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하지 말고 이해하자(2013. 4. 21.)
- 금안당
공감이란 말을 많이들 쓴다. 공감이란 용어는 '스페이스 공감', '공감 코리아' 등 텔레비젼 프로그램 제목으로도 자주 쓰이는 것 같고, 일상 대화나 글 등에서도 예전보다 훨씬 많은 빈도로 사용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왜 '공감'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뭔가 부담스럽고 강요받는 느낌이 드는 걸까? 그래서 공감하기를 바라며 공감이란 용어를 들이대는 그 상황에 대해 오히려 엉거주춤 뒷걸음질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까? 어쩌면 내가 감정이란 것에 그렇게 익숙한 인간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을 거라며 뒤로 물러서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나마 추스려 눈 앞의 그 상황을 '공감'해보려 애쓰기도 몇 번 해보았지만, 여전히 '이건 뭔가 아니야'라는 느낌이 드는 건 왜 또 그럴까?
그래서 국어사전에서 '공감'이란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공감이란 "남의 주장이나 감정, 생각 따위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러한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슷한 말로는 '동감'이라는 용어가 있다고 한다.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우리가 동감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훨씬 더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우리가 '응, 나도 동감이야'라고 말할 때는 편 들어주거나 함께 할 한쪽을 확실하게 결정하고 난 이후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한쪽의 의견이나 감정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할 때는 '동감'이란 말을 섣불리 쓰기보다는 '그래, 그것도 일리가 있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공감이란 용어가 유행어처럼 사용되기 시작하고부터는 이런 경계선이 없어진 것 같다. 예를 들어 친구 부부가 어떤 이유로 부부싸움을 했을 때, 남편과 아내 둘 다를 알고 있는 친구가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응, 네 이야기에 공감해"라고 하고, 또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공감'한다고 말한다면, 이 친구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어휘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어느 한쪽의 감정에 찬성하기 전에 상대방의 감정이 이해가 된다고 이야기해야 되는 건데 말이다. 양쪽의 감정과 주장이 이해가 된다고 해야 하는데, 섣불리 '공감'한다는 비약적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
타인의 감정과 심정이 이해가 되는 상황과 공감하는 상황은 전혀 다르다. 겉보기에 아무리 못된 짓을 한 범죄자라도 그 사람이 그런 짓을 하게 되기까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말하자면 그 사람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그런 상황과 심정이 그런 잘못된 행위를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으므로, 따라서 그의 주장이나 행위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해와 공감은 다르다.
그런데 공감이란 표현이 대중화되기 전에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감정이나 주장을 이해하는 것과 그 감정에 동감하거나 주장에 찬성하는 것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곤 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아내는 오랜 세월 그 점에 대해 원망하고 분노하면서, 남편을 미워한다. 그것을 지켜보던 여자의 친구가 아내에게 "어차피 이혼하지 않고 같이 살거면 이제 너네 남편을 좀 이해해주고 화를 풀어라"고 조언을 하면 아내는 펄쩍 뛰며 자신의 친구에게 화를 낸다. 자기 친구가 남편 편을 들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이들끼리 다툴 때도 교사가 한쪽 아이에게 "그렇게 네 주장만 하지 말고 상대방 상황도 이해를 좀 해주라"고 중재를 하면, 그 말을 들은 아이는 교사에게 섭섭해한다. 선생님이 그 아이 편을 들고 자기 심정은 몰라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해와 공감을 구별하지 않으면, 갈등이 해결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갈등의 두 당사자는 서로에게 결코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감할 수 있었다면 갈등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해를 하려면 감정이 가라앉아야 한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서 작은나무는 사거리 가게에서 만난 작은 백인소녀에게 모카신 한켤레를 선물하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오히려 보란 듯이 소녀를 매질하고, "우리는 동정 따위는 받지 않아... 특히나 이교도 야만인들한테는!"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작은나무에게 모카신을 되돌려준다. 할아버지는 작은나무가 행여 안좋은 경험과 감정을 가져갈까봐, 자부심밖에 남아 있지 않은 소녀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고 설명을 해준다. 하지만 자신의 선의가 짓밟힌 이 상황이 어린 작은나무에게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걸 확인한 할아버지는 작은나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까지 덧붙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준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어린 작은나무도 그 상황과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려고 하지 않아. 그렇게 하려면 힘이 들거든."이라고 덧붙이면서.
사실 공감이란 건 단어의 뜻에서도 드러나듯이 감정에 휩싸인 상태와 그리 다르지 않다. 공감해달라는 건 상대방더러 내가 느끼는 감정대로 느껴달라는 것이다. 물론 분노나 질투 같은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기쁨이나 행복함 같은 긍정적 감정이면 문제될 게 뭐가 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감정이란 건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남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게다가 감정이란 건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이해를 가로막는다. 예를 들어 모든 엄마들이 모성애에 근거해서 자기 아이를 과잉보호하고, 자기 아이에게 해를 입힌 모든 상황에 분노하고 그것에 공감해달라고 요구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혹은 종교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충만감을 느껴보라고 요구한다면? 아마 세상은 편싸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나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과 상황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집단 차원에서도 개인 차원에서도 끊임없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은 별 대수롭지 않은 실수와 무지와 심리적 해이에 대해서도 자주 책임을 물을 만큼 참으로 각박하고 엄격한 사회다. 예를 들어 남의 감언이설에 속아 한 번 사기를 당했다고 해보자. 그 대가와 파급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자신의 감정을 존중받고 싶고, 자신의 감정을 우선순위에 놓으면서 살고 싶다고?
내 보기에 이런 태도는 작은나무 할아버지의 말처럼 "게으른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해'란 걸 하려면 힘이 드니까 그냥 되는 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 그런데 이런 사람들, 즉 공감의 환상에 빠져서 자기 감정이 시작이자 끝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세를 불리고 자신의 사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공감 능력을 키워주는 정도의 대가만 지불하면 되는 이런 사람들을 좋은 먹잇감으로 노리고 있는 게 요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감이 아닌 이해를 해야 한다. 이해를 하려면 감정은 잠시 한켠에 밀어놓고 상대방이나 양쪽의 입장과 주장을 차분하고 공정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아마 이렇게만 해도 세상의 문제 중 90%가 해결책을 만날 수 있올 것이다.
그리고 이해를 하려면 내가 내가 아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내가 이해당사자가 아닌 양쪽 이해당사자를 포괄하는 더 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위 이야기에서 이해를 하는 할아버지는 더 이상 백인 소작인에게 모욕받은 인디언이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인디언이 아니라, 소녀의 아버지와 같은 인간 동료로서, 동일한 인간 조건에 규정받는 같은 인간 동료로서 그 상황을 이해했고, 그 백인 소작인을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이해는 누군가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소녀의 아버지를 이해했다고 해서 소녀의 아버지가 소녀에게나 작은나무에게 취한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소녀에게 모카신을 선물한 작은나무가 옳았다고 생각했을까? 아마 위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의 아버지가 모카신을 작은나무에게 되돌려준 사건이 일어난 다음이라면 할아버지는 작은나무의 행동을 탓하지도 않았겠지만, 다음번에도 똑같이 하라고 권하지도 않았을 것 또한 분명하다.
따라서 이해의 관점에서 보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는, 말하자면 결론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해는 끊임없는 과정이고 배움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작은나무에게 바랐던 것, 즉 작은나무도 이해를 해야 한다고 했던 것은 작은나무가 이 일에서 배움을 가져가는 것이었을 테고, 그 배움의 내용은 작은나무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보았기에, 할아버지는 이 일에서 얻어야 할 교훈을 작은나무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작은나무도 이해를 해야 한다는 데서 한 발도 더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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