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자 1기 졸업생인 우리 아들과 영준이가 그제와 어제 날자로 군에 갔다. 요즘의 다른 청년들에 비해서는 입대가 약간 늦은 편이지만, 군대까지 보내고 나니 아이를 길러온 기나긴 과정을 이제 정말 마무리를 하는구나 싶다. 뭔가 일 끝내고 가뿐한 느낌으로 손을 터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우리 아들은 여친까지 생겨서 훈련소에서 필요하다는 물품들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챙겨간다. 안 그래도 내가 이런 '챙겨주기' 같은 건 잘 못하는 성격인데, 이 모습을 보니, 평소 챙겨주지는 못하면서 그래도 갖고 있던 아들에 대한 엄마로서 일말의 부담감 내지는 미안함까지도 훌훌 털어지는 것 같달까? ㅎㅎㅎ

 

이렇게 젊었던 시절을 한 가지 한 가지씩 마무리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살짝살짝이나마 살아온 과정을 되돌아보게 되는 건 지금 내 나이가 50대 중반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갈 날보다는 살아온 날들이 확실히 많은 50 중반. 아마도 내 나이의 많은 사람들이 '인생 참 금방이구나'라는 생각을 한 두번은 해보지 않을까 싶다.

 

하긴 돌아보면, 내가 나이를 계산하던 방법이 좀 독특했던 적이 있다. 실제 나이에서 20년을 빼고 산 햇수를 헤아려보곤 했던 것이다. 왜 20년을 뺐냐면, 태어나서부터 청년이 된 20살까지는 주어진 대로 살았지, 내 의지대로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 설흔이 되었을 때도 '아직 10년밖에 안 살았네, 근데 실제 나이는 벌써 설흔이니 뭔가 억울한 듯...'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런 식의 나이 계산법은 40대 후반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아마도 그런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은 자기 삶에 대한 나름의 자기 위로였을 것이다. 아직은 여유 있다는, 그러니 불안해할 것 없다는 자기 위안...

 

그런데 40대 들어 이런 식으로 나이 계산을 할 때면 연이어 떠올리는 기억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10대의 사춘기일 때, 나이든 사람들이 꿈도 희망도 없이 생활에 허덕이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싫어서 나는 반드시 나이 30이 되기 전에 죽겠다고 친구들에게 떠들던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실제로 나이 30이 되었을 때는 이 기억을 한 번도 떠올리지 않고 지나갔다.)  그러니 삶의 여정을 어떤 식으로 설정하느냐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어쨌든 마이너스 20년의 계산법은 50대에 들어서면서 슬그머니 내 머리에서 지워졌다. 대신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나이 드는 것을 준비하고 즐기는 것이 현명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우리 부모 세대들 중 일부 어른들이 당신들이 나이 드신 것을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계속 살기라도 할 것처럼 고집을 부리면서도 시대 변화는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이 보기에 안 좋아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생각도 요 2, 3년 사이에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처음 노년을 준비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만 해도 내 예상 수명이 많아봤자 한 70 정도 되리라고 판단했는데, 지금 판단으로는 80 이상까지는 살 것 같다고 예상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의 수명이 자기 마음 먹은 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특별한 질병에 걸리지 않는 이상, 지금 추세의 의료기술에서 보아, 왠만한 사람은 80 정도까지는 활동 가능한 상태로 유지시켜주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80까지 산다고 치면, 앞으로 20년 이상을 노후로 설정하며 사는 건 섣부르게 삶을 낭비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보다 젊은 교사들에게도 이야기한다. 90살 정도까지는 산다고 치고, 너무 일찍 은퇴하지 말라고, 60이 넘어서 은퇴해도 노후를 즐길 시간은 충분하니, 삶의 현장에서 너무 일찍 물러서지 말고 적극적으로 열심히 살라고 말이다.

 

삶의 수렁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는 이 힘든 게 언제 끝나나 싶고 시간이 참 안 간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지만, 한 번의 인생이 참으로 짧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 얼마 안 되는 시간 중에서 우리가 삶에서 만족감이나 충족감, 행복감, 즐거움, 기쁨, 깨달음, 성취감 등의 감정을 느끼는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더 짧다. 삶의 나머지 시간들은 이런 클라이막스에는 미치지 못하는 순간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절정의 감정을 가장 많이 느낄 때가 어느 시기일까? 아마도 어릴 때가 아닐까? 자아의식이 싹트기 전인 영유아에서 아동기까지의 시기. 이 시기에 느끼는 감정이 순수하고 온전한 것은 선입견이 없기 때문이다. 아기가 혼자 힘으로 걷게 된 처음 순간, 아기는 '해냈다!'는 순수한 성취감에 기뻐하지, 내가 누구보다 '먼저 걸었다'고 해서 기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아이가 느껴야 할 삶의 순수한 기쁨들을 손상시키는 것은 우리 어른들이다. 자꾸 비교하고 불안해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영유아기와 아동기에조차도 순수한 만족감과 즐거움 등을 충분히 느끼지 못하면, 삶에서 행복한 순간은 훨씬 더 줄어들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안 그래도 짧은 인생에 행복한 시간마저 더 줄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을 행복하지 못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 중 하나가 욕심이란 걸 아는지? 욕심은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하고, 자식을 포함한 남의 인생도 불행하게 만든다. 국어사전에서 '욕심'이란 "어떠한 것을 정도에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니까 욕심이란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보다 더 많이 이루거나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인 것은 쉽게 알아차려도 더 많이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욕심인 것은 잘 모르는 듯하다. 이 때문에 물욕의 경우에는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자제하거나 경계하는 마음이 생기지만, 성취욕의 경우는 그것이 욕심인 줄을 잘 모르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는 자신이 뭘 잘못 하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렇다면 성취욕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모든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다. 그 문제에 대해 나의 의견을 관철시키겠다는 목표, 오늘 안에 어떤 일을 반드시 해내겠다는 목표, 금연을 하고 금주를 하고 체중을 몇 kg 감량하겠다는 목표, 하루에 영어 공부를 1시간 이상씩 하겠다는 목표, 내 아이를 00으로 키우겠다는 목표, 아이의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꼭 고치고 말겠다는 목표, 학교 폭력을 근절하겠다는 목표, 반드시 특정 대기업 정규직에 취업하겠다는 목표, 열심히 수련하여 이번 생에서 득도하겠다는 목표...

 

목표하는 것과 계획하는 것은 다르다. 목표는 현실의 여타 요소들과 시간 경과상에서 나타날 수 있는 변수들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더 실현가능성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지금 현재 의사들이 고소득자라는 이유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자기 자식이 공부를 잘하는 이과생이면, 상당수의 부모들이 아이가 의대에 진학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혹은 아이가 어릴 때부터 나중에 커서 어떤 분야를 전공할지, 어느 대학에 진학시킬지를 일찌감치부터 정해놓고 그에 맞게 아이를 교육시킨다는 부모들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하지만 10년 후, 20년 후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지극히 어리석은 목표에 불과하다. 현재 잘 나가는 분야는 안 그래도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분야일 터인데, 아이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나중에 그 고생의 대가조차 받지 못할 수도 있는 이중의 위험부담을 떠안고 있는 목표인 것이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목표는 단시야적이고 어리석다. 얼핏 보기에는 주체와 목표만이 있어서 가장 지름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실 조건이 전혀 반영 되지 않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전두환정권 시절에 민주화운동으로 수배되어 있던 한 후배를 '도바리' 중에 만난 적이 있다. 그 후배왈, 생길 수 있는 모든 변수를 고려할 수 있다면 체포를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잡히는 건 우리가 모든 변수를 고려할 만큼 정교하고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후배는 우리가 좀만 더 치밀해지면, 체포당하는 상황을 완벽하게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그 후배의 전공은 수학과였지만, 그는 그 모든 변수를 고려하지 못해서 체포되고 말았다.

 

그 후배가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앎의 거의 전부라고 여기던 치기 어린 젊은이여서 이런 호언장담을 했던 건 아니다. 어리든 나이 들었든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내가 더 잘 알아' 혹은 '다 안다'라는 오만방자한 생각을 하며 산다. 어린아이들이 미운 세살, 미운 일곱살이 되는 이유도 자기가 아는 좁은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이 드신 분들이 '늙은이 고집'을 피우는 것 또한 자신이 더 오래 살았고, 더 많이 경험했으니, 더 잘 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는 인간 인식의 한계 때문이다. 수천조, 수경의 별이 있고, 거의 무한대라고 할 수 있는 행성들이 있고, 수억개의 은하들이 있으며, 블랙홀과 암흑물질, 혜성과 운석들로 가득 차 있는 이 우주와 인간 존재를 비교해보라. 게다가 이 어마어마한 우주는 3차원적 존재인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세상이 11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추론한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무수한 생명체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다. 종으로는 인간종이 그나마 눈에 띄는 존재일지 몰라도, 한 개인개인은 그야말로 먼지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다. 이 우주에서 이토록 보잘것없는 인간은 어떻게 해도 자연의 섭리, 우주의 이치, 창조주의 의지 전체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칸트의 불가지론은 지극히 논리적인 결론이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기 주위의 좁디좁은 세계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자기가 그 세계의 주인이기라도 한듯이 오만을 떨곤 한다. 사실 인간이 구체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것은 스스로를 실험실의 쥐로 만드는 실험을 하는 것과 같다. 실험실의 쥐는 쥐로서의 삶을 잘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자연이 준 그 무한한 가능성을 뒤로 하고 자신이 가진 능력 중 아주 작은 일부만을 개발하거나, 보여주는 것이 목표이다. 실험실에서 길러진 쥐는 절대 야생의 세상에서 살아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온갖 잡다한 목표들로 자신의 삶을 채우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 제대로 사는 게 아니다.

 

불가지론은 자연이나 우주와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의한 금융위기 직전 24시간 동안 일어난 한 금융회사의 모습을 다룬 영화 '마진콜'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이 회사의 회장은 자신의 연봉이 높은 이유가 하루 후, 한 주 후, 한 달 후를 예측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 덕분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금융 위기 만 하루 전이던 그 시점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실토한다. 그런 후 회사가 가진 모든 금융자산을 단 몇 시간만에 다 팔아치워 업계에서 일종의 선수를 친 그는 그런 행위가 일종의 '사기'라고 반발하는 부하직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돈은 그냥 돈이야, 인간이 만든 거라고. 그 그림종이가 있어야 서로 죽이지 않고도 밥 먹고 살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지...계속 반복되는 거야. 우리도 어쩔 수 없지. 자네나 내가 통제하거나 바꿀 수 없지, 아주 조금도 바꿀 수 없지.그냥 대응할 뿐이야. 제대로 하면 대박나는 거고, 제대로 못하면 쪽박차는 거지." 현대사회의 최고 핵심분야를 쥐락펴락하는 거대 금융자본가조차 인간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창조해가는(이루어가는) 게 아니라고, 통제하거나 바꿀 수 없다고, 세상의 흐름에 그냥 대응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내가 이 영화에서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위기 관리부의 한 해고자가 추산한 예측 지수(파멸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에 최하위 직원부터 그 회사의 회장까지 어떤 선입견도 없이 신뢰를 보내는 그 조직 문화였다. 그래서 해고자가 남긴 통계를 최종적으로 정리한 말단 직원이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상사를 호출하면, 그들은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 부하직원이 감히 자신을 호출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기고 지체없이 달려온다. 이 과정은 최고위층인 회장을 호출할 때까지 순식간에 이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눈 앞에서 펼쳐지는 통계자료, 객관 자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너무 끔찍한 결론이라서 어떻게든 그 통계를 부정해보겠다는 심리 같은 건 없다. 말하자면 회사의 전직원이 일이 진행되고 있는 객관현실을 어떤 색안경도 끼지 않고 최대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오픈 마인드'이다.

 

이 오픈 마인드의 최고 정점을 보여주는 이는 이 회사의 회장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는 건 앞에서 말했듯이 대형금융자본으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객관 현실에 최대한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이고...

 

[갈등이 벌어지는 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방법론을 둘러싸고서이다. 좀은 도덕적인 쪽은 아무리 벌어질 위기라도 자신들이 먼저 폭탄을 터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좀더 현실적인 쪽은 어차피 터질 위기라면, 우리가 먼저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좀더 도덕적인 쪽도 돈의 힘 앞에서는 결국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을 수 없다. 예측결과를 발견한 그 해고자도 자신의 퇴직금까지 묶어놓겠다는 회사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회사의 요구대로 그 최후의 하루 동안 자신의 입을 봉쇄하는 것에 동의하고, 회사의 '사기행위'가 자신의 이력에 큰 오점을 남겼다고 분노하던 그 임원도 결국 돈이 필요해서 회사에 남기로 결정한다.]

 

이런 이야기는 위의 금융자본가가 잘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연계이든 인간계이든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객관 현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충분히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구체적인 목표를 이루려고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오늘의 복이 내일의 화가 되는 메카니즘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예측할 능력도 없다. 그러니 그토록 애써서 이루어놓은 목표, 오늘의 복 때문에 내일 화를 입는다면 그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to be continued)

 


2013. 5. 11. 금안당 


* [대안 시선]에 업로드되는 글은 파주자유학교 전체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날짜

2013. 5. 1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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