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sbs 스페셜에서 '저장강박증'(영어로는 Compulsive hoarding syndrome)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저장강박증은 사용 여부에 관계없이 어떤 물건이든지 버리지 못하고 저장해 두는 강박장애의 한 가지라고 하며, 우리보다 더 물질적 성향이 강한 미국의 경우에는 이런 장애를 가진 사람이 2~5%에 달한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아직은 주변에서 드물게만 보는 현상의 하나이지만, 짐작컨대 우리나라도 경제가 발달하여 물질적 풍요가 커질수록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프로그램에서 저장강박증의 사례로 나온 한 경우가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 버려진 개들과 고양이들을 집에 데려와 이들을 돌보느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어느 부부의 사례였다. 이 프로에 나온 다른 사람들 얼굴은 모두 뿌옇게 처리하여 시청자들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는데, 이 분들만 그냥 안개 처리 없이 본인들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셨다.

 

아마도 이들이 기억에 남은 건 왜 자신들의 건강과 일상생활까지 희생해가면서 개와 고양이들을 돌보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배신을 하는데, 짐승들은 사랑을 주면 그만큼 돌려주기 때문'이라는 취지의 대답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은 세 번이나 남에게 보증을 서주었다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참으로 여리고 착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아팠다. 또 다른 호더들과 달리 더 이상 개와 고양이 수를 늘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도, 이웃이나 주변에서 버려진 개와 고양이를 줏어와서 맡아줄 것을 부탁하면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맡게 되는 모습도 안타깝께 느껴졌다.

 

지난번에 내가 '공감'에 관한 글을 썼지만, 이 부부야말로 '공감력'이 굉장히 강한 사람들일 것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상대가 힘들어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려고 애쓰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는 피해자, 희생자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착한 사람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남에게 선의나 호의를 베풀다가 오히려 뒷통수를 맞고 배신감을 느낀 경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두 번 이상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속담처럼 이 놈의 인간사회가 어떻게 된 판인지, 호의와 선의를 베풀수록 그 호의와 선의에 감사하는 사람보다는 그것을 이용해먹으려는 사람을 더 많이 끌어당기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책('당신이 은인입니다.')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례도 읽은 적이 있다. 책의 저자는 노점상을 하던 영세상인이었다가 어쩌다 돈이 되는 일에 뛰어들어 그야말로 돈벼락을 맞았다가 다시 하루 아침에 추락, 9개월을 노숙자 생활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돈 맛을 알게 된 초창기의 일이었다고 한다. 경매로 나온 작은 아파트나 연립 등을 사서 집을 다시 수리하고 단장하여 제 값에 그것을 되팔아 돈을 모아가던 중이었는데, 경매로 낙찰을 받으면, 그 집에 세 들어 살던 세입자가 가장 문제였다고 한다. 세입자가 나가야 집을 수리해서 팔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온갖 억지와 공갈, 협박으로 세입자가 한시 바삐 집을 비우도록 했는데, 한 번은 낙찰받은 집에 갔더니 여든도 더 넘은 할아버지가 혼자 살고 계셨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사정에 마음이 약해진 저자는 지금까지의 원칙에 예외를 두어 3개월의 시간 여유를 줄 테니 그때까지는 꼭 짐을 빼라고 했단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할아버지의 아들이 '조폭'이었다는 것이다. 3개월이 아니라 아예 그 집에 계속 눌러살기로 작정한 조폭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만 얻어터진 저자는 '착한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교훈을 다시 한번 얻고, 그 집을 장애인단체에 세를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장애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그 조폭을 감옥에 보내버린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가볍게 생각하면 우스운 일화처럼도 보이지만, 무겁게 생각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마치 한 편의 지옥도처럼 보이게 하지 않는가? 게다가 이 어두운 현실을 더 어둡게 만드는 것은 위의 부부나 위 책의 저자처럼(잠깐이었지만) 세상이 밝아지는 데 좀이라도 보탬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런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위의 부부처럼 사람들에게서 도망을 가거나, 위 책의 저자처럼 이제 측은지심 따위는 다 팽개치고 더 악착같아지는 경우가 다수이다. 어느 경우나 보고 있자면 참으로 애닯고 처연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나는 위 부부의 경우처럼 사람 사는 세상에서 도망갈 정도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입고 마음을 다친 사람들이 애잔하다. 하지만 내 경험상 도망가는 건 방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직장의 신에 나오는 대사처럼 "한번 도망치면 영원히 도망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강해지는 것말고는 자신이 입은 상처를 치유할 방법이 없다. 여기서 강해진다는 건 더 악착같아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강해진다는 것은 현명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맘처럼 쉽지 않은 게 강해지고 현명해지는 것일 게다. 요즘 들어 예전보다 더 자주 인터넷에 올라오는 온갖 글들과 뉴스들을 읽곤 한다. 그런데 이중 상당한 장면들이 지옥도와 닮아 있다. 자살하는 학생들, 학교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들과 넘쳐 나는 방관자들, 심할 때는 동반자살로까지 귀결되는 우울증 관련 온갖 사건들, 정신병원에서 뛰쳐나온 정신병자들의 입에서나 나올 것 같은 온갖 악성댓글들, 아동성폭행 사건들, 연일 계속되는 북한정권의 공갈 협박, 보스턴 테러와 스촨성 대지진, 사욕을 챙기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치가들과 권력자들의 온갖 억지와 궤변, ... 그리고 너 죽고 나 살자고 덤벼드는 동물의 왕국보다 못한 생존투쟁...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러니 이 아비규환의 지옥에서는 단순히 선한 것, 착한 것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블랙홀에서 버텨낼 수 있는 기운이 없으면, 이 아비규환의 블랙홀에 금방 잡아먹히고 말기 때문이다.

 

이 아비규환의 지옥을 버텨내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줄 다른 사람을 찾는다. 다른 사람이 치유해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남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근거 없는 기대를 건다. 모든 문제가 꼬이기 시작하는 건 여기서부터다.  왜냐하면 남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근거 없는 기대를 거는 건 서로 상처 주고 상처 받는 과정 자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대조차도 포기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서 도망가게 되고...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다. 왜냐하면 상처를 만든 게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가 B와 C에게 똑같이 못된 짓을 했다. 그런데 B는 A에게 상처받아 힘들어하지만, C는 A와 대판 싸우거나 '그런 인간 같지 않은 인간, 내가 상대 안하고 만다'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C은 B만큼 A에게 상처받지 않는다. 보다시피 상처를 주는 건 A가 아니다. B와 C 각각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주지 않거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처를 준 것이 자기 자신이듯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이도 자신뿐이다. (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

 

어떻게 치유하냐고? 그냥 더 이상 상처를 부여잡고 살아가지 않기로 결정하면 된다. 어차피 그 상처를 남이 주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그 상처를 가지고 남을 원망할 건덕지로 삼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물론 아직도 그 상처를 자신에게 상처 입힌 어리석은 자신을 원망할 건덕지로 삼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자신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니 쓸모 없어진 그 상처를 그냥 치유하기로 마음먹어라. 

 

그런데 이렇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로 마음먹으면, 그리고 더 이상 새로운 상처를 만들지 않기로 마음 먹으면 서서히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우선 다른 사람에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게 되기에 남에게 휘둘리거나 화내거나 하는 감정적인 반응들이 훨씬 줄어든다. 이제 다른 사람은 내게 적이나 아군이 아니라 독자성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 동료로 보여진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게 친절하든 아니면 적대감을 보이든 크게 개의치 않게 된다. 말하자면 cool 해지는 것이다. 이로 인해 내 행동이나 감정도 훨씬 단순하고 솔직해진다. 내 마음 속에 복잡하게 엉켜 있던 실타래가 마침내 조금씩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거나 애정을 갈구하지 않으니 이제 나는 점점 더 강해진다. 이제 아비규환의 소용돌이에 잡아먹히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버티고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소용돌이, 그 어둠을 바꾸고 싶다는 바람과 의지가 생기게 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희생자라는 피해의식 없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소금이자 빛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는 "my help"가 아니라 진정한 "my pleasure"임을 알게 된다.

 

위 책의 저자인 홍순재씨는 노숙자라는 절망의 밑바닥에서 몇몇 사람들이 보내준 소박하기 그지없는 몇 가지 호의(은혜)에서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얻어 재기에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성공한 지금도 자신을 다시 일으켜세워준 힘이 무엇이었는지 잊지 않고 항상 감사하면서 살고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그의 이야기를 위 부부처럼 착한 사람들, 착해서 항상 피해를 입고 그래서 세상과 사람이 두려워 달아나려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왜냐하면 세상이 이대로 자멸하지 않고, 우리 아이들이 자랄 미래의 세상이 좀이라도 건강해지려면 이런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진정한 힐링과 치유는, 모두가 자기 자신 혹은 남을 위해 먼저 움직이는 것에 있다고 본다. 즉행즉답, 즉시 실행하면 즉시 답이 나온다는 말이다.

 

버스를 타고 분당에서 광화문으로 이동하던 날의 일이다. 버스 문쪽에서 계속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소리가 버스 한가득 울렸지만 아무도 인상 쓰는 것 외에 행동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 소음이 나는 곳으로 가보았다. 조그만 나사가 풀려 있었고, 그로 인한 유격이 버스의 진동에 의해 철판과 부딪히는 소리였다. 나는 즉시 나사를 조였다. 그랬더니 조용한 세상이 되었다. 버스는 평화를 찾았다.

 

진정한 힐링은 산속이나 바다나 올레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을 괴롭히는 근원에 가서 손으로 그것을 돌려서 제자리를 찾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상생이란 것도, 결국은 자신을 위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이를 위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해 해야 하는 것이다."


2013. 4. 23. 금안당


* [대안 시선]에 업로드되는 글은 파주자유학교 전체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날짜

2013. 4. 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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