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알게 된 우리나라 언론의 실상
- 금안당
벌써 일주일 전쯤인 것 같다. 늦은 밤에 채널을 돌리다가 ebs 다큐프라임에서 하는 '우리는 왜 대학을 가는가?'라는 시리즈 프로그램을 시작하기에 채널을 고정했다. '이런 프로가 있었군' 하면서 가만히 보니 벌써 5부째이다. '그럼 이번 것 보고 괜찮으면 앞의 것들도 다시 보기로 봐야겠네...' 하면서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일단 보기로 했다. 5부의 제목은 '말문을 터라'(?)였다.
앞부분에서 충격적인 내용이 나온다. 2010년 서울에서 있었던 G20 폐막 기자회견장 장면인데, 오바마가 한국기자들에게 질문권을 준다. 대회 개최국에 대한 감사와 배려의 일환으로. 아무리 주최국이라도 한국기자가 미국대통령에게 질문할 기회를 갖다니! 한국언론인으로서는 좀체 갖기 힘든, 그야말로 '하늘이 준 행운'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회견장에 침묵이 흐른다... 나서는 기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오바마의 제안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러웠던 걸까? 오바마의 거듭된 제안에도 아무도 나서지 않자, 한 중국인 기자가 '아시아 언론'을 대표해서 자기가 질문하겠노라고 나선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오바마도 당황한다. 하지만 오바마는 자신이 그런 제안을 한 최초의 의도를 고수한다. 자신은 특별히 한국 기자에게 질문권을 주고 싶었다는 의도.
그래서 오바마는 그 중국 기자에게 한국 기자가 정말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기회를 그에게 주겠노라고 확인한 후, 다시 한국기자들에게 질문할 사람이 없느냐고 묻는다. 통역을 사용해서 질문해도 좋다고 하면서... 오바마는 한국기자들이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몇 번이나 "Nobody?"라고 묻는 그의 음성에는 갈수록 당혹감과 허탈함이 짙어진다. 해당 장면은 여기서 끝이 났는데, 나래이터는 결국 그 중국기자가 미국대통령에게 질문을 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 프로는 이런 상황이 벌어진 원인이 우리 교육이 '질문하지 않는 교육'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는지, 이어지는 영상들에서는 미국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강의 방식과 강의를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를 우리나라 대학들의 그것과 비교한다. 하지만 앞선 에피소드에서 받았던 충격의 여파 때문인지, 집중이 잘 안 되는 내 머리 속에는 "아니? 이런 사건이 왜 언론에 보도가 안 됐지? 나만 모르고 있었을 리도 없는데???" 라든가 "오바마가 잘 알지도 못 하면서 한국교육을 그렇게 극찬하더니, 이제 생각이 좀 달라졌겠군."하는 엉뚱한 잡념만이 무성했다.
다음날 점심을 먹으면서 같이 밥을 먹던 사람들에게 그 프로그램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런 사태가 벌어진 원인에 대한 나의 해석은 그 프로그램의 입장과는 좀 달랐다. 물론 토론식 수업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나라 교육방식에도 문제가 있지만, 우리나라 기자들은 일국의 정상에게 준비되지 않은 즉흥적인 질문을 해본 경험이 한번도 없어서가 아닐까란 게 내 해석이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대통령 기자회견에서는 모든 질문이 사전에 조율되어서 질문에 대한 답변 또한 사전에 충분히 준비된다. 나온 답변을 놓고 하는 추가질문이나 보충질문이 허용되는 경우도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기자회견인데도, 대국민담화와 다를 바가 거의 없다. 대국민담화문에 넣기에는 좀 세부적인 내용들을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란 형식을 빌어 이야기할 뿐이다. 기자들의 질문 또한 허용이 안되기 때문인지 돌직구는 거의 없고, 에둘러 묻거나 두리뭉실하게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우리나라 기자들이 그나마 더 친숙하고 기회도 더 자주 있는 자국의 대통령에게도 못해본 일을 감히 초강대국인 미국 대통령에게 할 수 있었을까? 설사 우리나라 대학교육, 더 나아가 고등학교 교육에서 토론문화가 활발하다 하더라도, 그런 토론과 논쟁 능력이 사회에 나가써먹을 데가 없는 상황에서, 우연히 미국대통령에게 질문할 '단 한번의 기회'가 왔다면, 기자들은 그런 절호의 기회를 살릴 수 있었을까? 아마 누구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이나 고급관료들의 기자회견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토론문화나 토론능력은 정말 써먹을 데가 없다. 기업에서도 겉으로는 창의적인 인재를 이야기하지만, 상사나 보스, 혹은 사주의 지시나 방침과 어긋나는 '엉뚱한' 직원은 결국 살아남기가 힘들다. 모든 조직이 경직되어 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과감한 시도 이전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공무원들도 문제를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예 민원을 발생시키지 않거나 발생한 민원을 소멸시키는 능력이다. 그러니 문제제기의 타당성을 놓고 논란을 벌이는 일(논쟁 혹은 토론) 같은 건 벌어지지 않는다. 그냥 억지 주장과 편의주의가 판을 칠 뿐이다.
또 하나, 우리나라에 토론문화가 발달하지 않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문제제기 자체에 너무 쉽게 정치색을 덮씌우기 때문이다. 기존상황에 대해 뭔가 문제제기를 하면, 그것이 별 것 아닌 부분적이고 세부적인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라 해도, 특히나 사실관계를 따지고 논리적인 측면이 있는 문제제기라면, 무조건 반정부적 아니면 친정부적이다. 정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비정치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만드는 데 있어서는 언론의 역할이 자못 크다. 좌파 언론이든 우파 언론이든 우리나라 언론인들이 가장 잘하는 역할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마치 경제 문제이든 사회 문제이든 문화 문제이든 교육 문제이든 가리지 않고 정치적인 문제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처럼.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문제는 친정부적인 해결과 반정부적인 해결 방식 둘 중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국민들을 세뇌시키기로 작정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사실 이런 자세를 가져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은 정치가들이지 언론인이 아니다. 정치가들이야 자기 직업이 정치이니, 세상의 모든 문제가 정치에 귀속되어 정치로만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되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정치가 될 테니까. 물론 아무리 정치가들이라도 이런 자세가 바람직하거나 올바르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언론인이 세상을 정치가처럼 보는 것보다야 훨 낫다는 이야기다. 언론이 정치적이 되면, 언론사에게는 당장의 경제적 수입 증대를 가져다주고, 언론인들의 일신의 영달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언론이 독자적인 자기 영역과 역할을 상실하고 정치에 종속되고 마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 언론의 입장에서 보면 소위 말하는 '제 무덤 제가 파는 꼴'이 된다는 이야기다.
여하튼 그래서인지 초강대국의 대통령에게 질문할 기회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을 능력은 없는 우리나라 기자들이 '정치적'으로는 참으로 놀라운 능력을 키워왔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된 건 '썰전'이라는 종편 프로그램을 보고서였다. 인터넷에서 안철수의원이 서울시장과 대선에서 자신이 양보했으니 이제 민주당이 양보할 차례라는 식의 기사제목들을 봤을 때만 해도 '음~ 안철수의원이 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더니 이를 악 물었나보네'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런데 썰전에서 강용석 전의원과 이철희 소장이 이야기하는 걸 가만히 들어보니, 경과가 그게 아니었다.
내 보기에 조선일보의 '술수'였다. 조선일보와 안철수 의원측이 내놓은 인터뷰 전문 내용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안철수측에 불리 한 조선일보 전문에 의하더라도 안철수가 양보를 요구했다는 해석은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문맥이었다. 설전에 따르면 조선일보가 내놓은 전문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기자) "대선 후보를 양보했고,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했는데, 이번에는 새정추가 후보를 낸다는 얘기인가?"
(안철수) "양보 받을 차례인가요? 국민들이 판단할 것이다. 정치도의적으로."
보다시피 '양보'란 표현은 기자에게서 나온 것이고, 안철수는 이 용어를 그냥 가볍게(혹은 농담 삼아)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정작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뒤에 있다. 독자 후보를 내어 국민들의 심판을 받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다시 확인해주는...
하지만 조선일보는 기사에서 이 인터뷰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왼쪽단에서 보다시피 기자가 질문한 내용이 안철수 의원이 말한 내용으로 바뀌어 있고, "양보 받을 차례인가요?"란 농담이 "이번에는 우리가 양보 받을 차례 아닌가"로 미묘하지만 치명적인 차이의 문장으로 바뀌어 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며칠 후 안철수 의원측에서 기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뻔뻔스러운 건지 난독증이어서 그런지 위와 같은 인터뷰 전문 내용을 공개했다고 한다.
뭐 사실 조선일보로서는 나중에 진실이 드러나더라도 손해볼 게 없었을 것이다. 이 기사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고, 다른 언론들이 그대로 보도하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민을 위한 길이라면 백번이라도 양보를 하겠다'고 응답하는 등, 상황은 이미 일파만파 퍼져갔으니까 말이다. 이런 걸 아마 '농간' 혹은 '비열한 짓거리'라고 부를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의 농간이라면 모를까, 언론의 농간이라니? 게다가 이 정도의 왜곡과 조작이라면 이미 언론인이 아니라 어떤 노회한 정치인보다 더 정치가답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말 할 말이 없다. 아니, 어찌 보면 아직도 언론의 본분 혹은 기본 양심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같은 사람이 어리석은 건지도 모르겠다....
(30분 후) 그럼에도 이 글의 결론을 이런 비관적인 분위기로 끝낼 수는 없기에, 한 마디만 덧붙이고 싶다. 언론이든, 정치든, 교육이든 정치적 당파성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각자의 본분을 지키고, 기본 룰을 지키는 상태에서 내실을 키우자고. 그래야만 정치가들은 권력다툼이 아니라 정책 논쟁을 벌일 수 있고, 학생들은 교수에게 질문하고 교수의 이론을 놓고 토론할 수 있을 것이며, 기자들은 초강대국 국가수반을 긴장시킬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진짜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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