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사 한국사 교과서가 실패한 이유

- 금안당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채택 문제가 2014년 새해 벽두를 장식하고 있다.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오고, 여당 대표의 "비통하다"는 발언, 그리고 이에 발맞추어 교육부도 지금까지 없던, 개별 고등학교의 교과서 선정-철회 과정을 감사한다는 특이한 액션을 취하는 것 같다.

 

참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한국사 검인정 교과서들이 이렇게 주목받다니! 잠시 되돌아보면, 이명박 대통령 시절 '국제화', '글로벌화'의 대세에 밀려 국어 교육과 함께 이러다 자칫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불안하던 한국사 교육이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 1년차에  '국민교육기본 공통과정'의 필수 통과의례로 다시 자리매김되었다.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안도감과 함께 잘 한 일이라는 칭찬이 절로 나왔다.

 

사실 2, 3년 전까지는 내가 파자 청미래 고등과정에서 한국사를 가르쳤다. 고등과정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근자의 입시 제도에 대해 거의 몰랐던 나는 한국사가 당연히 수능 필수과목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능 필수과목이 아닌 데다가, 사탐 중에 한국사를 선택하게 되면, 서울대 등을 목표로 하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과 경쟁하는 꼴이 되어 불리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왠만해서는 선택과목으로도 택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야! 그래도 공무원 시험 같은 것 보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런 시험에서는 한국사가 필수야! 이번 기회에 해놓으면 좋잖아'라는, 참 없어보이는 설득을 아이들에게 했지만, 결국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할 정도의 수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 논란 과정을 보니, 국사가 수능의 필수과목으로 지정되고, 국사교과서가 전국민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고 좋아라만 하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왜냐하면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의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관심이 교육적 관심이 아닌 정치적 관심의 색채가 짙은 데다가, 교학사 교과서의 공동저자인 이명희 공주교대 교수가 "(교학사 이외의 교과서는) 북한을 옹호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전교조가 원하는 교과서라는 것을 밝혀내겠다"면서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세력의 실체를 더 적나라하게 폭로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머니투데이 뉴스 1월 6일자)

 

그러니까 국사 교과서가 더 이상 학생들이 배우는 교재인 교과서가 아니라 이념 서적이라는 주장이다. 참, 나가도 너무 나갔다. 교학사 교과서만이 아니라 나머지 7종 교과서들도 모두 국사편찬위원회의 검정심의를 통과한 교재들인 텐데, 교학사 교과서 저자는 나머지 교과서들 모두를 불온유인물, 이적표현물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게다가 전교조 소속 교사는 전체 교원의 20%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교학사 교과서가 아닌 다른 교과서를 택한 모든 교사들을 전교조 교사인 양 대하고 있다. 그리고 전교조 =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세력의 실체"이다. 이건 누가 봐도 이명희 교수의 지나친 흑백논리와 우려에서 나온, 나머지 7종 교과서의 저자들과 역사 교사 전체에 대한 '명예훼손' 행위라 할 것이다.

 


어쨌든 희안하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관한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 관계의 타당성 여부가 아니라, 역사적 시각, 아니, 역사적 시각도 아닌 정치적 관점이나 이념 논쟁으로 비화하는 것이.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합의한 것은 우리 어른들이 아닌가? 그래서 교사들은 어느 정당에도 가입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은가?

 

나는 정말로 교육이 중립적, 아니 비정치적이기를 바란다. 특히 몇 천년이라는 긴시간을 다루는 역사가 아직 역사적 평가도 이루어지지 않은 현재의 정치적 관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걸 보고 있기가 힘들다.(사실 나는 아직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은 최현대사를 고등학교 수준에서 다루는 건 무리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명희 교수의 주장만큼 나머지 7종 한국사 교과서가 심하게 편향적이라면, 그리고 내게 교과서 선정 권한이 있다면, 나는 그런 교과서로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도 원치 않을 것이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역사교사들이 그럴 것이다. 장담하건대 현장의 역사교사들이 원하는 건, 학생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지, 아이들이 로봇처럼 교과서에 적힌 역사적 사실들을 틀리지 않고 암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교과서는 역사 해석에 있어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는 부분이 있을 때,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을 함께 소개해주는 교과서이다. 아마 나 뿐만 아니라 다수의 역사 교사들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다수의견이든 소수의견이든 역사적 사실들이 명확하게 그 의견의 근거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 스스로 판단도 할 것이고. 양쪽 의견이 각각 장단점이 있다는 것도 알 것이다. 이건 학생들이 역사의식을 키울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해당 교과서의 저자가 어떤 시각에서 집필했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어느 쪽 시각에서 집필하든 반대편 해석도 함께 실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 전에 더 중요한 건 사실 관계를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것, 이것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첫걸음이다. 반대로 역사적 사실을 감추거나 왜곡하는 건, 퍼즐 조각을 주지 않거나 잘못된 조각을 주면서 역사라는 거대한 퍼즐을 맞춰보라고 지시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 않아도 과거의 역사는 사료가 부족해서 아직 찾지 못한 조각 투성이인데, 거기다 잘못된 조각까지 끼워져 있으면, 평생 가도 역사라는 퍼즐은 맞춰질 길이 없다.

 

듣기로는 교학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다고 하지만, 사실 관계라는 면에서 상당히 부실하다고 한다. 또 이 교과서로 배우면 수능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못받는다는 실험(?)도 있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학부모들에게도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내가 보기에 이번에 교학사 교과서 채택이 거의 전무한 주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당파성으로 이야기하더라도, 중도 성향인 교사나 학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우익 성향인 이들조차  굳이 부실한 교과서를 우리 아이, 우리 학생들에게 배우게 하여 아이들이 불이익을 감수케 할 만큼 '과감한' 교사나 학부모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의 우익 일본사 교과서는 아무리 보수 우익적 주장이라 해도 절대 자기 민족을 배반하는 서술은 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그렇기는커녕 아마도 일본 민족 우월주의에 근거한 국수주의 입장이 확고히 관철되었을 텐데, 교학사 교과서는 정신대 할머니들까지 모욕하는 반민족적 친일 사관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건 아무리 보수 우익이라도 우리나라 사람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관점이다. 이것이 교학사 교과서 채택률이 거의 전무한 두 번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교육부와 저자, 출판사는 교과서 선정 과정에서 '불법적인' 외압이 있었다고 보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100%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그건 그들만의 주관적 해석, 혹은 오해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에 지금 이 상황은 국사편찬위원회가 내건 기본 조건에 맞는 8개의 수석 중 하나를 고르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에게 나머지는 다 조건에도 부합하고, 고만고만해 보이는데, 유독 하나만 너무 투박하달까, 수석으로서의 기본미가 부족하달까, 혹은 국민들 대다수의 미적 감각에서 봤을 때 대단히 생뚱맞게 느껴진달까, 그런 게 아닐까? 말하자면 상품으로서 실패한 것 아닐까? 그 수석의 주인은 왜 사람들이 자기 수석의 가치를 몰라주고 퇴짜를 놓는지 억울하기 그지없겠지만, 돈과 시간, 노동력을 들여서 그 상품을 소화해야 하는 사람들의 선택권도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까?

 


2014. 1. 7.

 

 

 


날짜

2014. 1. 1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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