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 눈감기>라는 책을 읽었다. "비겁한 뇌와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라는 부제 때문에 뇌과학과 관련된 책인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고도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사회에 대한 일종의 강력한 사회문화비평서이다.

 

 단편적으로 소개하면, 우리 뇌는 익숙한 것, 확실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도 자신과 비슷한 사람과 하고, 이웃도 자신을 닮은 사람을 선택한다. 현대사회의 공간적 이동성 증대는 얼핏 보기에는 다양한 만남, 다양한 경험을 증대시킬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의식적으로 '동류', '동질성'을 택할 기회를 더 많이 가져다줄 뿐이어서 다양화가 아닌 획일화를 가져올 위험을 키운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은 더 커지고 더 빨라지지만, 사람들의 선택 취향은 도리어 더 편협해지고, 더 깊게 빠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익숙하지 않은 것, 아웃사이더적인 선택에 대해서는 더욱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소시민들의 이런 의도적 눈감기가 미국사회에서 여러 고질적 문제들을 확대시키거나 지속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고,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2002년의 엔론사태나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같은 경우, 의도적 눈감기를 했던 다수의 내부 동조자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사태가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우리는 흔히 부도덕하고 부정직한 정치 사회 경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가장 앞장 서서 야기한 정치가나 경영자, 사회지도층, 말하자면 주동자 혹은 우두머리를 비난하고 그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히틀러가 아니라 히틀러 추종자를 분석하고, 임산부에게 엑스레이 촬영을 위험하다는 연구결과를 받아들이길 거부한 다수의 의사들과 석면 광산의 유해성을 폭로하고자 했던 피해자를 오히려 탄압하는 지역주민 등등을 분석하면서 직접 가해자가 아닌 이들, 소위 말하는 침묵하는 방관자들은 과연 책임이 없는가를 묻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단순하면서 적나라한 현장은 아마 학교일 것이다. 사실 저자는 방관자 행동이 시작되고 방관자 행동을 배우는 곳이 학교라고 규정하고 있다. 저자는 학교폭력의 대표적 현상 중 하나인 왕따 현상에 대해 "모든 따돌림의 가장 큰 특징은 구경꾼 역할을 해줄 관객들을 강렬하게 요구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피해자들에게 방관자들은 방관자들이 아니라 가해자와의 "공모자들"로 보인다. 또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학생 방관자들은 배우를 부추기는 관객처럼 '응원자'의 역할을 한다. 또는 개입하지 않는 다른 학생들 역시 괴롭히는 가해자에게는 보호막으로 보일 뿐이다. 응원자로든 보호막으로든 모두 그 자리에 있음으로써 괴롭힘을 정당화한다."

 

이처럼 피해자에게는 공모자, 가해자에게는 응원자 혹은 보호막이라면, 사실 방관자란 말은 방관자의 자기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즉 방관자가 도모하고자 했던 '중립'의 이미지는 실제로는 전혀 구현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논리적으로도 정당한 두 개의 입장 사이에서 중립이라면 모를까, 부당함 앞에서 중립이라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이 궤변과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제를 느끼는 순간, 행동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저자는 스토브라는 활동가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제가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 중 하나는 집단 폭력의 경우 처음부터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초기에 행동하기는 쉽습니다. 아직 사상이나 입장이 더 발전하고 강화되기 전이니까요..... 우리는 흔히 별일 아니다, 걱정할 정도로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걱정할 정도로 큰일이 되고 나면 때는 늦습니다. 집단 폭력은 서서히 발전하지요. 누군가를 따돌리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서 사무실 전체가 차별의 장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아무도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상황을 악화시키겠다는 의사표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괴벨스의 이야기인데요, 1938년 독일에서 추방된 유대인 망명자들에 관해 의논하기 위해 각국 관계자들이 스위스에 모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비앙 회담이죠.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망명자들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회담이 끝난 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막고자 했지만 그들에게는 용기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괴벨스는 그 회담의 메시지를 정확히 꿰뚫었지요. 아무도 자신의 첫걸음을 멈추게 하지 않는 한 나치스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한 겁니다."

 

나아가 스토브라는 이 사람은 현대인들에게 "도덕적 사고방식은 이미 세팅된 기본값이 아닙니다. 경쟁이 극도로 치열한 환경에서 우리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인지 과부하 상태에 처해 있지요. 따라서 반드시 모든 사람이 도덕적으로 사고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라는 중요한 지적을 한다.

 

미국사회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구성원들에게도 도덕성은 이제 세팅된 기본값이 아니다.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학교 폭력은 놔두고라도, 일베회원들로 대표되는 극우적인 폭력적 언어들과 행위들, 예전에는 어쩌다 한두번 일어났지만 지금은 만성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존속살인과 존속학대 등의 패륜범죄들, 이제는 학교만이 아니라 버젓한 직장에서까지 벌어지는 왕따현상들, 전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있는 속임수와 사기 행위들, 일상화된 욕설과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악순환과 다수의 방관자들, 이 모두가 우리 국민 대다수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부자' 되기를 추구하면서 달려온 지난 몇 십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뿐만 아니라 더 문제는 끼리끼리 모여서 세를 확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처럼 우리도 이제 부자동네와 가난한동네가 확연히 구분된다. 이처럼 경제적 수준따라, 혹은 정치적 입장따라, 취향따라, 심리적 상황에따라 서로 뭉치고, 자신과 다른 쪽에 대해서는 쉽사리 적대적 입장을 취한다. 또 종교적 내용이 아닌데도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 같아 보이는 온갖 그룹들이 생겨나고 맹신과 추종과 부패와 전횡, 속임수들이 판을 친다. 함께 모이니 힘은 열배, 백배로 커지고, 그만큼 각 집단이 일으키는 파장력도 강해진다. 사회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이제 사회와 삶은 서서히 전쟁터와 닮은 모습으로 변해간다.

 

전쟁 상황에서는 도덕적 기준이란 게 쓸모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다른 모든 생물종들처럼 우리 인간종도 자식들만은 이 전쟁 상황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하려고 애쓰지만, 현대 사회의 엄청난 유동성과 개방성 앞에서 핵가족이 보호막의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많다. 오히려 왜곡된 가치관과 문화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미성숙한 아이들을 좋은 먹잇감으로 삼곤 한다. 이렇게 해서 왜곡되고 부도덕한 문화는 확대 재생산된다. 우리의 미래가 암울해지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비록 또래 집단 범위내에서라고 해도 아이들만의 독자적인 힘으로 도덕적 수준을 회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2006년 영국 학교에 대한 조사에서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는 학생은 목격자들 중 10~20%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는데, 학교 폭력과 따돌림 문화가 더 광범위하고 조직화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이 수치가 더 낮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반면에 '공모자' 역할을 하게 되는 방관자의 비율은 더 높을 것이다.

 

교사나 어른들이 나서서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혹은 법적 행정적으로 책임을 지게 한다고 해서 학교 폭력이나 왕따 행위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학교 폭력이나 왕따 문화를 감소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는 동료 집단이 그런 잘못된 행위들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가해자는 그런 가해 행위로 얻게 될 이득이 크지 않을 것이기에, 그런 가해 행위를 반복하거나 확대 재생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아이들 중에 어느 정도 도덕적이고 의식 있는 학생들이 있다 해도 이렇게 10명 중 1명 꼴의 비율 정도로는 가해학생들의 왜곡된 문화를 제지하거나 압박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힘들다.

 

이 점에서 부모와 교사들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우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적극적 가해자만이 아니라, 방관자의 태도 또한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만약 방관자의 태도에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앞으로 세상을 살면서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외면하거나 그 불의에 암묵적으로 동의해도 괜찮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아이들 스스로 그 왜곡된 또래문화를 극복할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어른들이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야 한다.

 

학교만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분야들이 건강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의도적 눈감기를 하는 방관자들의 수가 줄고, 반면에 내부고발자가 되기를 권하고 내부고발자들을 보호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위 책의 저자는 주장한다. 필자는 의도적 눈감기를 극복한 사람들을 내부 고발자, 혹은 카산드라라고 명명하는데, 카산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왕녀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서 이 왕녀의 역할은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카산드라의 아름다움에 반한 아폴로신이 그녀에게 예언의 능력을 선물했는데, 그후 카산드라의 냉담함에 화가 난 아폴로신은 복수의 선물로 '아무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는' 운명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실을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진실을 받아들이게는 못하는 모순에 빠진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이 카산드라의 말이 진실임을 알면서도 그 진실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 뇌가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낯선 것이나 변화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의도적 눈감기' 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산드라는 우리 뇌의 이런 타성과 관성을 극복한 사람들이다. 저자는 어떻게 해야 의도적 눈감기의 타성을 극복할 수 있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마 이 점에 대해서는 따로 연구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도 수많은 카산드라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트로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트로이인들에게 경고했던 카산드라처럼, 현대의 카산드라들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줄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박해받을 각오를 하고서도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운명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런 카산드라들과 이념적 반대파들의 차이는 카산드라들은 디테일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반대를 위한 반대나 이념적 반대가 아니라, 구체적 사실에 근거해서 기성의 관념들에 이의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복잡해지면서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정치세력들은 진보냐 보수냐로 자신의 색채를 규정하려고 애쓰지만, 내 보기에 세력간의 전선은 다론 곳에서 형성되고 있는 듯하다. 즉 정의와 불의, 합리와 불합리,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 식으로 말이다. ]

 

지금 우리 사회는 다수 대중의 의도적 눈감기로 인해 그간 곪을대로 곪아왔던 수많은 문제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라면상무, 빵회장, 성희롱 대변인, 살인청부 사모님, 만연해 있는 갑의 횡포, 대기업의 독과점과 문어발 확장, .... 아마도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터진 것이니, 어쨌든 이런 상처들은 치료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곪아터진 상처를 치료하는 것만으로는 다시 상처가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예를 들어 학교 폭력을 일으킨 가해자 학생들을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학교 폭력이 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어떤 보장도 되지 않는다. 이럴 때 나오는 것이 제도적 규제이지만, 나는 제도적 규제도 그닥 믿지는 않는 편이다. (사실 제도적 규제는 언제나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편이다.)

 

솔직히 그보다는 오히려 근본적인 해결책, 내부 고발자가 더 마음에 든다. 부당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언제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카산드라들이 사회 곳곳에 버티고 있다면, 그리고 이들의 의견이 존중받고 보호받는다면, 왠만한 부정과 비리는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은 물론이고, 아마도 구조의 문제까지도 의식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

 

p.s. 예전에 미드 스타트랙 시즌 1에서 지구인들이 이성적인 벌칸인들의 도움을 받아 지구의 자멸을 막고 우주시대를 개척했다는 스토리를 본 적이 있는데, 지금도 이따금 생각날 때가 있다. 어쩜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과 정말 그 길밖에 없었을까라는 의문이 동시에 들면서...



2013. 5. 30. 금안당


* [대안 시선]에 업로드되는 글은 파주자유학교 전체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날짜

2013. 5. 30. 01:56

최근 게시글

최근 댓글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