너무 깨끗하게 사용하면, 청소부들이 자기들 일거리와 일자리가 줄어들거나 없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파리는 워낙 하수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길바닥에 버려진 작은 쓰레기들 쯤이야 새벽에 물로 쭉 씻어버리면, 쉽게 청소가 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이 도리어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셈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신기하면서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반면에 독일에서는 보행자가 직접 조작하는 신호등은 많았지만, 어쨌든 파란불에서만 길을 건너야 했다. 말하자면 시민들이 규칙을 쉽게 지킬 수 있도록 필요한 편의는 제공하지만, 그래도 규칙은 규칙이었다. 독일 생활을 몇 년 한 친구의 이야기에 따르면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더 엄격한 면이 많았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할머니 경찰' 때문이었다. 시끄럽게 떠들면서 길을 가거나, 인도를 지그재그로 걷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한가한 길에서 신호등을 지키지 않거나 하는 등의 사소한 규칙 위반 행위가 있으면, 경찰이 아니라 같이 길을 가던 할머니들이 어김없이 '지적'을 하기 때문에, 이런 사소한 규칙들이 몸에 배지 않은 외국인들은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독일에서는 길가에 차를 함부로 주정차 시키거나 하는 불법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명 공중도덕에 어긋나는 사소한 규칙 위반 행위들도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본래 멀리 있는 경찰보다는 가까이 있는 이웃의 눈이 더 무서운 법이다.

 

독일 베를린의 거리


프랑스에서 또 하나 신기했던 건 지하철 검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 안에서 매표소를 찾기도 힘들었다. 어쩌다 한번씩 표 검사를 한다는데, 그리고 한 번 걸리면 요금의 열 배, 스무 배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는데,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는 지하철을 타려면 꼭 표를 사야 한다는 의식을 갖기는 힘들어 보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급하면 표를 안 사고 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의식 한켠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을 것 같았다. 혹은 아예 표를 안 사고 타고 다니다가 한 번씩 걸리면 그때마다 밀린 요금을 낸다고 치지 뭐, 라고 편하게 생각할 것도 같았다. 그리고 요금을 안 내거나, 과속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나쁜 사람, 부도덕한 사람으로 낙인찍는 분위기도 거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시민의 일상과 공권력의 접점(혹은 규제)이 최소한이 되게끔 설정된 그 자유분방한 상황이 신선하기도 하거니와,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죽기 전에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은 지역으로 파리를 손꼽아두고 있다. ( 예전에는 6개월 이상은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나이 들어 그런지 한 2개월만 살아보면 될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만 말이다.) 도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아마도 파리가 살아보고 싶은 유일한 도시일 것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상황과 대비되는 그 자유로움과 시민의 자율성, 그리고 다양함을 포용하는 능력이 마음에 들었다. 그후 홍세화씨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읽고, 내가 잠깐 경험한 프랑스에 대한 나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음에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후로도 나는 프랑스 관련 소식들을 눈여겨보곤 했다. 최근에는 올랑드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대접을 받던 동거녀를 놔두고 배우 출신 여자와 외도를 하다 언론에 걸린 사건도 있었다. 일부 선진국 언론들까지 포함하여, 다른 나라 언론들은 이 사건을 마치 대통령의 부도덕함, 혹은 스캔들의 시각으로 다루려는 듯 했지만, 정작 80%에 가까운 프랑스 국민들은 이건 대통령의 사생활일 뿐이고, 대통령의 품성이나 도덕성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 같았다. 올랑드 대통령 또한 염문설을 보도한 언론에 대해 오히려 '사생활 침해'로 고소하겠다고 성명을 내는가 하면, 언론 보도 후 2주만에 개인 자격으로 하는 발언임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뻔뻔스럽게(?)' 기존 동거녀와의 관계를 끝내기로 했다는 결정을 언론에 알렸다.

 

정식 혼인관계가 아니어서 프랑스 국민들이 외도를 한 대통령에게 더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닐까라고 볼 수도 있지만, 간통죄가 성립하지 않는 프랑스에서 혼인 관계 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올랑드 대통령에 비판적인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대표조차 "세금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은 사생활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대통령을 옹호했다고 하니, 정치 영역에서조차 개인적 부도덕함이나 스캔들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일도 없는 듯하다. 이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프랑스 국민들과 여야 정치가들이 합심하여 지키려는 우선적 가치가 사생활, 말하자면 개인의 자유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공인 중의 공인인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한 개인으로서 이 자유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음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의 경우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직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에서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닌 연예인들조차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산다는 명분 아래 멋대로 '공인'이라는 라벨을 붙이고는 프라이버시 영역을 함부로 침해한다. 이 때문에 고위 공직자들도, 연예인들도 겉으로는 모두 도덕군자가 되어야 하니, 실제로는 위선과 거짓이 난무하게 된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문제만 해도, 일단 혼외자식의 유무가 검찰총장의 자격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중요 잣대가 될 수 있다고 몰아가는 보수 언론의 행태도 참으로 얍싹하지만, 자신의 사생활 영역이 침범당했는 데도 그에 대해 항의하기는커녕 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는 사생활 문제를 거짓으로 덮으려다 오히려 문제를 꼬이게 만든 전 검찰총장의 태도 또한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하여간 보다시피 문화라고 할까, 대중정서라고 할까, 이 면에서 프랑스와 우리나라는 많이 다르다. 그리고 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면서도 개인의 권리를 함부로 무시하는 우리나라 문화가 싫고, 프랑스 문화가 부러워서 한번쯤 프랑스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

 

사실 우리나라는 개인의 자유를 너무 존중하지 않는다. 정치가들은 국민과 국가를 '위해서' 혹은 '생각해서'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책을 함부로 시행하고, 경제인들은 직장이 무슨 가족이기라도 한 것처럼, 업무 영역을 넘어서서 직원들의 사생활에 개입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부모들은 자녀의 프라이버시와 자율성을 우선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는 동료 관계나 친구 관계, 연인 관계 등 일반적인 관계들에서도 다르지 않다.

 

예전에 외국 문화와의 교류가 아직은 낯설던 시절, 외국에 나가게 되는 사람에게는 '외국인에게 나이를 물어보거나 혼인 여부를 먼저 물어보는 건 실례'라는 선경험자의 조언이 주어지곤 했다. 외국에 다녀와본 선경험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듣고 있던 사람들은 '아니, 나이를 물어보는 게 뭐 어때서?'라고 반문하면서도, 당시 젊었던 우리들은 마음 한켠으로 '그래, 그게 맞을지도 몰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인의 사생활에 너무 시시콜콜 관심이 많아'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보수적인 유교문화의 잔재가 완전히 떨쳐지지는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서구문화에서는 유사례를 찾기 힘든 '고부 갈등'이 계속되고, 외국에 나가 살아본 젊은 아내는 보수적인 고국으로 다시 귀국하는 걸 영 내키지 않아 한다. 동양인에게만 특이한 것인지,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특이한지는 알 수 없지만, 여성들의 '화병'도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존재한다. 또 남자든 여자든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면서 자신을 대단히 '도덕적인' 사람으로 포장해야 한다. 그러니 위선과 거짓이 아이들 눈에까지 띄인다.

 


종영된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

부부관계도 도덕적이어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먼저 바람을 피운 쪽이 잘못이다. 얼마 전에 종영된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에서 보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는 것만으로, 그 일은 '불륜'이 되고, 당사자들은 죄인이 된다. 그 드라마를 처음 봤을 때 든 내 생각은 '조강지처가 무슨 벼슬도 아닌데, 아무리 남편의 외도로 인한 피해자라고 해도 저런 공격적 행동이 어떻게 용납될 수 있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후로 인터넷에 올라오는 드라마 비평 글들(이중 다수가 젊은 사람들의 소감일 텐데도) 중에서도, 조강지처의 히스테리를 문제삼거나, '불륜'을 옹호하는 글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메디슨카운티의 다리> 같은 외국 불륜 영화에는 부도덕이라는 잣대를 전혀 들이대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문화는 개인이 느끼는 감정의 자유까지도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A가 B를 짝사랑한다. 프랑스라면, A가 잘못 하고 있다고 평가할 테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짝사랑하는 A가 무슨 잘못이냐,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는데 받아주지 않는 B가 너무 매몰찬 것 아니냐, 라는 식의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이라면, 왜 A가 B에게 정식으로 고백하지 않고, 짝사랑만 하고 있는지 이해를 못할 것이다. 혹은 A의 감정이 스토커와 유사한 범죄행위로 발전할 수 있다고 염려할 수도 있다. 반대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고백하지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는 A를 동정해서 B에게 아량을 요구하거나 B에게 화를 낼 수도 있다. B의 감정이 어떤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도, 이 측면을 도외시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까지 좌지우지하려 들면,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좋아서 입고 있는 옷을 강제로 뺏기고 나서는 그들이 골라준 옷을 억지로 입기를 강요받는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나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느낌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나는 어느새 남들이 입혀준 옷들을 내가 선택한 내 감정이라고 여기는, 일종의 세뇌당한 상태에 들어가 있게 되고, 나의 진짜 감정이 어떤 것인지 인식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 면에서 신세대들은 기성세대인 우리들보다는 많이 자유로워진 듯하다. 우리 때는 '프라이버시'라는 어휘 자체가 생소한 어휘의 하나였지만, 지금의 신세대들은 이 어휘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 애쓰고 있다. 우리 때는 '개인의 자유'를 이야기하면, 곧바로 이기적인 '개인주의자'로 치부되곤 했지만, 지금의 신세대들 중 일부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개인주의자'로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내 보기에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사실 문화란 건 그 문화를 이루고 있는 일부 구성원이 바꾸고 싶다고 해서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구성원의 다수가 바꾸기를 원해야 할 뿐 아니라, 바꾸고 싶어하는 구성원 스스로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왜냐하면 문화는 내재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장하는 사람 스스로가 예를 들어 평등주의자가 아니면서 평등주의 슬로건만 내건다고 그 문화가 평등주의적으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릴 적에 개인적 자유를 존중받지 못하고 자라면, 진짜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가 없기에, 심지어는 자기 감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기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뭔지, 자신이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혹은 부모나 사회가 인정하는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을 자신의 꿈이라고 여긴다. 이렇게 자란 신세대가 젊은 혈기로 '프라이버시의 자유'를 외치더라도, 그 열정과 외침만으로 우리 사회가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가 될지는 사실 미지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자유라는 가치가 다른 가치들에 압도당하지 않고 가능한 최소한으로만 제한받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 이 점에서 나는 우리나라 정치가들이 무슨 정책을 실시하거나 입법을 할 때만이라도 제발 좀 개인의 자유라는 면을 고려에 넣었으면 좋겠다. 복지라는 미명 하에 개인의 자유를 훼손하는 면은 없는지,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과도한 간섭은 아닌지...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가 존중되는 프랑스 사회에서는 실업률이 높아졌을 때, 기존의 노동조합이 나서서 자신들의 노동시간을 8시간에서 6시간으로 줄여 생기는 일자리로 실업 문제를 해결하자는 안을 내놓았고, 다수의 취업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이 제안에 찬성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연히 기존에 취업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임금 인하라는 손해를 감수해야 했지만, 그들은 좀 덜 받더라도 좀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도 가치가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사실 인간의 행복이 돈 몇 푼에 걸린 게 아니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행복해지려면, 무엇보다 개인적 자유의 시공간이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물론 사회 구성원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초적인 복지가 전제된 상태에서 하는 이야기지만, 어쨌든 우리 사회의 부의 총량은 과거에 비해 몇 십, 몇 백배가 늘어났고, 각자가 원하는 만큼은 아니라도 대다수 구성원이 그 늘어난 부의 총량이 가져다주는 혜택을 입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관심을 문화적 부, 정신적 부의 실현에 더 많이 쏟아도 될 법도 한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가난했던 옛날의 그 시절보다 더 치열하고 악착 같은 생존경쟁, 아니 물신숭배가 벌어지는 것 같아 씁쓸한 입맛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닌 요즘이다.

 



날짜

2014. 3. 1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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