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해준다  

- 금안당

 


<children of men>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국 영화이다. 소설이 원작이라고 하니 소설에는 자세한 내막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영화에서 이 사회의 사람들은 더 이상 아이를 배지도, 낳지도 못한다. 말하자면 인류에게는 더 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이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자포자기하고, 세계의 모든 나라들과 대도시들은 자멸적인 폭력과 테러로 붕괴한다. 오직 영국만이 군대의 힘으로 간신히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자국의 파멸적인 야만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으로 몰려든다. 이 때문에 영국 정부는 불법 이민자들을 적발하여 처벌하는 것을 최중요 과제로 삼는다. 반면에 살겠다고 몰려든 불법 이민자들을 도로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비인도적이라고 여기는 반정부 세력이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하루하루 생명을 더 연장해야 하는 이유를 억지로나마 찾아내면서 살아가는 주인공 같은 사람들이 있다. 텔레비젼에서선전하는 '편안하게 숨을 거둘 수 있게 해주는 약' 광고를 매일매일 지켜보면서... 그리고 비상시에 쓸 요량으로 그 약을 일단 구입은 해놓은 사람들이... 이 상황에서 18세 소년인 최연소 인간이 사고로 죽는다. 절망이 한꺼풀 더 그들 위에 내려앉는다.

 

그런데 주인공은 우연히 반정부파인  전부인으로부터 아이를 밴 불법이민자 흑인소녀를 보호해서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인간이 아기를 다시 가질 수 있다니!  주인공에게만이 아니라 이 흑인 산모와 그녀가 낳은 아기를 만난 사람들에게는 죽은 자도 일으켜 세울 만큼 충격적이고 강렬한 희망이 움튼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아기의 얼굴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경건함 그 자체이다.

 

그럴 것이다. 아마도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리고 그때 참으로 귀한 인류의 자손이 태어난다면, 그 부모의 신분과 출신이 어떠하든 우리는 아마도 그 아기에게서 예수님이나 부처님을 만났을 때나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과 경건함을 느낄 것이다.

 

사실 희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건강하고 가장 아름다운 동력원이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이 우리에게 그토록 소중한 것도, 그들이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인간이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동력원들 중에는 소유욕, 권력욕, 명예욕, 지식욕 같은 욕심도 있고, 질투나 복수심 같은 부정적 감정들도 있다. 또 가학적 피학적 쾌락까지 포함하여 쾌락이 삶의 유일한 동력인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런 감정이나 욕구가 우리 삶의 추진력이나 동력원이 되면, 사실 우리는 건강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종말을 눈앞에 둔 상황인 이 영화에서도 그런 어리석은 욕심과 부질없는 감정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여린 새싹처럼 막 피기 시작한 '희망'을 자기 것으로 이용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산모와 아기는 위험에 처한다.  '희망'이 다치거나 손상되지 않고 제대로 온전히 피어나기를 바라는 주인공은 그들로부터 산모와 아기를 지켜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한 대학생의 대자보가 붙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흔든 지난 주, 이번 주는 인터넷의 기사들을 들여다보는 게 재미가 있을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또 이번 주에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잘 보지 않는 내가 우연하게도 '변호인'을, 그것도 오프닝을 보고, '아, 그래 맞아, 저 시절에는 그랬었는데, 잊고 있었네.'라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을 느꼈다.


 

 


우연히 두 개의 영화를 보고, '안녕들' 관련 사건들을 읽어보면서, 내가 갖게 된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은 희망을 갖기를 원하고 희망을 보기를 원하는 게 아닐까?'란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특히 젊은 사람들은 희망이 없이는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희망을 갖고 싶어하고 보고 싶어하는 건, 그만큼 지금 상황이 절망스럽다고, 희망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희망을 갖고 사는가 아닌가는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십여년 전까지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을 갖지 못하는 문제는 집단의 문제가 되어버렸고, 사회의 문제가 되고 말았다. 

 

영화 변호인의 시대에는 희망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권력의 폭력성과 야만성에 있었다. 지금 시대에는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희망을 갖지 못하는 주요 이유가 경제적인 차원에 있다.  경제적인 문제에 너무 쫓겨서 옆사람도, 다른 남들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삭막하기 그지 없는 사회문화, 누구도 살고 싶지 않은 사회문화가 자꾸 만들어지고 있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갑갑하다고, 힘들다고 말할 권리와 자유조차도 자꾸 짓눌리는 것 같다.

 

그래서인가, 문체부가 발표한 '2013년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 결과'에서도 우리 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가치로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말한 응답이 10점 만점에 평균 8.7점으로 가장 높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는 자신만 손해보는 게 아닐까란 두려움이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문제는 그러고 나니 '희망'이 없어져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희망이 없어져가니, 갈수록 갑갑하고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안녕들' 대자보는 이런 상황의 최대 피해자인 젊은이들이 어떻게든 이 숨막히는 상황을 타개해보겠다고,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내 옆의 힘들어하는 이웃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시선이라도 한 번 보내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사회현상인 듯하다. 

 

비슷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최초의 불씨는 번져갔고, 이렇게 조금이라도 어둠을 밝히자 예기치 않게 희망이 싹트기 시작하고 있다. 덕분에 좌절과 절망에서 시작된 '안녕들' 캠페인은 이제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건네주고 심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것을 천사나 함직한 역할로 여긴다. 하지만 <children of men>의 흑인소녀처럼, 또 <변호인>의 송변처럼, 또 부모에게 어린 자식이 그런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천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는 2013년 연말에 시작된 이 희망의 불씨가 꺼지거나 이용당하지 않고, 인정 많고 배려심 깊은 한국 사람의 상징처럼 큰 등불이 되어 앞으로도 환하게 타오르기를 바란다.

 


2013. 12. 21.



날짜

2013. 12. 21. 02:45

최근 게시글

최근 댓글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