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이 말했던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둘 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을 인간은 '생각한다'에서 찾았고, 르네상스 정신을 이어받은 근대사상가들답게 이 때 생각하는 주체는 '이성'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성은 합리적이고, 존재를 뒷받침할 만큼 현실적이며, 강력한 파워를 갖는다고 여겼다. 말하자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생각'이라고 본 것이다.
반면에 동양철학은 서양철학만큼 인간의 생각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인간의 생각 중 하나인 '망상'이 분별지심으로 인해 생긴다고 본다. 왜냐하면 세상 만물은 연기하여, 다시 말해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는 것인데, 그중 일부만을 따로 떼내어 생각하게 되면 그건 망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분의 안위나 흥망성쇠에 국한시키지 않고 세상의 '이치', 삶의 '이치'를 탐구한다. 또 장자의 '호접지몽'(나비꿈) 일화에서도 보듯이, 도교에서도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다시 말해 머릿속 생각과 현실 존재간의 경계를 지을 수 없다고 본다.
하지만 다수의 현대인들에게 더 받아들이기 쉬운 사고방식은 서양식 사고방식이다. 드러나지 않는(무) 이치 같은 것보다는 드러나는(유) 생각이 더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이란 '드러난 느낌' 혹은 '형상화된 느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이 느낌을 드러내고 형상화하는 것이 언어다.) 우리 머릿 속에서 막연한 느낌으로만 존재할 때는 생각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아무 생각도 안 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강한 느낌, 그래서 언어로 형상화될 수 있는 느낌부터 우리는 그것을 생각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맛있는 것을 먹는 모습을 보았다. 마침 배가 고팠던 나는 저절로 입 안에 침이 차오는 것을 느낀다. 그때 누군가가 '너도 먹고 싶니?'라고 물어보면 아마 나는 순식간에 '응, 먹고 싶어'라고 답할 것이다. 아직 말로 형상화되지 않았다뿐이지, 먹고 싶다는 '생각'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유(有)적 존재다. <장자>에 나오는 중앙의 임금인 혼돈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남해 임금이나 북해 임금, 혹은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진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생각이란 이야기다.
그런데 모든 유(有)적 존재는 각자 자기 나름의 흥망성쇠를 거친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들(물체 포함) 중 영구 불변하는 것은 없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유(有)적 존재들(생각 포함)도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자체 메카니즘에 따라 자가 발전을 한다.
예를 들어 머릿속에서 '배고프다'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연이어 '왜 배고프지?'라는 의문이 떠오르고, 먹고 싶은 음식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이 떠오른다. 이 배고프다는 생각은 다른 더 중요한 일에 대한 생각에 제지당하거나 뭔가를 먹어서 실제로 배고픔을 해결할 때까지는 소멸되지 않고 계속해서 자가 발전을 한다. 그래서 심하면 벌칙으로 저녁을 굶게 한 엄마에 대한 원망이 커지고, 배고픔과는 관계 없는 엄마에 대한 분노가 자란다. 이 자가 발전하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제지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이제 이 생각은 안 해야지'라는 생각만으로는 '이 생각'을 제지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결심을 할수록 더 생각이 난다.
혹은 아침부터 계속 머리에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한동안은 이 노래가 머릿속에서 계속 스트레오테잎처럼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도 하지 못한다. 한참 지나서야 머릿속에서 노래가 꽤 긴 시간 동안 반복되어 왔다는 걸 알아차린다. 이렇게 주인이 알아차리고 나서야 노래는 서서히 멈춰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주인 허락 없이 제멋대로 틀어진 이 노래 때문에 내 마음이 그 사이에 받은 '어떤' 영향은 없어지지 않는다. 유쾌한 노래였다면 내 마음은 그 사이 더 유쾌했을 것이고, 슬픈 노래였다면 내 마음은 그 사이 더 슬퍼졌을 것이다. 실제보다 더 유쾌해진 내 마음은 평소 같으면 부담스런 업무도 즐거운 마음으로 잡게 해주지만, 실제보다 더 우울해진 내 마음은 평소에는 잘 하던 일도 갑자기 하기가 싫어지게 만든다.
이처럼 생각은 현실(배고픔이라는 몸의 상태, 아침의 내 기분)에서 태어나지만, 일단 생겨나면 자가 발전을 하려는 메카니즘으로 인해 역으로 우리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마치 상상이 현실의 필요 때문에 시작되지만, 상상을 현실화시키면 현실이 변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 때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생각이 현실을 바꿀 정도로 과도하게 자가 발전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하는 의문 말이다.
생각이 인간만의 전유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많은 생각이 쌓이고 발전하여 생긴 가상세계들은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창작품인 건 확실하다. 과문한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 아닌 다른 어떤 동물이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 상상의 세계에서 놀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 단계 더 이야기를 전진시키면 인류 역사상 현대인들만큼 가상의 세계, 상상의 세계를 발달시킨 적이 없었다. 여기에는 단순히 과학기술의 발명이나 예술품의 창작만이 아니라, 온라인 게임의 세계, 그리고 현실을 왜곡하여 인식하는 여러 정신장애의 세계들도 포함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두 개의 단계가 있다. 첫번째는 분별지심으로 생각이 발생하는 단계다. 동양철학에서는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렇게 되면 '원천'이 죽거나 망각된다고 본 것이다. <장자>의 '혼돈칠규' 부분은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흘,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흘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하였다. 숙과 흘은 은혜를 갚을 방도를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일곱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날마다 구멍 한 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신영복 선생님의 해석대로(<나의 동양고전 독법>)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번째 단계는 무와 유가 구별되지 않던 혼돈의 세계가 아닌 유의 세계에서(말하자면 편향된 상태에서) 생각이 그냥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자가 발전을 하는 단계, 생각이 생각을 낳는 단계다. 최초의 진리로부터 두 번째 굴절이 이루어지는 단계인 것이다. [이건 플라톤이 말한, 평생 일렁이는 불빛에 비친 그림자만을 현실이라 생각하고 사는 동굴의 죄수들 우화와 유사하지만, 그래도 동굴의 죄수들은 보는 방향이 약간씩 달라서 그렇지, 같은 것을 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 단계의 생각은 그래도 현실(실재)에서 발생한 것이니, 현실과의 괴리가 상대적으로 작다. 하지만 생각이 자가 발전하는 두 번째 단계의 생각들은 현실에 부합한다는 보장이 없다.
내가 알기로 현실(혹은 진실)과의 불일치가 심해지면 파멸이 일어난다.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사상이 그렇고, 사이비 예언들(종말론 등)이 그렇고, 정신 장애들이 그렇고, 관계에서 주관적 기대가 클 때도 그렇고, 긍정적 부정적 감정들이 극대화될 때도 그렇고, 욕심이 지나칠 때도 그렇다. 말하자면 과도하게 비대해진 생각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상의 세계가 현실이라는 냉정한 벽에 가로막혀 풍선방울처럼 터지고 마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 현실과 그토록 심하게 어긋나는 줄도 모르고 가상의 세계에 푹 빠진 당사자들의 어리석음을 교훈적인 이야기 등으로 만들어 후손들이 경계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상이라 할 정도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도 불분명해졌다. 예를 들어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복제 동물은 현실인가, 가상인가? 또 사이버 게임에서 아이템을 팔아 실제로 현금을 벌었다면 이건 현실인가, 가상인가? 또 어제까지만 해도 만원짜리 한 장으로 쌀 4kg을 살 수 있었는데, 오늘은 쌀 2kg밖에 못 산다면, 어제 산 쌀 4kg을 팔아 만원짜리 두 장을 다시 쥐었을 때, 어제의 한 장이 오늘의 두 장이 되는 건 지폐가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가상의 세계를 반영하기 때문인가?
이처럼 현대사회는 가상세계의 비중이 전통사회보다 몇 배나 커졌다. 그리고 그만큼 인간의 실제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회가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상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더 많은 에너지와 노동력과 자원을 사용하고 있다. 현대 사회가 '생각'의 과잉 발달을 조장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to be continued)
2013. 6. 11. 금안당
* [대안 시선]에 업로드되는 글은 파주자유학교 전체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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